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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려는 개헌을 처음 제안한 것은 1954년 1월이다.
건국한지 6년 만에, 그리고 미국을 국빈방문 하기 6개월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휴전과 한미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 국회의 비준과 미국 의회의 비준을 받은 것과 거의 같은 무렵이었다. 여기서 왜 헌법의 경제조항들을 개정하려 했는지 그 이유부터 살펴보자.
◆헌법 경제조항을 개정...자유와 창의 존중, 민영 위주로 부흥
「정부에서는 22일 국무회의에서 현헌법 제6장 경제에 관한 규정중 4개 조항을 개정하는 헌법 개정안을 의결하여 당일 이대통령의 결재를 얻었으므로 23일중으로 국무위원의 부서를 거쳐 국회에 제출하는 동시, 헌법 제98조에 의하며 공고하리라 한다.
정부에서 이처럼 헌법을 개정하는 이유는 생산력의 고도 증강과 국가경제의 발전을 기하고자 중요자원 및 자연력(自然力)의 개발과 공공기업에 있어서 사유사영(私有私營)의 비중을 현행헌법보다 상대적으로 더 무겁게 하는 한편, 국가의 통제관리를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경제부흥을 촉진하면서 외국자본의 투자의 길도 넓혀주려는 데 그 주안이 있다고한다. 정부에서 헌법 개정을 제의하는 이유 및 관계조항은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 1954.1.24)
▶헌법 개정 제의 이유서
우리 현행헌법은 지나친 자유주의 경제의 폐를 교정하여 모든 국민에게 균등생활을 보장한다는 취지 하에 선진민주 제국의 예에 따라 사유재산권의 제한 가능성 내지 의무성을 규정함과 동시에 제6장에 경제에 관한 규정을 특설하여 제85조로 중요자원과 자연력은 국유로 하게 하였으며 제86조로 농민에 대한 농지의 분배를 규정하고, 제87조로 중요 공공기업은 원칙적으로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할 것과 대외무역은 국가통제하에 둘 것을 규정하였으며, 제88조로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절한 필요가 있을 때에는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하든가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것을 규정하였다. 이리하여 헌법은 일면 자유주의 경제의 장점인 자유와 상의를 존중하면서도 (제5조 제15조 제84조 제2항), 타면에서는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통제 간섭을 규정하고 있으나, 중요자원과 중요기업에 관한 한, 후자에 입각한 국유국영제도가 원칙이 되어있다.(제85조 세87조 세88조).
그런데 헌정 5년여를 겪어오는 중, 우리는 이 경제체제가 본래의 의도한 바 목적을 달성하기보다 도리어 폐해를 노정하고 있음을 감득한바 있다.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 사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하나는 우리나라 경제의 후진성에 있다.
즉 우리나라는 여러 툭수사정으로 말미암아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의 단계를 밟지 못하였으므로 경제활동에 있어서 참다운 자유와 창의의 귀중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 위에 기업 특히 대기업의 유효적절한 기술적 운영 방법도 체득하지 못하였다.
그런고로 전기한 바와 같은 중요자원 또는 중요기업에 있어서 국유 내지 국영을 원칙으로 하는 체제는 일면 각인의 자유와 창의에 의한 사유 내지 사영의 길을 두절(杜絶) 시킴으로써
이기심에 인한 자원개발의 촉진과 기업운영의 특수성 합리성을 상실케 하고, 다른 면에서 기업운영 방법의 졸렬로 말미암아 생산력의 증가를 약화시키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제기업 특히 국가의 통제관리를 받는 기업은 부진(不振)일로를 거듭하고 도리어 헌법의 본래 의도와는 반대로 사영기업을 위주로 하는 현상을 나타내게 되어 헌법 제6장의 규정들은 제86조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거의 사문화하여 가고 있다.
그러므로 본 개정안은 제84조를 그대로 정치하여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경제활동에 있어서 국민 각자의 자유와 창의를 일층 더 존중 앙양시킴으로써 생산력의 고도증강과 국가경제의 발전을 기하려는 의미에서 중요자원 및 자연력의 개발과 공공기업에 있어서의 사유 내지 사영의 비중을 현행헌법의 그것보다 상대적으로 더 무겁게 하고, 그 위에 사영기업의 국-공유화 내지 그에 대한 국가의 통제관리를 최소한으로 제한하려는 것이며, 아울러 우리나라 현실에 적합하도록 관계조문을 개정하려는 것이다.」 (개정조항 비교내용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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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은 ‘경제 개헌’ 반대...일반 공청회도 ‘반대’ 다수
야당 민국당은 그러나 ‘경제 개헌’에 반대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국회를 다수 점령한 민국당(民國黨:민주국민당)은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김성수)와 대한국민당(신익희)가 통합 결성한 당이다. 건국 당시 이승만이 김성수의 ‘내각과반수 요구’를 물리치자 반기를 들었던 김성수 당은 6월에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자 완전히 ‘반(反)이승만’으로 돌아섰다. 그때 농지개혁법이 농지에만 한정되고 임야 등은 제외된다는 점을 악용, 바닷가 논을 염전으로 바꿔 농지개혁 대상에서 벗어나는 행각이 벌인 것이 김성수 일파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한도숙 [한국의 농지개혁] 식량닷컴, 2015). 바로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가 남한에 부족한 소금생산을 시작, 이를 확장하여 ‘삼양소금’으로 전국에 공급하게 된다. 그러나 김성수 일가는 호남일대 광대한 소유농지를 학교법인 명의 등으로 많이 빼돌리기는 했어도 농지개혁 자체엔 원칙적으로 반대를 못 하고 적극 협력한 기록도 남아있다.
