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방미 마지막 코스 '제2의 고향'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이 동포들이 걸어준 레이를 세개나 걸고 눈물을 흘리는 동포들의 손을 흔들며  환담을 나누었다.
    ▲ 방미 마지막 코스 '제2의 고향'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이 동포들이 걸어준 레이를 세개나 걸고 눈물을 흘리는 동포들의 손을 흔들며 환담을 나누었다.
    아, 알로하 오에~~!! 하와이를 떠났던 이승만이 다시 호놀루루에 돌아왔다.
    망명 투쟁 26년 만에 1939년 워싱턴으로 갔던 그가 15년만에 대통령이 되어 나타났다. 
    알로하 오에(Aloha ʻOe)는 하와이 말로 '안녕 그대여'란 민요, 작사-작곡자는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왕이자 유일한 여왕 릴리우오칼라니(Queen Liliʻuokalani, 1838~1917)이다. 이별 노래이자 사랑 노래, 아니 망국의 설움을 달래며 독립 의지를 불태우던 노래이기도 했다.
    청년시절 1893년 미국의 하와이 합병 소식에 미국 선교사들을 미워했던 이승만은, 1913년 망명한 그 하와이가 사탕수수밭 6천명 이민동포들과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기독교 자유민주 공화국’의 꿈을 키우는 제2의 고향이 될 줄이야! 그곳에서 3.1운동을 원격 지휘했고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다가 마침내 독립국가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대통령이 되어 ‘금의환향’한 셈이다. 8월8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비행기는 같은 날 저녁때 히캄(Hickam) 공군기지에 도착하였다.
    그곳엔 수백명의 동포들이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눈물을 흘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와이 주지사 사무엘 킹(Samuel King) 일행이 직접 영접하고 미태평양함대 사령관 펠리스 스텀프(Felix B. Stump)도 하와이 레이(Lei, 꽃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동포들 한사람 한사람 손을 잡아주며 걷는다. 걸을 수가 없다. 기쁨의 포옹과 엉엉 우는 소리, 놓지 않으려는 손과 손들...대통령 부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반갑소...기쁘오...친구들이여...여기는 내 고향이었소...”
    공식 환영행사인지라 간단히 인사를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기자들의 회견에도 간략한 답변으로 대신하였다. 숙소는 진주만 미해군기지 사령관 관저 옆 마칼라파(Makalapa) 영빈관.
  • ▲ 독도의 신축 등대.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 세운 무인 등대는 박정희 정부때 자리를 옮겨 유인 등대로 개축하였다.
    ▲ 독도의 신축 등대.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 세운 무인 등대는 박정희 정부때 자리를 옮겨 유인 등대로 개축하였다.
    ◆“일본은 평화선 존중하라” 기자회견후 ‘독도 등대’ 점등식

    구름 한점 없는 하늘, 드넓은 태평양 출렁이는 거센 파도 속에서 태양이 솟아오른다. 
    8월9일 아침 일찍 하와이 주지사가 찾아와 문안을 하며 담화를 나누고 갔다. 곧 바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신문들의 기자단과 공식 회견을 진행한다. 
    이날 회견은 공식 방미를 결산하는 셈이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날에 맞춰 특별히 준비한 메뉴들이 있었다. 질문은 빼고 답변만 요약해서 들어보자.

    군사원조 문제=한국군은 적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기에는 아직 충분할 만큼 증강되지 않았고 훈련도 미흡하다. 현재 우리는 20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으나, 정규군 이외에 동원할 수 있는 청년이 150만명이나 되므로, 미국 정부에 대해 육해공군의 원조를 대폭 증강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현재 워싱턴에서 주한유엔군을 철수할 계획을 추진 중인데, 우리 국군이 한국방위에 관한 책임을 도맡을 수 있는 제반 준비태세를 갖추게 되는 날도 그다지 멀지 않으리라 본다고 했다.

