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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뉴욕에서 외국원수로는 최초로 '영웅 행진'을 벌이는 장면. 연도에 수십만 인파가 환호하고 고층 빌딩가에서 색종이꽃가루를 뿌렸다.
워싱턴에서 분주한 1주일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31일 토요일 아침 뉴욕으로 날아간다.
그날 오후 뉴욕타임스(NYT)와 단독인터뷰가 예정되어있다. 그런데 이날 아침 NYT가 난데없이 ‘독도’(獨島) 기사를 2개면에 걸쳐 보도하다니...「한국이 섬들을 점령, 일본 주장」이란 제목으로 NYT 도쿄 지국장이 일본정부의 제보라며 대서특필한 기사였다. 더구나 독도 이름을 일본식 ‘다케시마 Takeshima’로 표기, 한국경비대가 불법점령하고 모종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일본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중계한 기사엔 한국 측 주장은 한마디도 없었다.
일본이 한미정상회담을 겨냥, 이승만을 견제하고 아이젠하워를 지원하여 독도영유권 주장을 국제화하려는 대미 로비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역시 일본의 홍보력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막강하다. 미국과 짜고 치는 카드가 분명하지 않은가. 일본은 그렇다 치고 미국이 더 괘씸한 이승만은 ‘교활한 요시다 시게루, 두고 보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을 두고 보자는 걸까, 그 결과는 열흘 후에 밝혀진다.
뉴욕의 전통적 호텔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인동포들의 환영을 받으며 간단한 오찬을 마쳤다. 이어 호텔로 찾아온 NYT 편집진과 인터뷰(연재97참조)를 진행한다. 미국 진보파 평화론의 대표언론에게는 정곡을 찔러야한다. ”미국이 통일 장애물“이라고!
저녁에는 맥아더 장군과 3년 만에 다시 만나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1시간 넘게 세계정세와 한반도 전략에 대하여 환담하였다. 그리고서 저녁 8시 뉴욕주재 한국 총영사관에서 개최하는 리셉션을 끝으로 오늘도 강행군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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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 파운드리감리교회 특별예배에 참석,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오른쪽에 해리스 목사.
◆이승만 ”해리스는 우리 조국의 위대한 챔피언“
이튿날 8월1일은 일요일, 이승만은 다시 워싱턴으로 달려간다.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멘토‘ 파운드리 감리교회(Foundry Methodist Church)의 오랜 담임목사 프리데릭 해리스(Frederick Brown Harris, 1883~1970)가 베푸는 특별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해리스 목사는 누구인가.
닷새 전 이승만 대통령의 공식방미 비행기가 워싱턴 공항에 도착했을 때 기내까지 들어와 맞이한 사람이 해리스. 미 상원 의장인 닉슨 부통령이 상원 원목인 해리스에게 그런 특별배려를 베풀 만큼 이승만과 해리스의 관계는 특별한 것이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부부가 파운드리 교회의 신도가 된 것은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옮겨온 1939년부터였다. 뒷날 이승만은 해리스 목사를 이렇게 부르고 있다.
”나의 친구이자 영원한 멘토이며, 내 조국의 위대한 챔피언(champion)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독립운동이 가장 어두울 때 해리스로부터 지혜로운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이라고 했다.
이승만보다 8세 아래인 해리스가 이승만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던가.
파운드리 교인이 되고부터 해방까지, 해방 후 3년간과 대한민국을 세우고 6.25전쟁을 치른 이후 이승만이 하야할 때까지 20여년간 해리스 목사의 ‘이승만 사랑-대한민국 사랑’은 미국인 누구보다도 특별하였고, 여느 한국인보다 더 뜨거운 ‘애국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퇴임한 이승만이 병상에 있을 때에도 하와이로 찾아와 위문했던 평생 동지!
두 사람의 주요 행적을 다음의 연구들에서 찾아보자. (유지윤-김명섭 [프레데릭 B. 해리스의 한국관련 활동] 한국정치외교사논총, 40집 1호, 2018.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청미디어, 2019. 기타)
★해리스는 이승만이 만든 ‘용미’ 네트워크의 핵심 지도자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미국내 ‘한미연대’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한다. 즉, ‘용미(用美) 네트워크’ 만들기, 미국의 정계 포섭을 위한 인맥을 발굴하고, 언론계 등 각계 지도층을 중심으로 ‘한미협회’(Korean-American Council)를 설립한다. 동시에 미국 기독교계의 인사들로 ‘기독교인 친우회’(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만들어 가장 중요한 정신적 연대를 엮어나갔다.