국회 야당세력이 ‘경제 개헌’을 반대한 동기는 다분히 ‘반이승만’이란 정치적인 것이었다.
현대적 ‘시장경제’에 대한 인식부족이 근본적 이유지만, 불과 2년전 ‘부산 정치파동’에서 이승만 때문에 집권에 실패한 아픔이 더 컸다. 야당을 규합한 국회는 공청회를 열어 반대 캠페인을 벌인다. 공청회에서 발언한 인사들은 민국당의 신도환씨를 비록하여 변호사회장 양대경씨,
제헌국회의원 문시환씨, 국방무국회연락장교실 이귀우씨, 중외시보사 김일평씨 등 9명이며 학생대표도 참가시켰다. 거기서 나온 주장들은 이러하다.
▶정치계 대표=경제체제에 폐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헌법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경제시책이 졸열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통화개혁만 보더라도 인플레 수습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려나하는 한줄기 희망을 가졌었는데 오늘날 경제 파탄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경제정책자들이 자기네들의 실패를 개헌으로 덮으려는 것이니 이번 경제개헌은 필요 없다.
▶법조계 대표=헌법을 조경모개식으로 고쳐서는 안된다. 경제조항을 꼭 고쳐야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천연자원을 개발함에 있어 현행헌법상 전부 국유로 하는 것도 아니요, 산업체 전부를 사영으로 한다는 것도 아닌만치 개헌의 이유가 박약하다.
▶자유당 소속 전문위원=현경제조항을 시대의 요청에 순응하여 개헌한다고 해서 비난할 이유가 없으며 현행 헌법의 경제조항은 벌써 시대성을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개헌이 꼭 필요하다.
▶고려대 학생대표=헌법 제5조에 의하여 모든 영역이 자유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있으므로구태여 개헌을 하지 않아도 정부가 의도하는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 본다.
◉국회의 대정부 질의=자유경제 체제하에 있는 각국에서는 현하의 제반정세를 고려하여 오히려 통제경제체제로 전환하고 있는데 전시하의 우리국가에서 자유경제를 지향할 수 있겠는가? 외국자본의 침투 방지책을 규정하지 않는 이유는?
◉백두진 총리 답변=현하 한국 경제사정은 국내생산의 악화 및 외국자재와 기술의 도입을 불가피하게 하는데, 긴급을 요하는 건설사업을 강압적인 관청에 맡기는 것보다 민간의 왕성한 의욕에 맡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것이다.
후진성을 가진 우리나라 경제사정으로 봐서 어느 정도 외국자본의 도입은 불가피한 것이다. 통제경제냐, 자유경제냐 하는 면을 보더라도 개인의 소유권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경제적 발전을 기하게 된다는 견지에서 자유주의적인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본다.
빈곤이 공산주의의 온상이 된다,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적 손실이 30억 달러에 달하는 현실에서 유엔원조로써 3~4년간 불과 10억달러 밖에 보전할 수 없으니 외국의 원조와 개인자본의 도입이 절실하게 필요하며, 자유로운 경제부흥을 추진함에 헌법이 장애가 되어선 안된다.
◉국회는 마이동풍이다. 결국 정부가 제출한 ‘경제조항 개헌안’을 표결에 붙여 폐기시키고 말았다. 아무리 이승만에 대한 증오나 분노가 크다 한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무지몽매 수준이 이런 정도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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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개헌안 철회...“다음 국회에서 새 국회의원들이 해야”
시대에 동떨어진 주장을 내세워 개헌을 반대하는 국회를 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3월15일 다음과 같은 특별 담화를 발표하고 ‘경제 개헌’을 다음 국회에서 하자고 말했다.
“....지금 이 국회에서는 이것을 통과시킬 수 있어도 통과시키지 않음이 좋을 것이다. 그 이유는 헌법 개정을 근본적으로 해야 할 필요를 벌써 여러 해를 두고 말해오고 있는데도 국회에서 이를 통과시키면 자기들에게 불리할까 생각했던지 혹은 나라에 불리하다든지 둘 중에 한가지 생각이 있어야할 텐데, 지금에 와서 임기가 끝나가니까 개헌안을 통과시켜서 자기가 피선되는데 도움이 될까하는 정신으로 통과시키려 한다면, 이들은 국회에 다시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다시 국회에 들어오면 나라엔 해로운 것도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면 뭐든지 하려 할 것이니, 우리가 노력할 것은 우리나라 토대가 서서 앞에 오는 사람들도 잘 살게 해주자는 것이 목적이니, 이런 생각 없이 사욕에 끌려서 못 한다면, 이런 사람들을 국회에 앉혀 놓고서는 국가 앞날이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1년동안을 두고도 국민이 다 원하는 원칙적인 개헌을 하지 않았다면...(중략)...그 개헌안을 지금 내놓지 말고 이 다음 국회가 다시 선출된 뒤에 진정 신성한 국회가 되어서 신성한 정신으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 우리민족이 다 요망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54.3.17.)
요컨대, 국가의 장래에 대한 생각은 없고 당리당략 사리사욕에 빠진 국회의원들 가지고는 개헌할 의미도 없으니 이번 총선에서 진정한 애국자들을 다시 선출하여 개헌해야 한다는 말이다. 부산정치파동때 미국과 결탁하여 집권하려 했던 야당에 넌덜머리를 냈던 이승만은 철저한 국회 불신을 가감없이 토해낸 것이었다.