    한일관계=일본은 아직도 한국에 대해 침략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앞으로 한국의 정치, 경제적 권한을 예전처럼 자기네 수중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음이 확실하다. 일본 정부는 제2차대전 종전 후에 여러 현안에 관한 한국과의 협상에서 지연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 한국 문제는 일본의 군사력이 다시 강화되면 해결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다시는 한국을 정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빨리 이해할수록 한일관계는 호전될 것이다.
    한일 협상조건=첫째, 일본이 한국의 토지재산에 대해 주장하는 권리를 빨리 포기하라. 둘째 합법적으로 조인된 바 없는 보호조약(1905년 을사조약) 및 합병조약(1910년)의 전면무효를 인정하라. 셋째 한국에서 약탈해 간 그 많은 국보-보물 등 모든 한국재산을 반환한다면, 한국은 일본에 대한 배상요구를 포기할 협상에 응할 용의도 있다. 
    미국의 원조자금 사용=미국의 납세자들이 기간산업 부흥용으로 많은 자금을 제공해왔으나, 결국은 전부가 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미국 대외경제협조처) 자금과 같이 합쳐져 일본에서 소비품을 수입하는 데에 다 소비되고 말 것이다.
    미국 ECA 당국자들은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오는 것이 값싸다는 핑계로, 한국의 경제 재건보다는 일본의 경제력을 강화해주고 있다. 
    우리의 재정정책은 얼마나 많이 외국 원조를 받느냐 하는 액수보다, 우리가 받는 원조자금이 정당하게 사용되고 있느냐는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워싱턴 당국과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평화선=일본은 한-일 양국 간에 확정된 평화선에 대하여 국제법에 위배 되는 주장이나 행위를 포기하고 합법성을 존중하라. 이 선은 국제기준에 따른 영해선이다. 따라서 평화선 안의 우리 바다에서 어로에 종사하는 한국 어선들에 대한 불법적 방해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국제법으로 보호해 줘야 마땅한 일이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의 회견은 일본 문제에 집중되어있다. 
    첫째, 을사 늑약과 경술 국치에 대한 전면 무효를 다시 요구하였으며, 둘째, 요시다 시게루의 침략 근성을 고발하였고, 셋째 미국이 한국정책을 무시하고 한국원조자금으로 한국경제를 재건하지 않고 일본 경제를 재건해 주는 정책을 다시 한번 규탄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으로 ‘평화선’의 국제법적 합법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이날 한국에서 특별한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행사인가?
  • ▲ 박근혜 정부때 2014년 울릉도에 세운 '독도 의용수비대 기념관' 건물.
    ▲ 박근혜 정부때 2014년 울릉도에 세운 '독도 의용수비대 기념관' 건물.
    ◆독도의용수비대, ‘한국령’ 새기고 등대 불을 키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이승만이 사전 준비시킨 ‘독도 등대(獨島燈臺) 점등식’이다.
    당시 독도에는 ‘독도의용수비대’ 40여명이 2년전부터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6.25 전쟁이 한창일 때 이를 이용한 일본이 세 차례나 독도에 무단 상륙, 한국 어부의 위령비를 파괴하고 ‘다케시마’란 일본 주소 표목을 세우는 등 침략행위를 저질렀다. 이때 울릉군 출신 6.25참전 용사 홍순칠 특무상사 등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한다. 오징어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경북도경 등에서 박격포, 중기관총, M1 소총등을 지원받아 무장했다. 1953년 6월부터 접근하는 일본 선박들을 물리치고 무장한 일본 해안청 순시선과 몇 차례 교전도 벌이며 격침도 시키는 ’독도 대첩‘을 기록하기도 한다. 
    수비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건립하는 등대 공사를 전적으로 도왔으며, 다음 해 1954년 6월엔 동쪽 섬 암벽에 ’韓國領‘(한국령) 세 글자를 공중 식별이 가능할 만큼 크게 새겨놓았다. 
    미국의 국빈방문 초청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도미하기 한 달 전에 완성한 작업이다. 그리고 나서 수비대와 관련자들은 독도 등대 점등식 차비를 진행하며 미국을 순회 중인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일본이 뉴욕타임스(NYT) 특파원에게 로비하여 보도(7월31일자)를 의뢰한 기사 내용은 독도의용수비대와 점등 관련자들의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독도를 한국령으로 확보한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포는 1952년 1월 18일이다.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으로서, 대한민국과 중국-일본 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보호 및 해상 주권 확보를 위한 경계선, 즉 영해(領海)를 설정한 것이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1951년 9월 8일 연합국과 일본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다음해 4월28일 조약 뱔효를 3개월 앞둔 때였다. 
    일본의 맥아더사령부가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사라지면 한국 영해의 확보가 시급하므로 국제법박사이자 외교전문가 이승만 대통령은 거침없이 선을 그었던 것이다. 일본이 ‘이승만 라인’이라며 반발하자 이승만은 ‘한일간 평화 유지를 위한 평화선’이라 못을 박았다. 
    그해 4월, 미군정에서 해방되어 독립한 일본이 실력 행사에 나선다. 어업 지도선이 몰래 독도에 들어와 일본 주소(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를 적은 푯말을 꽂아두고 도망갔다. 이 주소는 1905년 봄 러일전쟁 끝물에 일본이 독도를 강점한 뒤 붙인 것이다. 
    격분한 이승만은 일본의 침략행위로 간주, 전시 긴급명령을 발동한다. 우리 군과 경찰은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선박들을 모조리 나포, 장비를 몰수하고 선원들은 구속 재판에 회부하였다. 정선 명령에 불응하는 선박은 바로 총격을 가하고 추적해 격침 시킬 정도로 철저히 영해와 독도를 확보하는데 전력을 기울인 이승만 대통령이다. 이때 ‘다케시마’ 푯말을 뽑아 바다에 던지고 군의 작전에 동참하여 전투를 벌인 사람들이 독도의용수비대였다.