이 두 단체 조직부터 활동까지 앞장섰던 인물이 워싱턴D.C. 파운드리 감리교회 해리스 목사였다. 다시 말하면, 친미지미용미 전략을 구사해온 이승만 박사가 미국의 힘을 활용하고자 미국 전역에 그물망을 던질 때 자발적으로 협력한 미국인이 기독교계와 정계와 백악관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이 막강한 미상원 원목 해리스 목사였다는 말이다.
영국출생으로 미국에 이민한 해리스는 1924년 파운드리 교회를 맡은 이래 특유의 설교와 전도로써 교세를 크게 발전시켰는데,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후에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방미중인 처칠을 데리고 예배에 참석할 만큼 백악관 지근거리의 유명한 교회였다.
루즈벨트 사망후 대통령이 된 트루먼 역시 상원의 정신지도자 해리스 교회의 신도이다.
▶한미협회 이사장=이승만은 1942년 1월 설립한 이 단체에 해리스 목사를 이사장으로 앉혔다. 교인이 된지 3년 만에 그만큼 두 사람은 의기투합한 ‘동지’가 되었던 것. 특히 이승만의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1940)를 읽고 감명 받은 해리스는 이승만의 깊은 신앙과 고매한 학자의 인품, 선지자적 통찰력, 지성과 정의의 언행에 이끌려 푹 빠졌다. 한미협력 독립운동의 선두가 되어 이승만의 행동부대 연합사령관이 된 셈이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해리스가 “대한민국의 아버지요 일본에 반대한 1919년 봉기의 지도자 이승만 박사와의 오랜 우정”에서 이사장직을 수락했다고 보도했다.(1942.2.9.).
▶VOA 이승만 방송=해리스는 전쟁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에게 전한 ‘코리아 호소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에 대항하는 2천3백만 한국인을 도와주시오. 그들의 지도자 이승만 박사가 워싱턴 D.C.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성품, 인품, 민주주의에 대한 노력을 잘 압니다. 이승만 박사의 목소리가 한국인들에게 들리게 해주시오.”
그리하여 이승만의 떨리는 목소리가 6월13일 전 세계에 울려 퍼지게 된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이 소식은 독립의 소식, 생명의 소식입니다. 동포여 무기를 들라! 싸우라. 싸우라!” 날마다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단파방송을 타고 울리는 그 목소리는 한반도 해방을 알리는 메시지! 그동안 ‘외교독립론’을 주창 실천하며 “때가 올 때까지 폭력투쟁을 반대”해 왔던 이승만이 ‘때’가 되자 전세계 동포의 ‘무장투쟁 궐기’를 선창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때 미국의 OSS에 한국청년들을 천거하여 훈련시킨 이야기는 앞에 썼다.
▶대한인자유대회=3.1절 23주년, 이승만은 재미한민족연합위원회와 한미협회를 주축으로 워싱턴 라파예트(Lafayette)호텔에서 ‘대한인 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를 개최한다. 한인대표 100여명과 미국인 100여명 앞에서 이승만은 다짐한다.
“자유는 결코 죽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독립을 찾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할 것이며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사흘간 열린 자유대회는 워싱턴 D.C.의 라디오방송(WINX)이 중계하였다.
해리스 이사장은 “전쟁이 끝나면 코리아가 다시 자유와 독립을 누리게 되기를 기도하자”며 대회에서 채택된 공동선언문을 백악관과 스팀슨 장관 등 정관계 요로에 배포하고 ‘독립청원 편지 쓰기’ 캠페인을 벌였다.
▶미의회 상원 원목(院牧:Senate Chaplain)=그해 1942년 10월10일 해리스는 미국 상원의 원목에 취임한다. 기독교정치 시스템 미국 정계에서 상원 원목이 차지하는 위치는 ‘예수의 대리자’로 대접받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다. 해리스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랜 24년간 재직, 미국 의원들과 백악관 트루먼 대통령을 접촉하면서 이승만을 결정적으로 지원한다.
부통령 트루먼과 의희 지도자였던 해리스는 대통령 트루먼과 백악관 출입하게 되고 트루먼은 해리스를 불러 국정을 상담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때 해리스가 벌인 ‘이승만 협력 활동’을 보자.