★이승만 ”개헌 찬성 조건부로 진정한 애국자 뽑자“...친일파 출마 경계령
1954년은 제3대 국회의원을 뽑는 해, 선거일은 5월20일로 결정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권자는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담화를 거듭 발표하면서 “친일파의 출마‘를 극히 경계하는 담화도 내놓았다.
”대한민국 안위에 관계되는 중대문제에 대하여는 전국민이 3분지 2이상의 투표로써 공결한다는 국민투표제“를 강조하고, 이 개헌안을 ”새 국회에서 통과한다는 조건부로 다짐을 받고 입후보하게 하고 당선된 후에는 민의를 배반하면 소환한다는 조건“을 붙여놓고 투표해 주기를 바란다고 강조하였다.
동시에, 거물 친일분자의 입후보와 당선을 경고하는 ’친일파 경계령‘을 선포한다.
”지나간 4년동안 국회로 인연해서 정부와 민중이 어떠한 경우를 당한 것은 다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앞으로 4년 동안을 또 이렇게 하면 정부나 민간이나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까닭으로 민중이 오직 이번 선거를 잘하고 못 하고에 달린 것이다.
내가 우리 한국 남녀들에게 성심껏 부탁하노니 여러 번 생각하고 조사하여 투표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일본이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한국은 죽어도 내놓지 않겠다고 결심해서 친일파 한인들을 모아다가 재정(자금)을 들여다가 친일하는 자들을 국회에 앉히고 정권을 교란시키려고 하고 있다...(중략)...나는 누구에게도 사감도 없고 은인도 없으며 오직 우리 조상들이 피를 흘려가며 지켜온 우리나라를 우리가 보존해서 영원무궁의 기초를 세우자는 일편단심이니 국회의원들도 나의 애증친소(愛憎親疎)와는 관계가 일호(一毫)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조선일보] 1954.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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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친일파다“...이승만, 일본 선거자금 유입 합동단속령
다음날 7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의 규정과 일본에서 들여오는 선거자금을 극도로 경계하는 담화를 또 내놓았다. 날마다 일본의 총선 악용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근래에 와서 누가 친일파며 누가 아닌가 하는 것이 민간에서 혼동된 관계가 있으므로 내가 설명하고자 한다. 왜정시대 했던 일을 가지고 친일이다 아니다 하는 것을 결정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때 무엇을 했든지 간에 그때 친일로 지목된 사람이 지금부터 하는 행동을 보고 판단하자는 것이다.
그동안에 일인들과 교섭해서 영업상과 통상관계로 경위나 이론을 캐기에 명석해서 그런 사람 몇 사람을 내가 믿고 써 보았지만, 이 사람들이 해가는 것을 보면 경제상 이익은 모두 일본은행에다 모아놓고 여기 한국에서 이익날 만한 것은 다 하려하고 있으며, 또 우리나라에서 큰 재정가라는 사람들을 보면 금전은 다 일본에 갖다놓고 빚 얻기나 융자를 요구하는 것은 한국 정부에만 하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일인들이 지금 우리나라를 먹으려는 것을 알면서도 일본에 가서 보금자리를 펴고 일인들과 음모를 하는 자가 없지 않은 것이다.
이 분자들을 한인 전체가 분간하지 못하면 크게 위태로운 것이니 오직 독립정신을 세워가지고 국민을 보호하지 않고서는 유지해 나아갈 수가 없을 것이므로 이런 분자들에 대해서는 명철한 관찰과 결심을 가지고 공산당과 싸우듯이 구별해놓은 뒤에야 살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이런 분자가 극소수이므로 이들을 진정한 독립국 백성으로 만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본에 보내서 일본 시민이 되게 하기 전에는 한인으로서는 편히 살기 힘들 것이다.
우리 정부정책은 언제나 일본이 우리와 화평하게 살겠다 해서 모든 문제를 정당히 해결한 후에라도 한국에 죄지은 범법자는 다 한국으로 돌려보낸 다음에야 통상의 교통 약조도 할 수 있으므로 일반 민간에서는 이런 것을 깊이 양해하고 일본에 내왕하는 사람들을 깊이 주의하여 흑백이 드러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같은 날 이승만 대통령은 공항과 항구에 특별단속형을 내렸다.
즉, 임박한 민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일본에 있는 친일분자들이 암암리에 갖은 방법으로 선거자금의 송금을 획책하고 있으니 국내 비행장 또는 항구에 도착하는 여행자들을 철저히 단속할 것을 국무총리 및 내무 국방 재무 각 장관에게 시달하였다. 또한 미 8군사령부에도 언중한 ’합동단속‘을 펴도록 요청하여 즉각 시행에 들어갔다. ([조선일보] 1954.4.9.)
▶”공산당 재일교포 출마 막아라”=이대통령은 28일 일본의 침략성을 재규탄하는 동시에 친일분자는 물론, 공산당의 지하조직을 배경으로 하는 재일교포의 일부가 5월 총선에 입후보를 기도하고 있으므로 선거가 끝날 때까지는 이들의 내왕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린다.