    ▶이와 같이 지켜낸 무인도 독도의 영유권을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는 깃발을 꽂은 행사가 그 유명한 독도 등대 점등식이다. 
    미국방문 마지막 코스 하와이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평화선의 국제적 지위를 주장한 뒤 이승만 대통령은 저녁 6시 긴급명령을 내린다. “준비는 끝났느냐. 등대에 불을 켜라”
    그 시간 한국은 10일 낮 정오 12시, 바위섬 꼭대기에 설치한 등대에서 불빛이 동해바다로 뻗쳤다. 동시에 서울 외무부에서는 세계 각국에 긴급 타전을 두드린다. 
    「독도는 한국땅, 등대 설치 점등 완료. 오늘부터 업무 개시」 
    공산권을 포함한 모든 국가들에게 영유권을 통고하고 항로 안내 업무를 개시하였음을 알린 것이다. 이로써 일본이 뭐라고 시비하든 독도는 명실공히 ‘한국 땅’으로 확보되었고, 그것은 우리 바다 동해를 지키는 등대 불이 365일 시시각각 전 세계에 반짝반짝 가르쳐줄 터이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날 독도는 한국 영토로 남아 있을까?
    해마다 ‘독도의 날’을 기념하고, 8월 10일마다 ‘등대 점등’ 몇십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는 ‘이승만’ 이름 석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올해는 꼭 70주년 행사가 있었다. 
  • ▲ 1954년 6월 독도의용수비대가 암벽에 크게 새겨놓은 '한국령'문자.
    ▲ 1954년 6월 독도의용수비대가 암벽에 크게 새겨놓은 '한국령'문자.
    대일협상 참여 무산...김일성이 ‘대마도 반환’ 날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토-영해에 대한 수호 의지는 청년시절부터 유별났다.
    그것은 23세 때 배재학당 ‘협성회’ 학생회장으로서 [협성회보]를 발간할 무렵, 부산 영도를 러시아에게 주려는 고종에게 “우리 국토를 팔아먹지 말라”는 투쟁에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매일신문]을 창간하였을 때 목포와 진남포 인근 토지를 또 다시 러시아에게 매각하려는 고종의 음모를 폭로, 막아냄으로써 연타석 홈런을 날린다. (연재 2 참조). 
    그뿐인가. 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논문을 쓸 때, 미국의 자유통상 역사를 연구하면서 독도와 대마도가 고대(古代)부터 우리 영토임을 밝혀냈고, 조선시대의 지도까지 샅샅이 뒤졌다. 조선 중반기 제작된 ’조선강역지도‘(朝鮮疆域之圖)에는 ’한반도의 두 발이 탐라(제주도)와 대마‘라는 설명까지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일본측이 만든 ’조선지리도‘에도 대마도는 부산 앞에 붙여 이름을 명기하고 있다. 
    이승만은 뒷날 쓴 [JAPAN INSIDE OUT]에서도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발하면서 한-일간에는 옛부터 내려오는 해상경계(海上境界)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즉, “자칭 ’일본의 나폴레옹‘이라는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해상경계선‘을 침략, 국토를 찬탈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이승만이 오랜 세월 염두에 두었던 ’대마도 수복‘이란 꿈을 독립시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시사한 대목이라고 필자는 추론한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해방후 미군정과 싸우다시피 한국인의 과도국회 격인 ’입법의원‘을 설립케 하였는데, 건국 직전 1948년 2월 17일 제204차 입법의원 본회의에서 허간용(許侃龍) 등 의원 62명은 “대마도를 우리 한국 영토로 복귀시킬 것”을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에 넣자는 결의안을 만들어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정부 수립시에 대비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마침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사흘 후,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요구부터 내놓았다. 8월18일 기자회견을 보자.
    “....우리는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일본에 요구할 것이다.
    이 섬은 상도(上島) 하도(下島) 두 개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것인데 수백년 동안 일본이 탈취해 온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일제의 40년 지배기간 가져간 예술품, 역사 기록 전부의 반환을 요구할 터이며, 한일양국간에 중요한 것은 한국내 일본인 재산을 한국정부에 귀속케 하는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1948년 8월20일자)