첫째,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창립총회에 초청받지 못한 이승만은 얄타 밀약을 폭로(연재30참조)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트루먼은 “밀약이 없었다”고 회신한다. 그러자 이승만은 ‘유엔에 참석시켜 달라’는 편지를 또 보냈다. 이 작업을 해리스 목사가 중계한다.
둘째, 트루먼에게 태극기 전달: 일본의 항복 직후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한국독립’을 환기시키는 편지와 태극기를 보낸다. 스탈린과 장제스, 영국 애틀리에게도 보냈다. 이때 트루먼에게 “38선 분단과 신탁통치는 유혈내전을 부르니 철회하라”고 요청했다. 해리스가 전달한 편지와 태극기에 대하여 트루먼이 “잘 알았다. 감사하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셋째, 귀국한 이승만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 신탁통치 반대 투쟁을 하며 해리스에게 호소한다. 해리스는 미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에게 신탁통치 반대와 철회를 촉구하였고, 이승만의 ‘정읍선언’에 대해서도 절대 지지를 보내며 국무부에 서한 발송 등 지원활등을 벌인다.
넷째, 미국내 반한세력들의 한국과 이승만에 대한 비방에 대하여 반박문을 꼬박꼬박 써서 공개하였다. 자신이 1925년부터 발행하는 [파운드리 팩츠](Foundry Facts)에 반박문을 매번 게재하고 트루먼대통령 등 미국 유력정치인들에게 배포하였다. 이 일은 수십년간 지속되었다.
▶결정적 유엔 외교=미군정의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1946년말 도미한 이승만은 워싱턴 칼튼 호텔에서 작전회의를 소집한다. 해리스 이사장을 비롯, 변호사 스태거스, INS통신 편집진 윌리엄스 등 한미협회 미국인 이사들과 임영신, 임병직이 아래와 같은 6개항을 만들어 백악관에 전달하고 해리스는 개인 편지도 보낸다.
① 코리아(Korea)의 두 반쪽이 통일되어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쪽에 과도적 국민정부(an interim national government)가 선출되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② 코리아에 관한 미·소 협의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이 과도정부는 [유엔에 가입해야만 하며] 미국과 러시아의 코리아 점령과 다른 돌출사안들과 관련하여 협의할 수 있어야만 한다.
③ 코리아의 경제재건을 위해 일본에 대한 배상 주장이 가능한 빨리 검토되어야 한다.
④ 다른 국가에 대한 편향됨이 없는 완전한 통상권이 코리아에 부여되어야 한다.
⑤ 코리아의 통화는 국제적인 교환원칙에 입각, 안정되어야 한다.
⑥ 미군은 미·소 양국의 점령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코리아 남쪽에 주둔해야 한다.
과연 트루먼도 긍정적 반응 보내왔다.
이윽고 다음해 9월 한반도통일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고, ‘유엔감시 남북한 총선 결의안’으로 채택되어 역사의 대전환을 이루었다.
이와같이 이승만+해리스+트루먼의 삼각네트워크는 대한민국 건국의 가교가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식에 해리스를 초청했으나 오지 못했다. 1950년 3.1절 이승만대통령은 독립유공자 해리스에게 태극훈장을 전달한다.
▶6.25 전야 이승만의 국빈방문 주장=해리스는 6.25전쟁 한 달전 쯤, 트루먼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공식방미를 제안한다. “한국인들은 트루먼 대통령을 진정한 친구로 여기므로 그 지도자 이승만을 국빈으로 공식초청하자”고 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한국의 5.30총선과 미국의 11월 선거가 겹쳤다며 선거 뒤로 미루었다.
▶6.25 미군 파병=트루먼 대통령이 전쟁발발 즉시 신속하게 미군과 유엔군의 파병 결정을 내린 것은 스탈린에 대한 즉흥적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리스 목사의 8년간에 걸친 ‘코리아 캠페인’과 전쟁초기 ‘코리아 구하기’ 요청이 반공주의자 트루먼을 더욱 분발시킨 영향력도 결코 작지 않다. 미국의 기독교계가 아시아의 최대 기독교국가 한국을 지키자고 요구해서 미국이 파병하게 되었다는 말들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31세 청년 빌리 그래함 목사도 그 중의 한명이다.