▶경찰이 선거 개입하면 용사없이 징벌=이승만 대통령은 선거에 경찰의 엄정중립을 다짐하는 경고 성명을 냈다. ”언제든지 나라의 총선거가 있을 때에는 경찰의 직책은 치안과 법령을 실시하는 것이오. 선거에 대해서는 어느 정당이나 어느 개인에 관하여 돕거나 손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로 못하는 것이다. 특별히 국가의 중대 위험한 일이 많아서 우리를 해하려는 원수들이 사방에서 탐정하며 관찰하고 있는 중이므로 우리 경찰이 특히 조심하지 않으면 남의 모함에 빠지기 쉽고 생각없이 실수하기도 쉬우므로 극히 조심해서 오해를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 부지중에라도 과실을 범하는 자가 있다면 정부에서는 용사없이 징벌할 것이다“ ([조선일보] 19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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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5.20 총선거를 맞아 이른 아침 7시 종로구 투표소에 나가 투표를 하고있다.
◆3대 총선 결과 ’자유당 대승‘ 기록...개헌에 날개 달다
전국에서 5월 20일 치러진 3대 국회 총선에서는 예상외로 자유당이 대승을 거두었다.
총의석수 203개 가운데 자유당 116석, 무소속 67석, 그리고 뜻밖에도 민국당은 15석으로 참패하였다. 이때부터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즉, 대도시에서는 야당이 이기고 지방에서는 여당이 다수 당선되는 추세가 상당기간 이어졌다.
김영삼(金泳三)이 26세로 경남 거제에서 당선되어 최연소 기록을 세운 것이 이때였다.
이 선거로써 이승만의 자유당이 원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함으로써 ’경제 개헌‘을 비롯한 새로운 개헌안이 통과 될 전망이 극히 밝아졌다.
▶이승만 ”자유당 월권 말라...공무원은 청렴결백 지켜라”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일 내각을 개편하며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자유당원이 국회에서 다수를 점유했으나 자유당 간부와 당원은 권리를 남용하거나 범위에 넘치는 일을 하여 국민의 신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는 정부와 국회가 협조하여 국사를 위해 노력할 것이며 의견대립이 있으면 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며, 특히 소수당의 정당한 주장은 이를 채택해야 한다. 이번 국무위원을 새로 임명함에 있어 자유당원이 등용 안되었다고 불평불만이 있는 듯 하나 종래 자당자파(自黨自派) 인물을 기용하는 것을 삼가서 절대 초월해 왔던 것이며 앞으로는 정당제도에 치중할 것이다.
지금 세계에 공산당과 친공하는 분자들 이외에는 한국을 돕고 한국을 애호하는 사상이 우리 희망 범위에 퍼져나가고 있는 이때, 우리 정부와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 일을 우리가 하자는 결심을 가지고 희생적 정신으로 한길로 행동 통일로만 주장해서 남북통일도 우리의 책임이요 국가건설도 우리의 책임인 것을 알아야 한다. 공무원들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청렴결백을 지켜나가야 할 줄로 믿는 바이다.“ ([조선일보] 1954년 7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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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패한 야당, 이승만이 미국 가자 ’내각제 개헌’ 표면화
총선 두 달이 지난 7월25일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국빈초청을 받아 떠났다.
후보자를 80여명 출마시켰다가 겨우 15명을 건진 민국당은 총선 직후부터 은밀한 개헌운동에 나섰다. 줄줄이 낙선한 거물들이 주동한 개헌은 바로 ‘내각책임제’ 헌법이다.
6년전 건국 전야부터 2년전 부산정치파동까지 야당이 끈질기제 추진했던 내각제 개헌이 패배를 거듭한 역사는 앞에서 보았다. 이번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성공할 것인가? 야당의 집권 필요성은 더욱 절박해진 정치상황이다. 공천에서 내쳤는데 대거 당선된 야당 출신의 무소속의원들과 물밑작업을 벌여 연대하지 않으면 개헌은 어림도 없다.
「자유당과 정부에서 함께 추진하고 있는 국민투표제 및 국무총리직제를 폐지하는 정부기구의 개혁 등을 포함한 개헌안과 대응적으로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또 하나의 개헌추진 공작이 전개되고 있어 극히 주목을 끌고 있다. 26일 탐문된 바에 의하면 내각책임제 개헌공작은 민주국민당과 무소속동지회에서 각기 초안을 작성중이라고 하며 양안을 서로 검토하여 한 개의 종합안으로서 만들 것이라 한다.
민국당에서는 국회의원 김준연씨를 개헌추진위원장으로 하여 초안기초위원에는 신도성, 조병옥, 김도연 의원 및 함상훈 씨등으로 부서를 결정하였다 하며, 27일 하오 2시에 열리는 동당 정책위원회에서 토론된 후 윤곽이 밝혀질 것이라고 한다. 무소속 동지회에서는 곽상훈, 유진산 씨 등이 중심이 되어 초안을 기초중이라는데, 소식통에 의하면 내각제 개헌안은 자유당에서 추진하는 개헌안이 정식으로 제안 공고된 직후 별도로 제안할 것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1954.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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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헌안’ 다시 제출...국민투표제 등 캠페인 개시
약 2주일 뒤, 미국 방문서 돌아온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자유당 간부들이 경무대에 달려와 보고하는 개헌안 초안을 검토한 뒤에 동의를 표한다.
거기엔 경제조항 개정을 위시하여, 유사시 국민투표제 도입, 국무총리제 삭제, 참의원의 권한, 군법재판소 정비 등 몇 가지 새로운 조항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마침내 9월6일 개헌안은 국회에 제출되고 당일로 정부에 송부되어 공고한다. 헌법개정안 전문과 개헌의 이유 등을 언론에 공개하여 국민 앞에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승만은 또 분주해졌다. 미국과 군사경제원조 협상을 벌이며 미국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거부-설득하는 한편, 개헌안에 대하여 새로운 제도 도입 등 헌법정신 교육을 국민에게 직접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방식대로 해야만 효과가 확실함을 알기에 이승만은 항상 바쁜 대통령이었다.
