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정개혁과 자유민권 투쟁으로 지샌 1년

    기회는 아무 때나 오지 않는다. 기회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을 때, 기회를 기회로 알고 실천의지를 펼치는 힘이 나타날 때, 그 기회는 새 역사 창조의 전환점으로 재탄생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마찬가지다. 지금으로부터 124년전 1898년이 그런 해였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기회, 500년 왕권독재의 껍질을 벗고 자유민권과 민주공화제의 새 나라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1898년이었다.
    유럽에선 프랑스 혁명 100년을 맞은 때, 문호를 개방한 고종의 대한제국에도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시대적 요구에 열정을 불태우는 개화파의 노력이 좋은 기회를 만들어갔다.
    그 즈음 나라 분위기를 돌아보자.
  • ▲ 1898년 3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연단 앞에 태극기를 세웠다.(자료사진)
    ▲ 1898년 3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연단 앞에 태극기를 세웠다.(자료사진)
    ★계급사회 개혁 3년=청일전쟁 개시와 함께 조선을 장악하려는 일본의 압력에 의해 주어진 ‘갑오개혁’이 을미년까지 3년간 진행된다. 인재등용 신분타파, 연좌제 폐지. 사노비(私奴婢) 혁파, 인신매매 금지, 신교육 실시, 태양력 사용, 단발령(斷髮令), 과거시험 폐지 등, 전통적 전제주의 계급사회를 해체하는 혁명적 조치들이다. 하지만 타국에 의한 개혁은 한계가 뚜렷한 것, 마지 못해 응한 명목상의 개혁이라 해도 백성들은 천민까지 개화분위기와 자유화 바람에 한껏 고조되었다.

    ★불타는 독립의지=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국을 물리치자 500년 묵은 중국 사대주의에서 풀려난 고종 정부는 대한제국을 선포하였고, 개화파가 득세하는 중에 미국시민권자 서재필을 고문으로 초청 고용한다. ‘갑신정변’쿠데타에 실패, 미국 가서 의사가 된 서재필은 ‘못 다 이룬 꿈’을 실현하고자 달려왔다.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독립신문] 창간, 독립문을 설치하며 청년층과 일반 시민교육에 나선다. 

    ★배재학당서 미국식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뭉친다. 그중에 특히 이승만은 독립협회가 개최하는 민중집회 ‘만민공동회’의 선봉장이 되고, [협성회회보]에 이어 일간신문 2개를 창간하여 거리투쟁과 언론투쟁을 병행, 큰 성과를 거둔다. 앞장에서 설명했듯이 고종황제와 러시아-프랑스의 비밀거래를 폭로, 무산시키자 자신감을 얻은 이승만의 요구는 갈수록 커지고 치열해진다. 그는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이끄는 자유 민권운동의 기수로 앞장선다.
  • ▲ 서재필과 미국인 부인. 미국시민권자 서재필은 서울에 와서도 본명대신 미국이름 Philip Jaison을 사용했다고 한다.(사진=기파랑 발행 [선구자 서재필]에서 전재)
    ▲ 서재필과 미국인 부인. 미국시민권자 서재필은 서울에 와서도 본명대신 미국이름 Philip Jaison을 사용했다고 한다.(사진=기파랑 발행 [선구자 서재필]에서 전재)
    서재필의 귀국 만류 시위...“가실 테면 가시오"

    독립협회와 이승만의 언론이 강대국들의 이권침탈을 고발하고 고종 정부의 부패 무능을 강력히 규탄하자 각국은 서재필의 추방부터 요구하고 나선다.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서재필의 외국인 고문 10년 계약을 해지하고 출국을 종용한다. 이에 독립협회는 강력히 항의하였고 이승만은 독립협회 허락도 없이 서재필에 체류를 간청하는 만민공동회를 강행한다.
    ”각하는 부모 나라를 버리고 어디 가서 천고에 썩지 않을 이름을 세우고자 하느뇨. 다만 자기 일신만 위하며 뭇 사람의 요청을 돌아보지 않는다 할지면, 우리의 공동회가 각하의 수레를 멈추고자 하니 각하는 세 번 생각하시오“([독립신문] 1898.5.5.)
    이럼에도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 뜻 밖에도 [독립신문]을 폐간시키려는 일본 공사와 4,000원에 매도하기로 합의한다. 10년 계약중 7년 넘게 남은 기간의 급료를 모두 챙긴 서재필은 1898년 5월14일 용산 나룻터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향한다. 강변엔 ”가지 말라’는 함성과 눈물의 이별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승만은 “가실 테면 가시오. 우리는 더 크게 싸우리다” 결의를 다지며, 서재필이 없는 만민공동회를 연일 개최하며 왕정개혁과 계몽운동를 더욱 강화해 나간다. 우여곡절 끝에 [독립신문]은 결국 윤치호가 맡아 7월1일자부터 일간신문으로 바꿔 더욱 확장시켰다.
    서재필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엇갈린다. 12년 만에 귀국하고도 본처 가족을 외면했다든지, 미국부인과 거리에서 걸인을 발로 차는 등 인종차별이 심했다는 둥, 일부 기록이 전하고 있는데 “그렇게 만류하는데도 뿌리치고 가버린 것은 돈과 일신상 안위만 챙긴 것”이란 비난도 어김없이 나돌았다. 
  • ▲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현 덕수궁 자리)의 남쪽 정문 인화문(仁化門). 1902년경 철거됨.(국가기록원).
    ▲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현 덕수궁 자리)의 남쪽 정문 인화문(仁化門). 1902년경 철거됨.(국가기록원).
    ◆ ‘전면개각 요구’ 철야농성--“평화적 혁명” 성공