    얼마나 대마도를 중시했기에 대일요구사항 가운데 첫째로 ‘대마도 반환’을 꼽았을까. 
    이듬해 1949년 새해 연두 회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일관계 해결에 더욱 적극적인 대책을 발표하였다. 1월7일 내외기자단 회견 문답 가운데 일본 부분만 요약한다.

    대일강화협상 참여=한달전 12월 말 파리 유엔총회에서 ‘국가 승인’을 받은 후 미국과 중국 등 우방들의 승인이 잇따랐다. 기자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진행 중인 대일강화회의에 대한 정책을 묻자 이승만은 명쾌하게 답한다.
    ”이미 맥아더 장군을 만나 ‘대일강화회의 참여’를 요청하였다. 장군은 언제라도 대통령이 보내는 사람은 받겠다고 승낙하였다. 인선 중에 정한경 박사를 대표로 기용하여 동경에 파견하였고, 곧 주일 공관도 설치할 것이다“
    이처럼 전후 대일협상시 연합국과 나란히 참여하기 위하여 이승만 박사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그날에 임정의 김구를 재촉하여 ‘대일선전포고’를 발하게 했던 것이었다. 
    대마도 반환과 배상 요구=일본에게 요구할 배상금은 어느 시기부터 기산하여 책정할 것인가.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대통령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개인적인 욕심 같아서는 임진왜란시부터 기산하고 싶지만, 적어도 40년 전부터는 기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마도만은 별도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대마도가 우리의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전 임진란시 일인들이 그 섬에 침입하였을 때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서 일인들과 싸웠던것이다. 그 역사적 증거로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대마도의 여러 곳에 건립하였던 비석들을 일인들이 뽑아다가 동경박물관에 둔 것으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석들도 찾아올 생각이다. 
    그리고 일본의 군용물은 연합국 각국에서 서로 가져갔지만, 일본 군벌에게 최대 피해를 받은 것은 우리인데 지난 3년간 우리의 국권이 회복 못 되고 국제정세가 그리하여 우리 차지가 없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9.1.8)

    승전 연합국들이 나눠 가지는 패전국 일본군의 무기 장비를 ‘독립이 늦어져’ 분배받지 못한 것마저 안타까워하는 이승만 대통령이다. 조선왕조의 실패로 350년전 잃어버린 대마도를 반환받겠다는 주장에는 그의 말대로 명백한 역사적 증거들이 일본의 ‘국토 강탈’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국내 일부에서는 이승만의 대마도 반환 요구가 ‘비상식적 몽상’ 운운, 다분히 친일적인 송곳질을 한다. 어찌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은 건국대통령이 몽상이나 하랴, 조상의 고토를 되찾는 일은 어느 나라 국민이나 뼈에 사무친 숙원이다.
    건국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회견 후 1월18일 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3월에도 이문원 국회의원 등이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대마도를 태평양 전쟁에 대한 배상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한 바 있다. 

    한일협상을 준비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캠페인’을 벌인다. 국내 여론만이 아니라 국제무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만남과 편지 등을 통해 ‘대마도는 땅 주인 대한민국에 돌려줘야한다’는 계몽과 선전을 벌였는데 60회가 넘었다고 한다. 중국의 언론도 “류큐는 중국에 돌려주고 대마도는 한국에 반환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라고 보도해 주었다. 
  • ▲ 임진왜란 전에 일본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위해 작성한 
'조선지리도'에도 대마도는 한국땅이다.
    ▲ 임진왜란 전에 일본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위해 작성한 '조선지리도'에도 대마도는 한국땅이다.
    요시다 시게루, 6.25를 이용 ‘대마도 반환요구’ 묵살작전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터졌다. 스탈린과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6.25침략이다.
    이 6.25전란은 ‘대마도 반환’에 어떤 타격을 가했던가? 결론은 ‘실종 사망’이었다. 