★미국과 원조협상...국민에게 헌법 교육...분주한 양면작전
불과 석달전 6월 제네바에서 ‘나라를 잃을 뻔한 뼈아픈 경험’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무엇보다 먼저 ‘국민투표제’룰 헌법에 도입한 이유와 목적부터 설명하기 시작한다.
미국이 이승만의 휴전동의를 얻으려고 제시한 한반도통일 정치회담이 열린 제네바에서 미국은 소련등 공산측이 내놓은 ‘남북통일 총선거안’에 이끌려 찬성하려했다. 이에 이승만은 즉각 반대선언과 함께 변영태 대표에게 훈령을 내려 제네바 회담을 보이콧시켰던 것이다. 이런 일은 또 다시 반복되어선 안될 국가위기-악몽이다. 9월19일 길게 발표한 이승만의 설명을 들어보자.
”전국회는 이번 국회와 달라서 정부를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나라를 돕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지난 선거에 이런 사람들은 거의 다 떨어지고 반정부자는 소수가 되어 지금까지 그 사람들이 국회내에서 소수반대하는 부분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니, 전민중은 이 국회에 대하여 개헌하는 문제에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 국세(國勢)에 위급한 문제는 소련이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계획과 중공이 한반도를 자기에게 부속시키고자 해서 과거 4년동안 전쟁을 하였으며 이북 한반도를 차지하고 이남을 합병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인 것이고, 또 일본이 친일하는 한일들과 반정부 한인들을 이용하여 다시 한반도를 병합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때에, 또 다시 2년전 같은 소위 정치파동이라는 난국을 만들게 된다면, 소련의 병력과 중공의 세력으로, 또 일본의 흉모로 해서, 이 세 나라에서 재정을 얼마든지 갖다 쓸 수 있으며 지하공작으로도 무슨 분란을 만들는지 우리가 속량하기 어려운 형편이니만치 우리는 다 정부와 민간이 우리 민국정부를 보호하여 우리가 굶으나 먹으나 죽으나 사나 한덩어리로 요지부동하고 있어야 모든 강국의 야심을 방어하고 국토를 회복하여 국권을 완전히 수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개헌의 제일 중요하게 목적하는 바는 한국이 민주정체이니만치 인권을 존중하여 이웃나라의 재정이나 병력이나 또는 모든 권력으로 우리국민을 요동할 염려가 있는 것에 대하여는 국가안위에 관한 문제는 전국의 3분지 2 이상의 투표로 원칙을 세워서 밝히는 것이 우리정부나 민중의 동일한 결심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은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고 외국의 재정이나 세력을 얻어 국권을 요동시키자는 반역 사상을 가진 것으로 민중이 인청지 않을 수 없으며, 또 내가 믿는 바는 정치상으로 정부를 반대하는 정당이나 파당에서라도 이 조건에 대하여는 이론이 있을 사람은 없고 또 이론을 붙이면 정부와 민중이 다 그 내막을 알고야 말기로 노력할 것이므로 나로서는 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조선일보]1954.10.21.)
이어서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초대대통령 임기제한 철폐’ 문제에 관하여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개인적으로는 임기 연장이 ”영광이 아니라 욕(辱) 되는 것”이라면서도 국민들의 공결(公決)에 맡겨 정할 문제라고 여운을 남겼다. 휴전 1년이 지난 국내외 정세가 본인도 ‘자의반 타의반’으로라도 자신이 떠맡아 관리하지 않으면 매우 심각한 위기였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한가지 개헌 조건에 든 것은 대통령 임기 문제라는데 모든 민중이 다 아는 바와 같이
내가 나 한사람의 권위나 지위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국의 안전과 민중의 복리만을 주장하는 바인데, 내가 한 임기를 더 가져야 하겠다는 관념으로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제한을 하지말자는 의견이 있다하나 나로서는 그런 생각을 감격히 여기는 것이나, 이것은 개인의 친분을 위하여 하는 운동인 줄로 알며 결코 인정치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 자유당의원들과 또 자유당원이 국회에서 개헌안을 주장하게 되어 그 결과는 이 사람들이 다 정당주의나 혹은 친분상 관계로 이런 운동을 하는 것같이 보이게 된다면 이것은 그 동지로서의 본의도 아니고 또 나 한 사람에 대해서도 욕이 될지언정 영광이라고는 인정하기 어려움으로 자유당 국회의원과 간부 및 당원들에게 진정으로 권유하노니 이것을 국민공의에 붙여서 무슨 조치가 되든지 원만히 팔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니, 공결(公決)만을 기다려 행하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이것은 내가 체면을 위하거나 또는 외면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진정으로 내뜻을 받아주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니 전민족이 나의 고충을 알아서 그대로 하여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한마디로, 개인적으론 원하지 않지만 개헌안이 공정하게 통과 된다면 따르겠다는 말이었다. 다음달 11월12일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안이 이론(異論)없어 통과되기를 기대“한다는 담화를 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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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안 국회 상정...국무총리 폐지 등 제안 설명
오랜 진통 끝에 한미 원조협상이 끝나자 바로 그날,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안을 국회 제82차 본회의에 상정시키도록 했다. 이른 아침부터 의사당에는 1천여명의 방청객이 들어찼고 입장 못한 시민들 수백명은 광장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 10시 최순주 국회부의장의 사회로 개막한 국회는 사무처의 개헌안 보고를 듣고 자유당 원내총무가 개헌안에 대한 제안설명을 한시간 넘게 이어갔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국민투표제=다른 나라의 예도 있겠지만 특히 최근 유엔의 동향이나 외국의 추세로 보아 남북총선거 운운, 한국 주권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국민투표제는 불가피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공 소련 일본 등 한국을 침해 하려는 국가들이 호시탐탐하고 있으므로 정부가 국회에만 맡겨둘 수 었으므로, 영토변경이나 국가안위에 대한 중대사항에 관해서는 국민투표제로 결정하자는 것인데 이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국회의 가결을 거친 사항에만 국한하였으며 국회에서 부결되거나 의결을 거치지않은 것은 그 대상이 될수 없도록 하였고 그 발의권은 국민에게만 부여한 것이다.