▶전쟁 지원=파운드리 교인들에게 호소하여 해리스는 전쟁 중과 전쟁 후까지 구호금과 물자를 모집, 한국에 발송한다. 또한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기관 책임자들도 해리스와 의논하였고, 1958년 무렵부터 미국이 대한원조액을 감축하려하자 해리스는 이를 가로막고 강화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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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이 해리스 목사(왼쪽), 밴 플리트 장군과 담소하는 모습.
★“모두 나를 비난해도 좋다. 하나님만 나를 책망하지 않는다면...”
이쯤에서 다시 이승만의 국빈방문 현장으로 돌아가자. 오랜 세월 갖가지로 은혜 입은 ‘멘토’ 해리스 목사를 다시 만난 이승만의 감회는 남다르다. 동행중엔 또 다른 반공지원자 노울랜드 상원의원과 아들 같은 밴 플리트 장군도 따라와서 특별기도를 함께 올린다.
이승만이 ‘나의 목사님’이라 부르는 해리스 목사는 이날 ‘무신론 공산주의의 평화주의 악용론’에 대하여 설교한다. 이승만이 [JAPAN INSIDE OUT]에서 주창한 오랜 지론과 같은 ‘미국을 망치는 평화론의 각성’을 설파하여 해리스는 이번에 이승만이 벌이는 연설캠페인을 응원하는 동지애를 발휘해주었다.
새삼 감동한 이승만 대통령이 단에 올라 깊은 감사를 표하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한국이 자유를 찾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오. 많은 사람들이 만약 우리 한국이 100만 중공군을 북한에서 몰아내려 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가공할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인류의 문명을 파괴할 것이고 말들 합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끔찍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우리는 수소탄보다 더 위력적인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우리를 위기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에 아시아 최강의 반공 군대를 보유하도록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 한국이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모두 나를 비난하라고 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나를 질책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미국 의회에서,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기자클럽에서, 참전용사들에게 한결같은 신념을 펼친 이승만이,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서 불굴의 신앙을 고백하는 순간이었다.
원문대로 다시 읽어보자.
“I know God will not tell us what we are doing is wrong.
He is a God not only of love but a God of righteousness.
I am not afraid. Let them all criticize me.
But as long as God does not condemn me,
that is all.“ (대한민국 공보처, 앞의 책. 이현표, 앞의 책)
지난 해 여름 경무대에서 로버트슨이 대표하는 미국과 1대1 담판을 벌일 때, 일방적인 휴전에 동의하지 않으면 한미동맹은 불가능하다며 아이젠하워가 버틸 때, 이승만은 경회루 연못에 나가 낚시 대를 드리우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하였다. 3시간 내내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올바른 길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하던 그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답을 들었던가.
”휴전은 안 된다. 북한 동포를 구원하라. 통일을 포기하면 결코 아니 된다“
그리하여 만든 명답—휴전은 찬성 못한다. 단지 미국을 방해하진 않겠다--
그리하여 지금 통일을 ‘방해’한 미국에 와서 국빈으로서 중공대륙의 해방과 아시아인들의 자유화와 한반도 남북통일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이승만이다.
누가 그를 독재자라 비난하는가. 오로지 한반도 통일을 완수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자가 신성한 사명을 수행하는 자유투쟁일 뿐이다.
★해리스 ”이승만은 독재의 피가 한방울도 안섞인 고결한 인격의 자유애호가“
다음해 1955년 3월26일 해리스는 이승만에게 생일축하 전문을 보냈다. ”훌륭한 기독교이자 국가원수이며 세계의 용맹스런 자유수호자에게 축복을“ 기원한다. 이승만은 ”우리교회 파운드리 구성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나의 여생은 짧을지라도 여전히 열정으로 불타오르며,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 독립적 민주주의로 통일되기까지 쉬지 않겠다”고 답신을 전했다.
1년 후 8월25일 해리스는 한국을 방문한다. 그동안 이승만의 초청을 응하지 못했지만, 이번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특사로 임명하여 특사단과 함께 왔다.
보육원-영아원 등 순회와 구호품 전달, 경주 불국사, 진해 이승만 별장과 해군기지까지 둘러 본 해리스는 유엔가입추진 국민대회에도 이승만부부와 참석하였고, 서울대에서 명예법학박사, 부인은 이화여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4월 이승만이 경무대를 떠날 때 해리스는 말한다.