    6.25와 미국=38선의 포성에 미국이 돌변한다. 이승만의 반대를 뿌리치고 미군을 철수했던 트루먼은 공산군의 남침 보고를 받자마자 파병을 결정, 유엔군을 편성한 이야기는 앞에서 설명하였다. 문제는 대일정책의 급선회, 일본 열도를 공산화의 진출을 막는 ‘태평양의 방파제’로 구축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세워진 ‘일본 중심’ 원칙에서 비롯되는 상대적 ‘한국 경시’로 말미암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또 다른 싸움을 계속하게 된다.
    6.25와 일본=사실상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 노심초사하던 일본은 한국전쟁 발발에 쾌재를 부른다. 역사의 죄인이 되어 전범으로 몰렸던 자들이 “새 국면을 활용하자”며 일어섰다.
    대한민국이 전쟁 한달도 안돼 낙동강까지 쫓기는 전황을 보자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무릎을 치고 또 다시 미국에 매달린다. 
    태평양전쟁에서 파멸한 일본이 벌인 ‘살아남기 읍소외교’(泣訴外交)는 유명하다. 끈질긴 공세와 읍소로써 ‘최고 전범 천황’을 살려낸 것이 대표적이다. 이번에는 무엇이 목적인가.
    ‘전쟁’을 계기로 식민지 한국과 중국에 대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자는 것, 한-중 양국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불참시키는 것이 첫째였다. 중국 장제스도 마오쩌둥의 공산군에 쫓겨 대륙을 거의 내주고 막장에 몰렸으니 양국의 전후처리에 돌파구가 열렸다. 

    한국, 대일협상서 빠지다=1948년 9월5일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가 열렸다. 52개국이 초청되었으나 한-중 양측의 좌우 국가들은 제외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은 원했으나 영국이 반대하는 견해 차이”로 설명했으나, 일본의 집요한 ‘대표성 불투명’ 호소 작전이 성공한 것이었다. 한국과 중국 모두 전쟁이 끝나봐야 ‘승자=대표국가’로 판명될 것이니 기다려 보고 양국은 그때 서명해도 된다는 주장이 먹혀들어간 결과였다. 9월8일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서명한 국가는 48개국, 정작 대일협상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들인 한국과 중국이 모두 빠지고 말았다. 
    이것뿐인가. 정작 요시다 시게루가 노린 또 다른 핵심은 ‘대마도 지키기’에 있었다.

    독도-대마도의 실종=샌프란시스코조약의 일본 영토 규정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무엇이 보이는가? 문제의 ‘독도’와 ‘대마도’가 안 보인다. 
    미국은  전쟁 중인 한국엔 협의도 없이 일본의 ‘장기간 실효지배’ 주장에 따르고 말았다.
    이승만이 끈질기게 반환을 요구하는 대마도에 대한 시비가 표면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은 ‘독도 영유권’만을 집중 거론했다고 한다. 그러니 한국을 신경 쓰던 미국도 ‘일본 중심’ 편애로 인하여 아예 이 두 섬의 이름을 빼버린 것이 화근의 뿌리이다.

    ◆김일성이 민족반역자-친일파인 이유

    만약, 스탈린과 김일성이 6.25 침략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승만 대통령은 더욱 적극적으로 맥아더와 미국에 ‘대마도 반환 외교’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에 쫓기는 미국은 일찌감치 일본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결국, 스탈린의 꼭두각시 김일성 일당이 대한민국을 침략함으로써 우리땅 대마도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무산시켜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이 보다 더 결정적인 역사의 반전,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이  '사망' 직전 일본을 '재생'시켜준 일이다. 즉, 미국과 일본을 밀착 시킴으로써 '침략자'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족반역자'와 '친일파'를 숙청했다는 김일성 자신이 민족을 배신한 '민족반역자'이며 한민족의 천적 일본을 부흥시켜 준 '친일파'임을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에 맹종했던 소위 '공산당 독립운동가'들의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죄악이다.  
    그들에게 이용 당한 자칭 우파 애국자들 '쓸모있는 바보들' 역시 다를 바 없다.
  • ▲ 대한민국 건국 직후, 이승만대롱령이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고,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협상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기사. 동아일보 1949년 1월 8일자.ⓒ동아DB
    ▲ 대한민국 건국 직후, 이승만대롱령이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고,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협상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기사. 동아일보 1949년 1월 8일자.ⓒ동아DB
    이승만의 집념...전쟁중에도 '대마도 반환' 교섭 계속