◉참의원=참의원의 부제를 변경한 것은, 현행법에는 의원정수의 3분지1 씩을 2년마다 한번씩 개선키로 되었으므로 국비가 많이 들고 선거민들의 염증을 자아낼 염려가 있는 만큼 2분지1 씩을 3년마다 한번씩 개선하자는 것.
◉고급공무원의 임명=대법관, 검찰총장, 심계원장, 대사, 공사 등을 비롯하여 별도법률에 규정된 공무원은 참의원에서 인준을 받도록 하였으며, 대통령 궐위 시에는 잔임기간중 부통령이 대통령의 직위를 계승토록 하였고, 부통령도 궐위 시에는 수석 국무위원으로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케 하고 3개원이내에 정-부통령을 선출키로 한다.
◉국무총리 직제 폐지=대통령이 행정수반으로 국무회의의 의장이 되는 것이므로 국무총리는 행정수반이 아니기 때문에 국무위원의 제청권만 있고, 이것을 행사하지 못하는가 하면 재무, 국방 장관보다도 권한이 못한 까닭에 완전한 대통령책임제를 하기 위해서 총리직제를 없애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무원 전체를 불신임한다는 것은 대통령도 포함되는 모순이 있는 것이니 국무위원에 대한 개별적 불신임만 남겨두었는데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무위원은 민의원에 대하여 개별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였고, 민의원에서는 언제든지 재적 과반수로 불신임하도록 하였다.
◉군법회의 설치=현행헌법에는 특별재판소 설치에 대한 규정이 없는데 이번엔 군사재판소 즉 군법회의 설치에 대한 규정을 신설하였고, 국무회의는 그대로 결의기관으로 존치하여 행정에 대한 종합성이 있도록 하였다.
◉경제조항 개정=경제조항을 개정하자는 것은 제2기 국회에서도 상당히 논의된 것인데 관리경제는 일제하의 통제경제보다 무서운 점이 있다. 경제부흥이 부진한 것이라든가 국가재원을 좀 먹는 것도 이 관리경제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엄격히 자유경제정신을 앙양하여 개인의 재산권을 엄수하며 정부대행기관을 없애게하며 자유경제를 전면 확립하도록 하였다.
◉초대대통령 중임제한제도 철폐=초대대통령이며 전쟁 중에 위대한 영도를 해나온 현대통령은 앞으로도 험난한 때를 당하여 국민이 그 분을 다시 대통령으로 모실 것을 원한다면 그 길을 열어놓기로 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국회는 국민의 심판을 받지 않을까 해서 중임제한제도를 철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개헌안은 국민투표제와 현대통령 중임제한 제도를 철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고, 그 밖에는 현행헌법의 모순점을 제거하자는 데 있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도록 헌법을 고치려는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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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국회 무시 국민투표...대통령 3권 독점“ 철회 요구
개헌안에 대한 대정부 질의에서 야당의원들은 일제히 반대의견을 쏟아냈다.
첫째, 국민투표제는 국회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들이 결정한 문제를 국민투표에 붙인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헌법정신에 위배 되므로 필요 없다. 주권제약이나 영토변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민투표제는 철회해야한다.
둘째, 국무총리 직제를 삭제하는 것은 대통령에게 3권에 대한 독점을 주자는 것이니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참에 차라리 내각책임제로 개헌해야 옳다.
셋째, 대통령중임제의 철폐는 ‘사회적특수계급의 제도 금지’로 되어있는 헌법에 저촉된다.
넷째, 경제조항 개정은 실질상 별 내용이 없어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만약 개정이 된다면 외국자본이 투입되어 큰 폐단이 생길 것이다.
다섯째, 공청회 등에서 개헌에 대한 일반적 여론이 좋지 않으니 표결하지 말고 철회하라.
야당 의원들은 국민투표제에 대한 시대적 감각도 지정학적 역사인식도 모른 채, 오로지 국회의원의 특권을 국민에게 빼앗기는 것인 양 국민투표제를 착각하고 있다. 게다가 80노인 건국대통령의 임기제한 철폐에만 눈에 불을 켜고 덤볐다고 한다.
이러니 국가경제를 발전시킬 ‘경제조항 개정’ 문제가 안중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이에 대하여 여당 측은 개헌안의 조속한 통과를 주장한다.
