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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사 (6) 한성감옥: 감방에서 영어를 마스터한 비결은?

입력 2022-12-08 13:40 수정 2022-12-15 08:53

▲ 유영익 지음 [젊은 날의 이승만] 표지.ⓒ뉴데일리DB

감옥을 '대학 이상의 대학'으로 활용한 20대 이승만

이승만이 남긴 ‘한성감옥 5년7개월의 기록’은 이승만 평가의 가장 기본적 인식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그의 기독교정신과 자유민주 정치사상과 대한민국 건국정신 및 외교독립론 등이 감옥생활에서 거의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 유영익(연세대 명예교수, 전 이승만 연구원장)은 이승만의 옥중생활 기록을 한국최초로 심층 연구하여 [젊은 날의 이승만](연세대출판부, 2002)을 펴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행적 평가에 새로운 장을 열어준 이 연구서에서 유 교수가 제시한 몇가지 주장을 소개한다.
▶청년 이승만은 기독교 개종의 급격한 정신적 혁명을 체험함으로써 인생관과 정치관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켜 서양화된 ‘근대적 인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이승만의 멸청(蔑淸) 공로(恐露) 반일(反日) 친미(親美) 사상은 한성감옥에서 확고히 형성되었다. 즉, 청나라를 버리고 러시아를 경계하며 일본을 반대하고 미국과 친해야한다는 이승만의 정치철학과 국제정치적 역사관을 확립한 것이 감옥에서 공부한 결과이며, 1905년 을사조약 이전 한국의 누구보다 앞선 근대화 선각자로 변신하였다.
▶엄청난 독서와 탐구를 통하여 한성감옥은 이승만에게 ‘대학이상의 대학’이라 하겠다. 스스로 영어와 일본어를 체득하고 서구적 학문에 천착함으로써 뒷날 미국 유학시 일류대학들이 받아주는 높은 수준의 동서양 연구자로 자신을 만들었다. 필자도 유교수의 주장에 공감하면서, 이승만의 옥중생활을 간추려본다.

▲ 이승만은 감옥에서 읽은 서적들 목록과 번역 저술한 책의 목록도 꼼꼼히 기록해놓았다. 오른쪽 사진은 1902년 국내신문에 보도된 '영일동맹' 조약문을 보고 이승만이 영문으로 번역해 본 것인데, 뒷날 원본과 대조하여 크게 틀린 점이 없음을 확인하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기록의 왕’...다양한 옥중 활동

한순간에 ‘변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승만,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거리투쟁을 하고 싶어 탈옥까지 감행했던 ‘열혈 급진파’ 청년은 신약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는 온순한 ‘어린 양’이 되었다. 

이승만은 타고난 ‘기록의 왕’이기도 하다. 배재학당 입학후 주요기록은 물론, 한성감옥 5년7개월간 벌인 각가지 활동을 깨알같이 기록해 놓았다. 더구나 그의 미국 유학 5년이후 망명 35년간 일기와 각종 편지들, 저술 등 자료들은 또 얼마나 귀중한 현대사의 살아있는 자료인가. 

한마디로 청년 이승만에게 한성감옥은 교회, 학교, 독서실, 영어학원, 집필실, 대학교실이었다.
특히 감옥에서 집필한 논설들과 저술들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하나님의 나라’로 ‘한반도 자유민주공화국’을 세우는 건국 구상, 다시 말하면 오늘의 선진 대한민국의 원형을 구상 설계하였음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은 처음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하기보다는 ‘종교의 자유’를 중시하는 현대적 국민국가의 지도자를 자임하는 자유민주주의 면모가 돋보인다.

▲ 죄수복을 입은 이승만(왼쪽끝)이 기독교를 전도하여 개종한 전직고관 양반들과 자제들.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안명선,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아들), 무명의 소년(부친대신 복역중).ⓒ연세대이승만연구원.