    국제법박사 이승만 대통령이 ‘실효 지배론‘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전후질서를 재편하는 강화회의, 승전 연합국들이 패전국 일본 영토를 재편성하는 마당에 잃어버린 우리 땅을 전부 원상복구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샌프란시스코 강화 협상이다. 히틀러의 독일 국토는 4대국이 분할 점령하지 않았는가.

    전쟁 중에도 이승만은 ‘대마도’를 잊지 않고 있었다.
    미국이 2005년 공개한 외교문서가 이승만의 ‘대마도 반환 외교’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it to the Republic of Korea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대한민국은 일본이 특별히 쓰시마(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와 호칭, 청구권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통일직전 중공군 침략으로 1.4후퇴를 해야 했던 이승만이 부산에서 1951년 4월27일 미국정부에 제출한 문서의 일부이다. ‘쓰시마’는 우리 말 ‘두 섬’의 일본식 발음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가 개최되기 직전 7월9일,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한번 양유찬 주미대사에게 덜레스 국무장관을 만나 대마도의 영유권을 확인시키도록 지시하였다. 
    「한국은 정의가 국제평화의 영구한 기반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대마도의 영토적 지위에 대한 완전한 전면검토를 다시 할 것을 요청한다…」 양 대사가 제출한 외교문서 요지이다. 
    이때 밝혀진 협상 내용에 따르면, 일본이 점령했던 사할린의 남쪽 절반과 부속 도서, 쿠릴열도를 소련에 넘겨주도록 명령받았으므로, 이 명령은 대마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시켜야 한다고 한국은 거듭 간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선 선포로 후퇴=역사가 이토록 잔인할 수 있으랴. 침략자 일본의 식민지배로 분단되는 결과를 초래한 한반도, 스탈린의 남침 전쟁도 따지고 보면 일본 탓이다. 식민지 쟁탈전은 끝났다지만 강대국 패권주의는 이념이란 새로운 도화선을 들고 약소국을 불태우는 괴물들이다.
    어쩌겠는가, 눈물로 대마도 수복의 열망을 삼키는 이승만은 ‘평화선 선포’로 참을 수 밖에 없었다. 
  • ▲ 하와이 펀치볼 소재 미국 태평양 국립묘지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 하와이 펀치볼 소재 미국 태평양 국립묘지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인하공대’ 설립에 바친 '독립운동의 유산'들 돌아보다

    시간을 거슬러 둘러본 대마도를 떠나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보자.
    독도 등대 점등식을 마친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하와이 주정부 청사를 방문하여 사무엘 킹 지사를 만나고 이상범(李象範) 화백의 한국화 ‘아침’을 선물로 주었다.
    독립운동시절 우정과 협력을 나누었던 신문사 [호놀루루 애드버타이저]를 방문, 발행인 로린 저스틴과 인터뷰를 하며 자신이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하여 발행했던 [코리안 퍼블릭 위클리]의 활동도 회상한다. 이어 [호놀루루 스타 블리틴] 신문사를 찾아 이승만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친구 릴리 알렌 편집인과 감격의 회포를 풀었다.
    뒷날 2010년 두 신문은 하나가 된다. 경영난에 빠진 [호놀루루 애드버타이저]를 [호놀루루 스타 블리틴]이 인수하여 [호놀루루 스타 애드버타이저]란 제호로 하와이 유일의 일간지로 발행하고 있다. 

    독립운동때 많은 도움을 받았던 언론사들을 뒤로하고 이승만 대통령 일행은 차를 몰았다. 화산 분화구 펀치볼(Punchbowl)에 자리한 미국의 태평양국립묘지(National Memorial Cemetery of the Pacific)를 찾았다. 세계대전 전사자 미군들과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묘지에 헌화하고, 그곳에 묻혀있는 한인독립운동가들의 묘지를 참배하였다.