    불길에 기름 붓는 일이 터졌다. 고종이 비밀리에 외국인 용병부대 30명을 데려온 일이다.
    황실 친위대 병사들까지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을 지지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불안해진 황제는 외국인 고문에게 주선을 부탁하여 유럽인과 미국인 등 용병들과 계약을 맺었고, 그 백인부대가 9월15일 서울에 도착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즉각 ‘항의’시위를 시작하고, 이승만은 자신의 신문 [제국신문] 주필로서 격렬한 비판 논설을 실어 정면 대결한다.
    “슬프도다. 임금이 그 백성을 믿지 못하여 외국인으로 대궐을 보호하는 일이 세계에 나라 치고 어느 나라가 그럴 수 있으리오. 이는 신하도 없고 군사도 없고 백성도 없음이니 상하가 함께 부끄러운 괴변이라. 마땅히 신민이 일심으로 주선하여 결단코 시행 못하도록 함이 도리에 합당한지라...” ([제국신문] 1898.9.9.)
    외교부 앞에서 “세계로부터 야만 대접을 받는 나라가 되었도다” 선동 연설과 시위를 연일 벌이는 사태에 직면하자 마지못해 고종은 용병을 포기하고 만다. 서울 도착 닷새 만에 해약당한 용병들은 1년치 급료를 받아 상하이로 돌아갔다.

    이때 엎친 데 덮치는 ‘날벼락’ 같은 사건이 또 일어났다.
    러시아어 통역 김홍륙의 황제 부자 독살 미수사건이다.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서 고종의 통역을 맡았던 그는 경운궁으로 환궁 후에도 안하무인 실력자로 행세하여 황제의 인사권 등을 좌지우지하던 중에 독립협회의 고발과 규탄으로 인하여 유배를 당하게 되자 앙심을 품은 것이었다. 그는 부하를 시켜 고종이 마시는 차와 황태자의 커피에 마약을 탔다. 황제는 토하고 황태자는 인사불성이 되었다. ([고종 실록] 광무2년 1월).
    이 음독 후유증 탓에 황태자=뒷날 순종은 영구히 생식능력을 잃었다고 전해져온다.

    발칵 뒤집힌 정부는 갑오개혁 때 없어진 ‘나륙법’을 들고 나왔다. 범인의 사지를 잘라 전국에 전시하는 최악의 형법, 독립협회는 “죄는 처벌하되 야만적 악법의 부활은 절대 반대, 국제사회에 부끄럽지도 않으냐”며 항의, 재판소와 황궁 정문 앞에서 날마다 철야투쟁을 벌인다. 이참에 “수구파 대신 7명을 파면하라”는 전면개각 요구를 밀어붙였다, 고종의 직접답변을 촉구했지만 황제가 차일피일 거부하자 ‘민중대회’로 집회를 확장하며 상소를 거듭한다. 현재 덕수궁 남쪽 인화문에 시위 인파가 인산인해. 1902년경 궁궐 학장시 철거된 인화문(仁化門, 경운궁 정문)앞 농성장엔 여러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 철시한 상인들까지 합류하여 밤낮으로 성토대회를 열었다.
    해산시키려는 경찰이 “장사나 하라”고 강압하자 상인들은 “우리도 자유권리가 있으니 이 따위 수작 말라”며 더 많은 상인들을 불러왔다. ([독립신문] 1898.10.13.)
    “우리도 인간이다” 자유 민권에 비로소 눈을 뜬 노예백성의 결의를 누가 막으랴. 

    마침내 고종이 두 손을 들었다. 
    이리저리 핑계를 대던 황제가 마침내 1898년 10월12일 수구파 7대신을 전원 면직시키고 독립협회가 요구하는 박정양, 민영환 등을 입각시켰다. 황궁을 에워싸고 밤낮 12일간 벌인 ‘횃불 데모’가 얻어낸 값진 승리다.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울었다. 밤낮 연설로 목이 쉰 이승만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왕국의 수도에서 놀랍게도 황제 고종을 무릎 꿇린 ‘평화적 혁명’이 성공했다” 고종을 잘 아는 미국공사 알렌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의 일부이다.

    1898년은 정초부터 년말까지 일년내내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로 낮밤을 지새우는 해가 되었다. 갖가지 개혁운동의 하일라이트는 10월부터 시작된 ‘입헌군주제’ 관철 혁명투쟁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