“독재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인 고결한 인격의 자유애호가”
“북한의 공산진영이 지금 남한에서 일어난 봉기에 박수를 보내는지 경계해야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는 이승만이다. 그는 한국과 미국을 위해 싸웠다.”
한국에 파견 나가는 목사에게 해리스는 이런 말도 했다. “이승만이 모든 곳에서 한국의 조지 워싱턴으로 존경받고 있음을 듣게 될 것이오.” (유지윤-김명섭,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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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통령 강경연설 계속'이란 제목으로 뉴욕 연설을 보도한 UP통신 기사. '무력만이 승리'를 보장한다는 연설도 옆에 보인다. 동아일보 1954.8.2ⓒ동아DB
◆참전용사들에게 미국대통령처럼 연설
파운드리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필라델피아로 날아간다. 거기 외국참전용사회( Veterans of Foreign Wars:VFW)의 연례총회에서 강연을 초청했기 때문이다.
세계1-2차대전 등 해외전쟁에 나갔다가 퇴역한 장병 회원이 150만명, 미전역에 7,700개 지부를 거느린 VFW는 해마다 순회총회를 개최하는데 이번에 공교롭게도 필라델피아였다.
아, 필라델피아! 이승만에겐 남다른 아픔과 역사적 의미가 서린 도시이다.
1905년 조지 워싱턴대학교 유학시절, 조강지처 박 부인이 보낸 어린 아들 태산을 갑자기 전염병에 빼앗겨 묻은 곳이다. 공부와 고학과 독립운동으로 분주한 홀아비는 워싱턴서 강연 중에 비보를 듣고 달려갔지만 전염병인지라 아들의 마지막 얼굴도 보지 못했다. (연재9참조).
또한 미국 독립의 도시 필라델피아는 1919년 4월 이승만이 ‘미국판 임시정부 의회’를 소집하여 대한민국 건국대회 ‘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고, 헌법의 기초 ‘건국종지’(建國宗旨)를 결의하였으며, 독립선언과 시가행진으로 미국판 3.1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그 때 마침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가수반으로 선출되었다는 전보를 받고 미국의 독립기념관에서 조지 워싱턴의 자리에 앉기도 했던 필라델피아 아닌가. (연재15참조).
◉만약 ‘상하이 임정’이 아니었다면?=필자는 늘 이런 상상을 해본다. 그때 만약 그 전보가 아니었다면 이승만이 미국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을지도 모른다고. 결정적인 순간에 날아온 상하이 임정수립 전보, 제퍼슨주의자 이승만은 극심한 갈등을 겪었을 것이고, 잇따라 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는 소식까지 접하자 결국 그는 ‘미국판 임정’ 수립을 포기하였으리라 추측된다. 미국식 민주주의자이자 기독교 자유주의자 이승만이 국내외 동포들의 결정을 무시하고 또 다른 독자적 임정을 수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시 해리스 목사의 말대로 ‘독재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인 자유애호가’였음에랴.
하지만 필자는 이와 관련된 자료가 혹시나 없을까 조사했지만 발견하지 못하였다. 현재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에 쌓여있는 수십만 건의 ‘이승만 문서’에서 언젠가 그와 관련된 기록이 한 줄이라도 발견되지 않을까?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지만 ‘The First Korean Congress’(제1회 대한인 의회)란 대회 명칭과 ‘건국종지’ 내용이 이미 임시정부의 수립준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국종지’의 영어 원명은 ‘Aims and Aspirations of the Koreans’인데 이를 ‘건국 종지’라 호칭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 내용은 뒷날 건국헌법에 고스란히 반영되지 않는가.
★아이젠하워의 우유부단한 정책을 통렬히 비판
각설하고, 이승만의 운명에 인연이 깊은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은 공항에서 애국가 연주와 펜실베이니아주 방위군 사열로 환영식을 마친 뒤 시내로 달려가 행사장에 들어섰다. 컨벤션 홀에 가득 찬 참전용사 5천여명의 기립박수가 터졌다.
저녁8시30분 마이크 앞에 서는 순간 이승만은 눈앞에 가득한 자유투사들이 너무 반갑다.
“나는 오늘 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에 서 있습니다. 바로 자유국가들의 용맹스러운 전사들 가운데 서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는 자유를 수호하는 내 조국, 미국, 여러 나라의 군부대를 방문합니다. 시찰을 통해 나는 장병들로부터 커다란 자극을 받고 더 나은 인간이 되어 국가 업무로 복귀합니다.