◆성경공부 & 개신교 전도...감옥학교 개설

 “생지옥이 복당(福堂)으로 변했도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드린 이승만은 한성감목을 ‘복당 감옥’이라 불렀고 동료 죄수들이 합창한다.
이승만은 감옥서장 김영선에게 ‘학당 개설’을 요청한다. 
“백성으로서 죄를 범하는 것은 교화(敎化)가 안된 탓인 것을, 백성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베풀 생각은 않고 그 죄만을 다스리려 하니 죄수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급하다“며 감옥학교 개설을 허락받는다.
김영선은 개화파 대신 한규설의 절친으로서 여러차례 이승만을 보호해다라고 요청한 한규설의 편지들이 남아있어 두 사람이 이승만의 감옥활동에 많은 편의를 제공하였음이 밝혀진다. 
이승만은 당시 죄수 350여명을 소년반, 성인반으로 나누어 ‘가갸거겨’부터 국사, 윤리, 산수, 세계지리 등을 가르치고, 성경을 함께 읽고 강론하며 기도하고 찬송가를 합창하면서 초급영어까지 큰 소리로 읽으니 생지옥은 그야말로 ‘복당’이요, 장안에도 드문 기독교 개화 학교가 되어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전도사이자 교사“가 된 이승만은 어느 새 죄수들의 ‘구세주’로 카리스마가 생겼다.
”나는 감옥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동포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그들은 끌려가면서 마치 내가 자기들을 구해줄 수 있는 듯 내 이름을 크게 부르곤 했다. 그런데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가서 편안히 죽으시오’라고 고함을 질러주는 것뿐이었다. 무거운 칼 소리가가 들려올 때 그 복잡한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장호익 장군도 우리 감방 바로 뒤에서 참수를 당했다. 그는 세 번째 칼소리가 날 때까지 계속 만세를 불렀다. 나는 요사이도 꿈 속에서 감옥시절의 이런 저런 장면을 보곤 한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캐나다 선교사 게일(James Gale)은 당시 감옥학당을 이렇게 보았다.
”감옥은 처음에 ‘진리탐구의 방’으로 시작하여 ‘기도의 집’이 되고 예배당이었다가 급기야 ‘신학당‘이 되었다. 이 과정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내보내어 이 나라 수도의 기독교계에서 사역하는 최초의 지도자들이 되었다.“([전환기의 한국] 게일 지음. 1909)
게일이 기록한 지도자들이란 이승만이 전도하여 개종시킨 양반계급 지식인들 40여명으로, ’개혁당사건‘으로 투옥되었다. 개종한 사람들은 한성감옥서의 간수장 이중진(李重鎭)과 그의 동생 이중혁(李重爀)을 비롯해 나중에 연동교회, 서울YMCA, 그리고 동경의 한인YMCA 등에서 크게 활약하는 이상재(李商在), 유성준(兪星濬), 이원긍(李源兢), 김린(金麟), 김정식(金貞植), 홍재기(洪在箕), 안국선(安國善) 등 여러 장로가 포함된다.
. 이것은 한국교회사에 전무후무한 왕조 엘리트 집단의 입교 기록, 이들은 그때부터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건국 후까지 적극 동참한 평생동지들이 되었다. 

▲ 이승만의 한성감옥 성경공부 그룹의 일부, 성경을 들고 찍었다. 왼쪽부터 세번째가 이승만, 그 앞에 어린이는 이승만의 아들 봉수. 나막신을 신었다. 사진 왼쪽위 영문자는 이승만이 뒷날 써놓은 메모. ⓒ연세대이승만연구원.

◆기독교 서적 탐독...영어사전 외우며 영어공부 

선교사들은 이승만의 구명운동을 펼치면서 이승만이 부탁하는 책들을 수시로 제공한다.
워낙 책의 반입이 금지되어있었는데 감옥사정 김영선이 눈감아 준 것이다.
일찍이 배재학당 졸업식(1897.7.8.)에서 학생대표로 ’The Indepence of Korea’란 영어 연설을 유창하게 하여 외국공사들까지 놀라게 했던 이승만은 감옥에서 영어를 미국인 수준으로 마스터하려 노력을 기울였다.
“그 당시 감옥은 곡식창고를 개조한 것이었는데 흙바닥엔 돗자리를 깔았고 겨울엔 난로를 주지 않아 죄수 각자가 이불을 가져다 썼다...(중략)...글을 쓸 수 있는 그 무엇이나 책은 일체 못 들여오게 되어있지만 간수들은 우리 일을 묵인해 주었다. 우남(이승만)은 [화영사전]을 가지고 있었고, 아펜젤러와 벙커씨는 잡지 [뉴욕 아웃룩](New York OUTLOOK)과 [독립신문]을 들여보내 주었다. 죄수들은 1척 직경쯤 되는 항아리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승만은 그 항아리를 눕혀놓고 그 속에 몰래 들여온 양초를 켜놓고 공부를 하곤 했다. 간수들이 올 때는 항아리를 벽 쪽으로 돌려놓으면 불이 보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그러면서 영어를 공부했다. 미국 잡지들이 그의 교과서였다. 그는 붉은 물감을 몰래 들여와 잉크를 만들어 낡은 잡지에 붓글쓰기 연습도 하였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잡지에서 읽은 문장들을 외웠다. 그는 사전에 있는 영어단어를 모두 외우는 것이었다..." (옥중 동지 신흥우의 증언. [인간 신흥우] 전택부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1971).