    하루 종일 제2의 고향을 둘러보는 이승만의 발걸음은 쉴 틈이 없다.
    맨 먼저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에 들렀다.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가 1918년 미국감리교회를 탈퇴하여 독립교회를 세우자며 설립한 한국인교회, 그곳에 들어서자 낯익은 찬송가 합창이 이승만의 가슴을 울렸다. 그는 30여년전 한글로 찬송가를 작사하여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교육했었든데, 바로 그 찬송가를 다시 들려주니 만감이 살아난다.
    그가 1938년 서울 광화문 식으로 새로 건축한 교당에 가득 찬 신도들과 함께 자신의 찬송가를 합창한 이승만은 한미정상회담 등 방미 결과를 설명하고, 미국이 시급히 나서야 세계 공산화를 막는다는 지론을 강조하는 연설도 잊지 않았다.
    교회를 나와 공동묘지에 가서 사라진 동지들의 묘소에 헌화하고, 자신이 조직했던 독립운동의 전미조직 ‘대한인 동지회’(大韓人同志會) 사무실에 들렀다. 
    지금도 몇 곳에 남아있는 동지회는 독립자금 조성을 위해 미군에 연료를 납품하는 회사를 차쳤다가 대공황의 여파에 휩쓸려 파산했던 기억이 이승만을 세삼 아프게 한다. 
    이어서 꿈에도 못 잊을 ‘한국기독학원’(Korean Christian Institute) 건물로 달려갔다. 
    아, 양로원...이제 그곳은 한인동포 양로원으로 변해있었다. 
    1918년 9월 이승만이 미국학원에서 독립하여 한국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려고 세운 남녀공학 학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직접 건축했던 학교와 기숙사 건물은 이미 이승만의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명의로 된 토지와 건물을 매각하여 ‘인하공대’ 설립의 종자돈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해 1954년 4월25일 개교한 인하(仁荷)공대의 이름을 이승만은 인천(仁川)과 하와이((荷蛙伊) 첫 글자를 따서 직접 지었고, 노동자들이 처음 제물포를 떠난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해 설립했던 것이다. (연재11참조)
    노인들과 환담을 나눈 이승만은 오찬 후 동포들 거리를 순회하다가 총영사관 리셉션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킹 주지사가 베푸는 만찬회에 달려가 미국 땅서 마지막 만찬을 하며 마지막 연설을 한다. 하루가 모자란 추억의 환향 길, 밤 10시에야 영빈관에 돌아와 침대에 들었다. 타고난 건강체 만79세 5개월의 노인 대통령은 부부 기도 후에 금방 잠이 든다. 
  • ▲ 하와이 한국기독학원을 세운 이승만 박사가 여학생 기숙사 신축 공사장에서 동포들과 정지작업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일곱번째. 1916년 12월25일 찍음.
이 한국기독학원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인천 인하공대 설립을 위해 매각한다.
    ▲ 하와이 한국기독학원을 세운 이승만 박사가 여학생 기숙사 신축 공사장에서 동포들과 정지작업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일곱번째. 1916년 12월25일 찍음. 이 한국기독학원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인천 인하공대 설립을 위해 매각한다.
    ◆하와이를 떠나며 “미국은 자유인들을 실망시키지 말라”

    미국 국빈방문 16일째, 8월11일 아침 영빈관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고별 기자회견을 열었다. 질문을 받기 전에 귀국 성명부터 읽는다.
    “오늘 호놀루루와 미국 땅을 떠나자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제2의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되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나와 내 아내에게 베푼 정중한 환대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매우 기쁩니다. 할 일이 산적해 있고 많은 일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미국방문을 마무리하는 인사말로 입을 연 이승만은 미국에 당부하는 말을 이어간다. 그것은 방미중 날마다 연설에서 되풀이했던 내용인데 마지막이라 그랬을까,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헤어지면서 나는 미국의 모든 친구들에게 국가와 미래 세대의 안전과 복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촉구하고자 합니다. 나아가 생각의 지평을 넓혀서 전 세계의 안전과 평화까지도 헤아려보기를 희망합니다.
    철의 장막 뒤의 공산주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 즉 러시아인, 중국인, 북한인, 그리고 다른 위성국가 국민이 구조해달라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미국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취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인간의 자유를 포함한 민주주의 원칙의 챔피언이자 옹호자입니다. 나는 미국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실망 시켜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인 평화는 절대로 평화가 아닙니다. 항구적인 평화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위한 확고한 토대의 건설을 주장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국가들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평화도 포함해야 합니다.
    미국의 건국과 독립의 아버지들은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적들에 대항하여 적절한 때에 투쟁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우리는 미국의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시기에 싸워야만 합니다. 결정을 미루는 것은 더 크고 더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뿐입니다.
    우리가 5년 전(6.25때: 필자주) 투쟁을 시작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며 전망도 이렇게 불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한국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세계의 모든 자유애호 국민을 위해서, 또한 가능한한 결사적으로 이 일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미국에게 한국을 구하기 위해서 오늘이나 내일 선전포고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조국 하나라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내 말은, 미국 국민이 공산주의 침략의 희생양이 된 모든 다른 국가를 구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의 시발점으로 한국을 구제하는 단호한 경정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주 겸허하게 미국에 촉구합니다. 
    도움을 갈구하는 6억 중국인들과 아시아 및 그 이외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나의 가장 절실한 호소이자 진심 어린 기도입니다...”