전투병에게는 고상하고 성스러운 그 무엇이 느껴집니다. 그의 삶은 고되고 위험하며 헌신적입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군인은 그가 정의롭고 옳다고 알고 있는 대의(大義)를 위하여 투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통령 이승만의 군에 대한 인식, 자유투사 이승만의 투사에 대한 애정, 국군통수권자로서 만이 아니라 자유세계의 최후 보루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총지휘관으로서 내장된 전쟁관이며, 바로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소망하는 자유통일의 사명의식이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먼저 살다 간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분들에게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에 보답하는 길은 자유의 횃불을 높이 드는 것입니다...(중략)
여러분들에게 투쟁의 목표였던 대의는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타협의 산물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승만은 6.25전쟁에서 산화한 미군 장병들과 그 가족들을 위로하며 미국정부와 국민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가장 신랄하게 미국정부를 겨냥한다.
“소련은 자기네 위성국들에게 공산주의가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도 장담, 위성국들의 결의와 신뢰를 강화시켜주고, 그것을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을 봅시다. 자유세계의 주축 미국은 목표 추구에 확고부동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거늘,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중략)
자유세계의 챔피언은 하루는 수백만 달러를 지원하다가 다음날은 그 돈을 회수해서는 안 되며, 우방에게 무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참전용사들의 역할을 강조한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도 미국 국민들을 설득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그래야 국민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미의회에서 주창한 중공의 자유화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미국이 중국 본토를 해방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중국대륙이 자유화되지 못하면 아시아를 구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확고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단호하에 실행에 옮긴다면, 죽(竹)의 장막‘ 뒤에 있는 중국 국민에게 공산주의자들과 어디서든 투쟁을 시작하도록 북돋울 수 있을 것입니다.(중략)
지끔까지 공산주의자들은 꼭 한 번 저지되었을 뿐인데, 그거도 한반도에서 무력으로서입니다. 평화는 바람직한 것이지 공산주의자들이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절대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보다 나쁜 것, 전쟁보다 나쁜 것이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나쁜 것입니다. (중략)
여러분! 미국이 위험하다고 경고해 주시오. 평화를 바라는 나머지 심지어 자신의 인격까지도 희생하려는 사람들의 위험에 대해서 경고해 주십시오.
더 이상 기다리지 맙시다. 우리의 대의에 대한 확신과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결의로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춥시다!”(대한민국 공보처, 앞의 책. 이현표, 앞의 책)
이 연설은 마치 미국 대통령이 미군들에게 전투태세를 독려하는 것 같았다.
미군들 앞에서 미국대통령의 우유부단한 반공정책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서둘러 중국본토를 수복하지 않으면 한국은 물론 아시아가 자유의 적들에게 노예로 전락한다는 절규! 미국 지도층이 인격마저 버리며 공산당에 평화만 구걸하면 미국마저 정복당할 것이라는 경종!
이와 같은 장면은 그러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런 당당함이 약소국 대통령으로서 강대국에 보이려는 ’배짱‘에서 나온 것으로만 오해하면 안 된다.
자신이 말했듯이 6.25전쟁 중에 사흘이 멀다 하고 한국군을 비롯하여 미군과 유엔군 부대를 순회 시찰하였을 때 이승만은 무슨 말로 전투 장병들을 격려하고 계몽했던가.
“여러분은 한국의 자유를 지키려고 멀리 와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지만, 그것이 바로 여러분 조국과 여러분 가정의 자유를 지키는 투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는 자유의 십자군임을 명심해야한다”
이 연설과 참전용사총회의 연설은 같다. 다만 상황의 주제가 다를 뿐이다.
망명시절 ’믿는 사람들은 주(主)의 군사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란 찬송가를 열창하며 예배를 이끌던 하나님의 사도 이승만 박사! 한성감옥 이래 불변-불굴의 신념은 공산주의 침략을 이겨내며 더욱 자유세계 전체를 선도해야할 사명감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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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영웅 퍼레이드에서 오픈 카에 쏟아지는 꽃가루를 맞으며 모자를 흔들어 답례하는 이승만 대통령.(사진=이현표 [워싱턴의 겁쟁이들]에서)
◆뉴욕 ’영웅 퍼레이드‘...“거짓 평화에 속지 마시오”
밤늦게까지 필라델피아 행사를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자정이 넘어서야 뉴욕에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뉴욕 시장이 초청한 ’영웅 퍼레이드‘(Heros Parade)와 오찬회 때문이다.