특히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이 언론인 출신답게 시사문제에 관심이 깊어 [OUTLOOK] 외에도 중국, 일본, 미국 등에서 발간되는 주요신문들과 잡지 등 영문 정기간행물을 들여다가 날마다 애독하였던 일이다. 따라서 영어공부는 물론, 그는 감옥 밖의 지도층보다도 시사문제와 국제정세에 정통하였으며, 외국인들과 소통능력의 격을 높이게 된다. 뒷날 이승만이 글로벌 리더십을 구축하는 국제정치적 대화와 외교의 남다른 자질은 이때부터 단련된 것이었다.

▲ 이승만이 1903년부터 옥중에서 편찬한 [신영한사전] 원고들 영인본.ⓒ연세대이승만연구원.

영어에 자신감을 갖게 된 집념의 사나이 이승만은 한영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자 마침내 [신한영사전](New English-Korean Dictionary) 편찬을 시작한다. 아펜젤러가 차입해준 [웹스터 영어사전](Webster English Dictionary)와 [화영사전](Japanese-English Dictionary)을 보며 단어 하나하나를 정리해야 하니 일본어 공부도 저절로 되었다. 
그러나 그 사전은 F항 중반에서 포기해야 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부랴부랴 책을 써야했기 때문이다. 그 책이 옥중명저 [독립정신]이다.

미국 사립명문 에머리(Emory)대학 유학파이며 중국에서 영어교사를 했던 엘리트 윤치호가 당시 이승만의 영어 실력에 감탄한다. ”어제 석방된 이승만을 만나보았다. 그는 놀랄 만한 청년이다. 감옥에서 영어 실력을 너무나 잘 향상시킨 결과 그는 이제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아주 멋진 기사를 쓸 수 있다.“([윤치호 일기] 1904.8.9.)

◆광범한 독서 & 왕성한 번역, 그리고 ‘서적실’

‘부지런한 일꾼’ 이승만은 옥중에서 놀랄 만큼 많은 책을 읽었다.
우선 순위로 보면, 기독교 신앙서적, 역사, 법률-외교, 시사관련 신문과 잡지, 문학 등을 포괄한다. 아펜젤러, 벙커, 에비슨 등 선교사들이 넣어준 기독교 교리 서책들은 물론,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종교서적들도 읽었다. 
역사책은 [태서신사람요](泰西新史攬要:영국선교사 리차드 지음 서양사),  [만국역사] [만국사략]은 세계역사, [조선사기](영문 한국사), [중동전기본발](中東戰紀本末:미국선교사 알렌 편저 ‘청일전쟁사’) 등이다. ‘중동’이란 중국의 동쪽 조선을 가리킨다.
국제정치와 외교에 관심이 깊었던 이승만은 [공법회통](公法會通), [약장합편](約章合編) [만국공법](萬國公法:International Law) 등 국제법 책들을 탐독하였으며, 유길준의 [서유견문], 영국 크리스천 소설 [천로역정] 김만중의 [구운몽] 등 소설들도 틈틈이 읽었다.

동시에 이승만은 중요한 책들을 번역하는데 힘썼다. 그가 번역한 책들은 [중동전기] [만국사략] [만국공법]과 기독교 교리서 [주복(主僕)문답], 감리교역사 [The Junior History of Methodism] 등이다. 영문법 [English Grammar Material Primer]도 번역하여 옥중교재로 썼다.
물론 모든 번역책은 그가 창간한 신문들처럼 한글전용이었다.

▲ 개신교인이 된 이승만이 번역한 [감리교 역사] 현대판 표지. 1902년 군산 앞바다 선박침몰로 순교한 아펜젤러 선교사.(자료사진)

★특히 [주니어 감리교역사]는 아펜젤러가 죽은 직후에 번역을 끝냈다.
배재학당 설립자로 이승만의 사상과 종교를 지도하고 석방운동을 주도하며 이승만 집안의 생활비까지 지원한 스승, 아펜젤러의 죽음은 이승만에겐 청천벽력이었다. 
아펜젤러는 성경번역사업 등을 위해 1902년 6월 제물포를 떠나 목포로 향하던 중 11일 군산앞바다에서 선박끼리 충돌 침몰하는 중에, 물에 빠지는 소녀를 구하려다 함께 익사하고 말았던 것이다(44세). 
이승만의 충격과 슬픔은 남다른 것이었다.
『이승만은 은사의 비보를 듣자 하루 반을 내리 울고 단식했을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겼다.』(조선일보 1934.11.27. ‘조선 신교육측면사- 배재50년 좌담회’)