”현행헌법은 내각책임제도 아니고 대통령책임제도 아니어서 그 모순을 제거해야 한다. 내각책임제는 다수결의 국회 독재가 생기기 때문에, 건국 초기인 우리나라에는 대통령책임제가 실정에 맞는다. 국가관리 경제를 민간의 자유와 창의성 경제로 개편해야 한다“
건국 6년째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의 토론은 초보적 권력싸움의 입씨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의 정치 수준이 안타까운 이승만은 그러기에 더더욱 국가 목표를 향하여 초지일관 ‘경제혁명’의 개헌안을 밀어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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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안 부결...찬성 1표 부족...다음날 기발한 반전!
드디어 11월27일 오후4시 20분 표결에 들어간 개헌안은 한시간 뒤 개표결과 놀라운 숫자를 보여준다. 재석의원 202명 중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
부결이다. 개헌선은 재적의원 203명의 정족수 3분의 2인 136표, 딱 한표가 모자랐다.
사회를 맡은 최순주 부의장은 의사과장이 주는 계표결과를 보고 놀라면서도 어쩔수 없었다.
”이번 개헌안은 1표 부족으로 부결 되었습니다“ 땅땅땅...의사봉을 칠 수 밖에 없다.
그 순간, 야당의원들은 만세를 부르며 우르르 퇴장한다. 자유당 의원들은 그러나 꼼짝도 하지 못하고 충격의 침묵 속에 빠졌다.
자유당은 그동안 개헌찬성 의원들의 서명을 충분히 확보해두었는데 찬성표는 135명뿐, 서명자 중 몇 명이 배신한 것인가. 그날 결석자는 딱 한명, 그러나 그는 야당계 무소속 양일동, 찬성표가 아니다. 그럼 누가 배신하였단 말인가. 망연자실한 자유당의원들은 저녁 6시가 넘도록 의석을 떠나지 못하고 수근거린다. 무소속에서 6~7명이 찬성했다는 둥, 자유당 측에서 11~12명이 이탈했다는 둥, 기자들의 분석 정보를 나누고 있었다.
★정부 대변인 ”개헌안은 ‘통과‘로 본다“ 일요일 성명
다음날 일요일 28일 오후1시, 중앙청에서 임시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 각의는, 당시 이름난 수학자(數學者)를 불러 개헌안 투표결과에 대하여 밤새도록 대응책을 논의한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가 의제였다. 한시간쯤 회의를 끝내고서 정부 대변인 공보처장 갈홍기가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정부는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인정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어제 27일 국회에서 개헌안에 대하여 135의 찬성표가 던져졌다. 그런데 민의원 재적수 203석중 찬성표 135, 반대표 60, 기권7, 결석 1이었다. 반대표 60표는 총수의 3분의 1에 훨씬 못미친다는 사실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민의원의 3분의 2는 정확하게 계산할 때 135와 3분의 1인 것이다. 한국은 표결에 있어서 총수를 계산하는 데에 전례가 없었으나 단수(端數:소수점이하 끝수)는 계산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개헌안은 통과되었다는 것이 정부의 견해이다“
알고보니 전날밤 이기붕 의장과 최순주 부의장은 국회 산회후 경무대로 이대통령을 방문하여 결과를 보고한 뒤, 원내 역원들을 이의장 집으로 불러모아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수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협의한 결과 135표면 통과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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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승 야당의원(왼쪽)이 부결선포를 번복하는 최순주 부의장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았다.
◆국회 폭발...’사사오입‘ 파동...새 헌법 공포
다음날 월요일 29일 아침, 자유당에서 원내총무 이재학(李在鶴)의원 이름으로 성명이 나왔다.
「헌법개정안은 헌법 제98조4항 및 발췌개헌 부측 제3항에 의거하여 민의원 재적 3분의 2이상의 찬성을 얻어서 하게 되어있는 바, 민의원의 현재 재적의원인 203명의 3분의2의 정확한 수치는 135.333...인데, 자연인을 정수 아닌 소수점 이하까지 나눌수 없으므로 사사오입(四捨五入)의 수학원리에 의하여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35명임이 의삼할 바 없다. 그런데 개헌에 필요한 ‘3분지2이상’이라는 것을 ‘3분지 2초과’라 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법률용어로써 3분의 2의 수를 포함하여 3분의 2의 수와 그보다 많은 수를 지칭하는 것이며, 이것은 전술한 산출방법에 의하면 135명의 찬성으로써 개헌안은 가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일 최부의장이 본회의에서 가결되지 못한 것과 같이 선포한 것은 의사과장의 잘못된 산출방법의 보고에 의하여 착오 선포한 것이다.」 (밑줄은 필자)
★최부의장, 선포 번복 선포...국회는 아수라장
화약고에 불지른 이재학의 성명에 들끓는 국회가 오전 10시40분 본회의를 열었다.
사회자 최순주 부의장은 단상에 오르자 폭탄 선언을 한다. ”내가 개헌안이 부결되었다고 선포한 것은 취소한다“ 야당의원들이 우르르 일어난다.
”부결이라고 선포한 것은 내가 부주의하여 의사과에서 써온 것을 그래도 낭독했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 통과에 필요한 정족수는 135명이 확실하다. 즉석에서 이의가 없었던 것은 모두 흥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중대한 부주의에 대하여 국회에 사과하고 인책사임하기로 결심했다.“ 최순주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철회하아“ ‘위헌이다” 연발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젊은 이철승(李哲承)의원이 뛰쳐 나간다.
최순주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순간 야당의원 10여명이 몰려나와 합세한다. 의석에서도 여야의원들의 말싸움과 주먹질이 난무한다. 아수라장이다.
