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를 빼고 이승만을 평가 말라

    이승만의 90평생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한성감옥에서 ‘성령’을 받은 순간이다.
    기독교를 경멸하고 선교사들을 증오했던 23세 청년이 잔혹한 고문을 받으면서 저도 모르게 기도가 터져 나오고, 기도한 순간 하나님의 응답이 그를 뜨거운 불로 지져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 곧 ’하나님의 종‘이 되었던 것이다.
    그 순간이후 이승만이 말하고 행하였던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봉사‘ 그것이다.

    이어서 출옥하자마자 떠난 미국 유학,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에 ’합당한 영육‘을 만들기 위한 대장정이다. “나는 5년 내로 박사까지 받아야만 조국에 돌아가 할 일을 할수 있으니 입학시켜 달라”고 하버드 대학원장에 보낸 편지가 잘 말해준다.
    이승만이 해야 할 일이란 감옥에서 확신을 얻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 말대로 5년에 학사-석사-박사를 따낸다. ’믿으면 이루리라‘ 성경말씀대로다.

    한성감옥 5년7개월, 미국 유학 5년 6개월, 합해서 11년 1개월---1910년 6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윌슨 총장(뒷날 대통령)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곧 탄식을 토했다. “나는 준비가 끝났는데 내 할 일을 해야 할 나라가 사라졌구나.” 8월22일 서울에선 한일병합 밀약이 조인되고 일주일 뒤 29일 ’병탄‘이 발표되었다.
    그 순간부터 이승만의 사명은 ’왕이 포기한 나라‘를 다시 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불굴의 신념으로 초지일관하였다. 다름 아닌 “기독교 선진국 영국-미국과 동등한 나라 만들기’이다.
    의병투쟁이나 암살 등 살인폭력을 거부하고 암살사건 변호를 거절하고 ‘사탄의 독재’ 공산주의 실체를 세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이승만의 통찰력 등은 기독교정신을 빼놓고 설명하려 하면 근본적인 오류을 범하게 된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과 건국과정에서 나타난 이승만의 모든 행적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어낸 응답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타고난 천재성이 동서양 학문을 쌓은 위에  ‘하나님의 눈’과 영성(靈性)으로 무장되었음을 간과하면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인간 평가를 제대로 할수 없다는 말이다. 

    그의 보좌관 미국대학교수 올리버는 기록했다. “이승만의 명상은 절반이 기도’라고. 
    부인 프란체스카는 ”대통령은 걸어가면서도 기도한다‘고 일기에 적어놓았다.
    이 연재는 그래서 이승만의 한성감옥 생활과 미국유학 행적을 압축 정리한다.
  • ▲ 종신형을 받은 죄수복 차림 이승만(자료사진)
    ▲ 종신형을 받은 죄수복 차림 이승만(자료사진)
    “세상 것 다 버리니 하나님의 구원을 받다” 

    1899년 1월 혹한의 지옥에 던져진 ‘대역죄인’--이승만에겐 입헌군주제 추진과 박영효 쿠데타 음모 관련 혐의에 탈옥 미수란 죄가 덧씌워졌다. 그가 탈옥한 것은 1월30일, 상동교회 청년동지회 주시경(뒷날 한글학자)이 권총 두 자루를 구해주어 동지 최정식과 함께 도망친다.
    “한시 바삐 만민공동회를 다시 열고 싶어” 경찰 구치소를 빠져 나왔으나 동지들은 사라지고 이승만만 잡혔다. 2월1일 청계광장 근처 한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쿠데타 음모에 탈옥까지 누가 봐도 죽어야할 사형수, 24세 이승만은 참혹한 고문을 받으며 죽음을 각오하였다. “어느 날에나 죽이려는고...” 이승만은 이 세상을 체념한다. 
    목에는 10㎏ 넘는 큰 칼을 메고 가슴과 두 팔 두 손목은 수갑과 오라 줄에 묶이고 두 발목은 무거운 차꼬에 넣어 자물쇠로 잠그고, 족쇄를 질질 끌며 날이면 날마다 끌려 나가 형틀에 엎어놓고 묶여 고문을 받는다. 장정 두 명이 다리 사이에 옹이 박힌 몽둥이를 넣어 주리를 틀고 손가락 사이엔 세모난 대나무 토막을 끼워 살점이 떨어지도록 비틀었으며,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고 매질을 계속하니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어디에 호소할 수 있으랴.
    그날도 그런 형벌을 받은 뒤 감방 흙바닥에 던져진 죽음의 순간, 피 흘리는 입술에서 비명 같은 기도가 통곡처럼 터져 나왔다. 
    “하나님, 저의 영혼을 구해 주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 주시옵소서”
    목숨까지 포기한 초죽음의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마지막 몸부림은 뜻밖에도 하나님의 뜨거운 응답을 받았다.
    “그 순간,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는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새하여 가지고 있던 증오심과 불심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자기네가 매우 값지게 여기는 것을 우리에게 주려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은 날의 이승만:한성감옥 생활과 옥중잡기 연구] 유영익 지음)