    기도문 같은 성명문을 읽은 이승만은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의 지론을 거침없이 펼쳤다. 그리고 한국의 북진통일을 재삼 상기시킨다.
    “승리하든지 패배하든지 간에 우리 한국은 북진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지금 자유진영이 어디에서든 승리를 거둔다면, 그것은 하나의 획기적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즉, 자유국민과 철의 장막 뒤의 인민을 고무시켜서 공산분자들에게 저항하게 만들고, 공산분자들에게 세계 정복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줄 것입니다.”

    이승만의 ‘반공’과 ‘북진통일’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종교, 아니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인간의 적, 자유의 적, 세계평화의 적과 적당히 타협하여 적당히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평화론자는 공산주의자보다 더 위험한 전염병 전달자이다. 그에게 ‘반공’은 곧 ‘멸공’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거룩한 전쟁’ 곧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의 땅을 약속하시고 군대를 이끄셨으므로 그 전쟁은 하나님의 일’이요, 그러므로 그것은 ’거룩한 전쟁‘인 것이다.(구약성경 ’출애급기‘). 따라서 이승만의 방미순회연설은 기독교국가 미국과 미국민들에게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자유십자군‘이 되라고 설파한 하나님의 사도행진(使徒行進)이었다. 
    그 자유의 성전(聖戰)을 한국에서 성공시키면 6억 중국인들이 궐기하여 중국대륙을 수복할 수 있고, 분단 조국의 자유통일도 완성되는 일, 이승만은 언제나 ’십자군의 글로벌 리더‘였다.
  • ▲ 하와이를 떠나는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레이를 걸고 비행기에 오르며 인사를 하고있다.
    ▲ 하와이를 떠나는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레이를 걸고 비행기에 오르며 인사를 하고있다.
    아이젠하워의 반응에 실망 토로...국민 단합 강조

    드디어 이승만 대통령이 8월13일 오전 11시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프란체스카는 청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뒤를 따랐다. 모자를 흔들며 트랩을 내린 이승만은 귀국 소감을 밝힌다.
    “...미국으로 출발할 때 나는 경제원조나 기타 물질적인 원조에 대해서는 그다니 큰 기대를 걸기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미국이 국제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떤 정책을 가졌는지를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나의 가장 중요한 희망 중의 하나는 유엔군이 우리 국군과 똑같은 조치를 하든지, 우리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우리 정책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미국 최고위층이 나의 정책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은 것을 알고,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의 반응에 대한 실망감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번 여행을 계기로 나는 우리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당면한 노력을 기울여 우방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다짐을 두었다.
    19박 20일의 대장정을 마무리한 이승만 부부는 오랜만에 경무대로 돌아왔다.
    자,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할 일이 산적했다‘는 말처럼 귀국 다음 날부터 밀린 일을 서두르는 이승만 대통령, 그것은 워싱턴과 서울에서 벌어지는 원조협상을 챙기고, 잠시 미뤘던 ’개헌‘을 추진하는 일이다. 무슨 개헌인가? <계속>

    ◆필자 인보길(印輔吉)=현 뉴데일리 회장, 전 조선일보 이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디지털 조선일보 대표 역임. 2010년부터 '이승만 포럼' 운영 대표. 2023년부터 이승만 기념관 건립위원. *저서: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이승만 다시보기] 외. YouTube '인보길의 우남이야기' 뉴데일리TV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