이 오픈 카 영웅 행진은 1886년 자유의 여신상이 건립되면서 시작, 영웅으로 선택된 이에게 긴 테이프와 색종이 꽃가루를 날리는 뉴욕시의 전통행사(Ticker-taped Parade)로 정착했다.
1951년 세계 2차대전과 6.25의 영웅 맥아더의 퍼레이드가 유명하지만, 지난 2019년 월드컵 우승 여자축구팀, 2021년 코로나 사태 후 간호사 등 의료인들이 영웅으로 뽑혀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국내 잔치에 외국 국가원수가 선택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최초였다.
이런 환대는 반공시대의 자유투사(freedom fighter) 이승만에 대한 미국인들의 존경심의 발로였던 것이며, 아이젠하워의 이승만에 대한 존경과 일방적 휴전 결과에 대한 죄책감도 작용했으리라 보여진다.
아, 잊을 수 없는 뉴욕...그때부터 꼭 20년전 1934년 10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몽클레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었지...집도 없는 59세 신랑과 34세 신부는 신혼의 행복도 즐길 사이 없이 중고차로 신혼여행을 떠났었다. 스피드광 이승만의 난폭한 운전, 대륙을 횡단하여 하와이로 달려갔었지...이제 80노인과 54세 백인 아내는 분주한 일정에 쫓기는 대통령 부부, 최고급 호텔에 들어 기도를 올리고 쪽잠을 자야 한다.
8월2일 월요일 부슬비가 내리는 아침, 뉴욕시장 와그너(Wagner) 부부가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와서 이승만 부처에게 꽃다발을 증정한 후, 11시30분 퍼레이드에 나섰다.
브로드웨이(Lower Broadway)를 따라 맨해튼 남쪽(Lower Manhattan) 뉴욕시청까지 오픈 카 퍼레이드, 30여대의 차량이 서행하는 연도에는 15만명(미언론보도) 뉴욕시민들이 몰려나와 미국동맹 반공의 영웅 부부에게 박수를 멈출 줄 모르고 환호를 외치고 있다. 마천루 빌딩마다 색색 테이프와 종이꽃들이 오픈카 부부에게 눈보라처럼 쏟아져 내려 흩날린다.
뉴욕시장과 1호차에 탄 이승만 대통령이 앉아서 꽃가루를 맞으며 일어서서 모자를 흔들며 열렬한 환영에 감사하는 답례를 보낸다. 뒤 따르는 2호차엔 프란체스카 여사와 뉴욕시장 부인 둘이서 눈앞을 가리는 테이프와 색종이 꽃보라 속에서 연신 손을 흔들어 미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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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그너 뉴욕시장으로부터 뉴욕명예훈장과 기념증서를 받는 이승만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 밴 플리트의 이승만 소개=약 30분후 퍼레이드는 뉴욕 시청 광장(NY City Hall Park)에 닿았다. 뉴욕시 취주악대의 연주와 함께 2만5천명의 초청 인사들과 시민들이 빽빽하게 둘러선 시청광장에서 환영행사가 시작된다.
와그너 시장이 긴 환영사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에게 뉴욕 명예훈장과 기념 증서를 선물했다.
이어서 밴 플리트 장군이 소개말을 감명 깊게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반공진영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이 분이 우리를 만날 때 눈물을 보이여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미국 청년들이 한국까지 와서 싸우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부디 귀국 정부에 건의하여 미국청년들을 보내는 대신에 우리에게 무기를 보내주라고 해주시오. 그러면 모든 싸움과 피 흘리는 희생은 한국이 맡아서 할 것이오“
이대통령은 우리를 항상 사랑으로 대해주었으며 우리는 그런 그분에게 경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용하던 용사들이 열화와 같은 박수를 치며 환호를 터트렸다.
◉ ’감동‘ 만드는 즉흥 해프닝=이승만 대통령이 답사에 나섰다.
“뉴욕 시민 여러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나는 제3차 대전을 지금 하느냐, 시기를 미루느냐 하는 점에서만 견해차이가 있습니다. 나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세계를 파국으로부터 구출하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늦어질수록 더욱 참혹해질 것입니다. 재앙을 피하려면 미국인과 자유세계 국민들은 지금 행동해야만 합니다.