방청석에서도 ”개헌안은 통과된 것이다“라는 고함이 연발하여 소란하였고 청년 1명이 의원석에 난입하기도 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의석에는 자유당 의원들만 남은채 비자유당의원들은 총퇴장하였다.
곧 이어 자유당 의원19명이 제출한 긴급동의를 채택하여 ”최부의장이 개헌안을 부결이라고 선포한 것은 착오에 의한 것이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다“라고 의사록을 수정키로 결의 선포하였다. 이날 오후 2시40분 이기붕 국회의장 명의로 개헌안을 정부에 이송하였다.
▶정부는 오후 3시15분 경무대에서 임시국무회의를 열고 국회에서 이송된 헌법개정안을 즉시 공포키로 의결, 이대통령의 서명과 백총리서리 이하 국무위원의 부서로써 공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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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계 60의원들, 위헌(違憲)대책위 구성
이날 아침 국회본회의에서 일제이 퇴장한 야당계 의원들 60명은 곧 의사당내 무소속 곽상훈(郭尙勳)부의장실에 집합하여 ‘민의원 위헌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계속해서 본회의를 보이콧하는 동시에 헌법수호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튿날 30일엔 민국당과 무소속 의원들 전원이 단합하여 ‘호헌(護憲)동지회’라는 단일 교섭단체를 구성하기로 결의하고 제2차 호헌투쟁 성명을 내고, 야당연합의 신당(新黨)을 발족시키는 작업에 돌입하였다. 사분오열되었던 야당계는 비로소 단일목적으로 뭉치는 계기를 잡은 것이다. 이때 등장한 민주당(民主黨)이 이승만 집권기 내내 반정부 투쟁을 벌이게 된다.
★이승만 ”나는 조항별로 표결하기를 원했다“
미국 AP통신이 제출한 질문서에 이승만 대통령의 대답은 확고하였다.
”통과된 개헌안은 정부가 신중히 고려한 견해이다. 우리 정부가 개헌안을 지지한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바이다. 나는 국회가 개정안을 조항별로 표결해 주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개헌에 3분지2 이상의 다수표가 필요하다는 대한민국 헌법과 이번 민의원의 통과가 상충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또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비록 ‘사사오입’이라는 ‘변칙’을 적용했지만 사사건건 가로막는 야당 국회의원들과 달리 개헌을 지지하는 민의와 크게 동떨어지지 않기에 밀어붙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 개헌은 자신의 말대로 ‘집권 연장’이 목표가 아니다. 대한민국 경제체제를 ‘통제경제’에서 해방시켜 자유시장경제로 전면 개방, 개인의 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권을 3천만 국민에게 선물한 ‘경제혁명’ 아니던가. 청년 시절부터의 꿈이 너무 늦게 이루어졌다. 또 하나의 ‘민주화’를 달성한 이승만에게 ‘1표 시비’ 따위 무시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사사오입 개헌’은 이승만의 본심과 달리 두고두고 건국혁명가의 명예를 괴롭히는 오점이 된다. 이승만은 그러나 세계 최빈후진국의 Naion-Building 과정에서 자신의 명예를 돌보는 인간이 아니었다.
★변영태가 말하는 ‘이승만의 종신집권’ 명분은?
독립운동 시절부터 이승만을 ‘고집쟁이, 독립미치광이, 독재자’ 등으로 폄하해 온 미국 언론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뉴욕 유엔총회에 참석중인 변영태 국무총리에게 미국 기자들이 몰려와 가시 돋힌 질문을 던진다. ”드디어 종신집권 헌법을 만들었군요. 소감을 말하시오“
변영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띠며 태연히 설명한다.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가 이승만 대통령의 은퇴를 막고 있소. 무슨 말인지 아시오?
우리 국회에서 오늘 개헌안이 통과되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에게 종신유임권을 부여하였소. 대한민국은 이대통령이 계속 집권해야 살 수 있단 말이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공산주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 것이오. 미국은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한국 정치의 거인 이대통령이 정계에서 물러나면, 50명 내지 100명의 우파 후보들이 난립할것인데. 이것은 곧 국민의 표를 소수로 분열시킬 것이며, 위장한 공산주의 후보자가 우세를 장악하여 당선되는 상황이 올 것이오. 이제 이해 하겠소?“ ([조선일보] 1954.12.2.)
그랬다. 만79세 노인 이승만이 '종신집권'하래야 한번 더 할까말까, 건국과 호국의 영웅에게 그만한 보답도 못할까. 더구나 지금은 휴전협정 겨우 1년, 방금 발효된 한미동맹도 이승만이 관리해야 하고, 가까스로 얻어낸 미국 원조자금 운영과 추가 원조 자금 교섭은 또 누구에게 맡길수 있으랴.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승만을 대신할만한 인물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정치적 비극! 당시 휴전직후 대한민국의 지도자 빈곤이었다.
올해 2024년 11월27일은 '시장경제 도입 개헌'을 단행한지 꼭 70주년, 야당과 언론의 '독재자' 욕설을 감내하며 강행한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이 대한민국을 세계10위권 경제대국으로 우뚝 세워 놓았구나. 기념식은 고사하고 '한국 시장경제사 연구 세미나' 하나라도 열린다는 소식은 없다. <계속>
◆필자 인보길(印輔吉)=현 뉴데일리 회장, 전 조선일보 이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디지털 조선일보 대표 역임. 2010년부터 '이승만 포럼' 운영 대표. 2023년부터 이승만 기념관 건립위원. *저서: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이승만 다시보기] 외. YouTube '인보길의 우남이야기' 뉴데일리TV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