지금도 계속 출간되고 있는 [주니어 감리교역사]는 요한 웨슬리의 회심과 산업혁명전야 도탄에 빠진 영국사회를 웨슬리의 순례 전도로 구원한 역사를 담고 있다. 거기 웨슬리의 회심과정이 이승만과 많이 닮아있다.
그 신앙적 교감 속에 떨어진 날벼락, 아펜젤러의 순교 앞에서 이승만은 몇 달이나 기도와 명상에 빠진다. 그리고 나서 시작한 것이 본격적인 죄수 교육 ‘옥중 학당’이다.
”웨슬리를 따라 아펜젤러를 따라“--홀연히 떠난 스승의 뒤를 따라 이승만은 ”땅끝까지라도 복음을 설파하는 십자가의 순례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개화의 스승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서재필을 능가하는 혁명적 계몽운동을 펼쳤던 이승만은 기독교 교육과 신앙의 롤 모델 아펜젤러가 사라지자 개신교계의 선봉에 나섰다.

▲ 이승만이 감옥에서 편역한 [청일전기] 표지. 오른쪽은 2020년 연세대이승만연구원이 발간한 '우남이승만 전집' 제4권 표지.

이승만이 번역한 여러책 가운데 [중동전기]에 정성을 들인 것은 청일전쟁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전쟁사라기보다 이승만의 관심사인 국제관계와 전쟁외교에 초점을 두어 재편집한 책이다. 
”청일전쟁이 임진왜란보다 더 큰 난리요, 한인들이 가장 통분히 여길 전쟁이 청일전쟁이다. 이 전쟁에 한국이 잔멸을 당하고 독립을 잃었다.“ 그 망국의 근본원인은 청일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모르기 때문이기에 ”태평양이 마르고 히말라야 산맥이 평지가 될지라도 조선의 독립을 우리 손으로 회복하겠다는 의자가 있다면 “이런 책을 많이 보아 외국형편과 내나라 사정을 자세히 공부하는 것이 급선무”([청일전기] 서문, 1917)라서 번역한다고 했다.
그래서 [청일전기]는 원전의 전쟁기록보다 전쟁전후 중국, 일본, 조선등 관련국 정세와 각국이 교환한 외교문서, 조약문들을 모았고 이승만이 2편의 해설 칼럼을 덧붙여 냈다.
이 밖에도 지리, 산수 등 10여개를 번역, 교재를 만들어 옥중학당에서 가르쳤다.

▲ 이승만은 옥중에서 처형되거나 콜레라 등으로 사망한 죄수들 명단을 작성해놓았다. 오른쪽은 틈틈이 쓴 한시(漢詩)100여수를 묶은 책 [체역집] 표지.ⓒ연세대이승만연구원.

아펜젤러가 순교한 해에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처음 크리스마스 축하행사를 열었다. 이때 벙커 선교사가 선물로 기독교서적 150여권을 가져오자 이승만은 ‘서적실’을 설치한다. 
목공이 취미였던 이승만은 책장도 손수 만들고 곳곳에서 책을 수집하였다. 처음 250권으로 시작한 책장은 일본 중국 등에서 선교사들이 책을 보내어 금방 523권이 되고, 보름동안 열람자가 268명이 될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이승만은 유성준과 함께 ‘옥중도서 대츨 명부’도 작성, 서적실서 먹고 자면서 운영을 도맡았다.

◆콜레라로 떼죽음...간호와 시신 수습...신앙고백
    
1903년 3월엔 대륙을 휩쓴 콜레라가 서울 한성감옥에도 번져 죄수들이 집단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승만은 미국선교사 에비슨에게 약을 구해 들여와 환자들을 간호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 거침없이 헌신하는 것이었다.

"...성신이 나와 함께 계신줄을 믿고 마음을 굳게하여 영혼의 길을 확실히 찾았으며...괴질이 옥중에 먼저 들어와 며칠 사이 60여명이 목전에서 쓸어내릴 새, 심하면 하루 열일곱 목숨이 쓰러질때 죽는자와 호흡을 상통하여 그 수족과 몸을 만져 시신과 함께 지내었으되 나홀로 무사히 넘기고, 이런 기회를 당하여 복음 말씀을 가르치매 기쁨을 이기지 못할 지라...(중략)
이 험한 중에 무사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신 은혜가 아니면 인력으로 못하였을 바요....이것이 나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이니 이 깨달음으로 날마다 힘쓰면 오늘 심는 겨자씨에서 가지가 생겨 공중에 나는 새가 깃들이게 될 줄을 믿겠나이다." ([신학월보] 1903년 5월호)

이 즈음 이승만의 믿음과 봉사가 얼마나 깊어지고 확신을 얻었는지를 보여주는 신앙고백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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