밴 플리트 대장이 훈련시킨 한국 청년들이 이제 극동 최강의 반공군대가 되었습니다. 한국 육군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밴 플리트 장군이 다시 한국에 와서 더 많은 우리 장병들을 양성해 주기 바랍니다.”
가는 곳마다 ’3차대전 막으려면 선수를 치자‘는 이승만의 지론은 뉴욕시민 앞에서도 빠짐이 없었다. ’지금 행동하자‘는 말이 ’중국본토 수복’ 주장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때와 장소에 따라 청중의 감동을 끌어내는 ‘타고난 선동가’ 이승만이 또 좋은 소재를 던진다.
“지금 퍼레이드를 하던 중에 행렬을 선도하는 피츠패트릭(George Fitzpatrick) 순찰대장님의 아드님이 2년전 한국 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 청년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가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장력하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중략)
아시다시피 우리는 자유가 생명 그 자체보다 더 귀중함을 인식합니다. 우리 양국국민이 굳게 단결합시다. 우리가 단결해야 미래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그리고 위가 함께지키는 대의명분에 축복을 내려주실 것을 기원합니다”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순찰대장을 불러 손을 잡아 흔들며 사진도 함께 찍는 것도 잊지않았다.
◉아이젠하워 직격=뉴욕 시장의 환영행사가 끝난 뒤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남자들만 참석하는 ‘숫사슴 오찬’(stag luncheon)이 열렸다. 여성배우자 동반 없는 오찬이다.
기도는 추기경 프란시스 스펠만(Cardinal Francis Joseph Spellman)이 맡았다. 미국 가톨릭의 상징적 인물 스펠만 추기경은 해방후 미군정 때부터 6.25 파병까지 한국을 적극 지원하며 매년 성탄절에 찾아와 한국 천주교의 성장에도 기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말로 즉흥 연설을 마무리한다.
“오직 힘으로만 공산침략자들을 무릎 꿇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힘으로만! 여러분에게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할 것을 호소합니다. 만약 누구든지 평화회담이나 휴전을 통해 한반도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거든, 그런 자에게 속지 말라고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런 자가 누구? 아이젠하워를 직격하는 비수와 같은 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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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컬럼비아 대학을 방문, 명예법학박사 학위을 받은 이승만 이승만대통령 부처.
★컬럼비아 대학서 명예박사...“아시아를 구하시오!”
이날 오후4시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컬럼비아 대학교에 갔다. 개교 200주년 맞은 컬럼비아 대학은 이승만도 박사학위를 따러 들어가려던 미국동부 8대 아이비리그 명문중 하나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공부하던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스티븐스 암살사건 때문이었다.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 두 의사가 고종의 외교고문으로서 일본을 대변하는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사살한다. 이 여파로 미국에 한국인 기피현상이 일어난 것, 보스턴에 있던 이승만은 즉각 달려가 뒷수습에 달라붙었다.
재판에서 변호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이승만이 거부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데, 사실은 정반대였음이 밝혀졌다.
하버드 대학원에서 학위를 마쳐야 했던 이승만은 미국 법에 정통한 미국인 변호사를 두 의사에게 붙여주었고, 소송에서 이겨야하는 독립운동의 명분을 중심으로 변론내용까지 상세하게 영문으로 만들어 주었던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상수 [송철 회고록] 1983).
하버드 대학 내에서도 이승만의 지도교수까지 제자를 경원하는 풍조 때문에 이승만은 컬럼비아 대학을 찾아가려 뉴욕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운 좋게도 유학 전 한국에서 친분 깊던 선교사를 만나 프린스턴 대학교로 바꿨던 것이다. (연재9참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학위 수여식이 거행되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답사를 한다.
“전 세계 챔피언이자 리더인 미국 정부가 지도적 위치에서 우리를 승리로 이끌지 않고도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생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미국의 도움 없이는 자유 대한, 자유 중국, 그리고 자유 유럽도 없습니다.
아시아를 구하시오! 이것이 나의 호소입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혁명가들을 격려해야만 합니다.
그들을 저버리지 마시오!”
<계속>
◆필자 인보길(印輔吉)=현 뉴데일리 회장, 전 조선일보 이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디지털 조선일보 대표 역임. 2010년부터 '이승만 포럼' 운영 대표. 2023년부터 이승만 기념관 건립위원. *저서: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이승만 다시보기] 외. YouTube '인보길의 우남이야기' 뉴데일리TV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