    뒷날 기도가 나온 순간의 심정을 이승만은 이렇게 돌아본다. 
    “그 참혹한 감방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다른 세상에 갈 터인데 저 외국사람들이 말해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세상의 감옥에 가게 될 터였다. 그러자 배재학당 예배실에서 선교사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오’ 그런 기억이 나자 그대로 큰 칼에 얼굴을 대고 기도가 절로 나왔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증오심이란 당시 미국의 ‘하와이 병합’(1897)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
    하와이 사탕수수 무역을 하던 미국이 선교사들을 보내 원주민들을 포섭한 뒤 하와이 여왕을 추방하고 섬들을 차지하였으니, 조선을 개방시키고 온 선교사들도 한반도를 그렇게 먹기 위한 미국 정부의 ‘앞잡이’들로 볼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이승만이 ‘뜨거운 불의 세례’ 은총을 받자 성경이 읽고 싶어졌다. 
    단발령때 자신의 머리를 잘라준 에비슨 선교사에게 영문성경과 영어사전을 넣어달라고 부탁, 큰 칼 쓰고 오라줄에 묶인 몸으로 ‘신약성경’을 쉬임없이 읽었다. 동료 죄수 한명이 파스를 서고 도 한명이 성경책을 한 장씩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 속에 드리운 그 안위와 평안과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다”
    마침내 죄수 이승만은 기독교의 회심(回心)을 통하여 성경을 믿고 예수를 따르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니 원죄를 속죄 받고 ”영생불멸의 구원을 받았다“고 했다.
  • ▲ 프랑스인 장 드 팡스의 저서 [한국에서:1904]에 실려있는 사진.한성감옥 밖에 나온 이승만(중앙)이 헬멧 쓴 아펜젤러로 추정되는 서양인과 대화하고 있다.([젊은 날의 이승만] 유영익 지음,연세대출판부,2002)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출판부)
    ▲ 프랑스인 장 드 팡스의 저서 [한국에서:1904]에 실려있는 사진.한성감옥 밖에 나온 이승만(중앙)이 헬멧 쓴 아펜젤러로 추정되는 서양인과 대화하고 있다.([젊은 날의 이승만] 유영익 지음,연세대출판부,2002)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출판부)
    최대의 정적이 재판장, 뜻 밖에 종신형 판결

    3월18일 첫 공판을 시작하여 7월10일 재판에서 이승만은 종신형이 확정된다. 
    박영효 쿠데타 관련 혐의를 벗었고 탈옥도 종범으로 인정되어 태(笞)100대, 종신복역수가 되었다. 이때의 재판장이 홍종우, 황국협회 회장으로 이승만의 만민공동회를 습격을 지휘했던  수구파 행동대장이 그가 어느 새 재판장이 되어 이승만을 재판한 것인데 결과는 뜻밖이었던 것이다.

    ”나의 정적이던 홍종우가 평리원의 재판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자기 앞에서 나의 형틀을 제겨하도록 명령했다. 홍종우는 황국협회 회장으로서 나의 가장 큰 정적의 하나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나의 생명을 살려주려고 온갖 힘을 써주었다. 찹으로 인생의 야릇한 역정이었다. (중략) 최정식과 내가 재판을 같이 받게 된 날, 나는 몸이 몹시 쇠약해 있어서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처지였다. 최정식은 활기 있게 웅변조로 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웠다. 그러나 나는 나 지신을 방어할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 최는 너무 말을 많이 하다가 나에 대한 진술가운데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판사는 다음날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는 자기가 한 말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증거품으로 나의 권총이 제출되었는데 나는 한방도 쏘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중략)...재판장 홍종우가 나의 부친에게 나를 살려주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는 소식은 퍽 뒤에 들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당시 이승만의 구명운동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우선 미국 선교사들이 앞장서서 외교계를 통해 감형과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독립협회에 호의적이던 한규설 중추원의장의 노력은 그의 편지가 열통쯤 남아 기록을 전한다. 또한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일반 지지 세력이 급증, 황실 호위대 병사까지 [제국신문]에 이승만 구명을 위한 시(詩)를 게재할 정도였다.

    그의 형기는 그해 12월13일에 15년으로 감형되고 12월 22일엔 10년으로 감형된다. 이는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는 기념 특사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