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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사(2) 대특종! 고종과 러시아 '굴복'

23세 언론인, 왕정개혁-강대국 추방에 나서다

입력 2022-11-25 11:45 수정 2022-11-25 12:20


    고목가 Song of an Old Tree

일.  슬프다 저 나무 다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구비 쳐
    몇 백년 큰 남기 오늘 위태.
이. 원수의 땃작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쪼지 마라
    쪼고 또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
삼.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굿박여 반근 되면
    새 가지 새 잎이 영화 봄 되어
    강근이 자란 후 풍우불외.
사. 쏘아라 저 포수 땃작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남글 쪼아
    비바람 도와 위망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이승만, 1898.3.5. ‘협성회 회보’>

이 시는 124년전 23세 선비 이승만이 순한글로 쓴 작품으로 몇군데 옛날 말을 현대어로 고친 것이다. 위 시에 나오는 ‘고목’(古木)은 500년 조선왕국, ‘땃작새’(딱다구리)는 부정부패한 수구파들, ‘비바람’은 러시아의 공세, ‘포수’는 자신을 비롯한 개혁파를 가리킨다. 
썩을 대로 썩어 넘어지는 나라를 일으키자는 개혁 의지를 표현한 애국시의 전형이다. 영어제목까지 붙였다.

현재 국문학계에서는 ‘고목가’를 신체시(新體時)의 원조로 평가해야 옳다는 소리가 뜨겁다. 최남선의 ‘海에게서 少年에게’(1908)보다 10년 앞선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섯 살에 천자문을 뗀 이승만 어린이는 그때 벌써 이런 漢詩를 짓는다. 
風無手而撼樹 月無足而行空(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간다). 문재를 타고난 이승만, 감옥6년과 망명 중에 수백수의 한시를 남긴 시인, 여러권의 책을 저술한 문장가 이승만이 이때 ‘고목가’를 우리말로 쓴 것은 말할 나위 없이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읽히기 위함이다.

이 시를 발표한 1898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 俄館播遷:1896)한 1년뒤 경운궁(지금 덕수궁자리)으로 환궁, 1897년 10월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직후였다. 왕후 민씨가 일본의 손에 살해되자 겁에 질린 고종은 미-영 등 여러 공사관에 피신처를 구하던 중, 한반도를 탐낸 러시아의 ‘호의’에 따라 러시아 품에 안긴다. 고종답게도 러시아의 ‘보호’ 속에서 러시아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왕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쏟아졌다. 제나라 궁궐과 백성을 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도망’친 왕에게 ”마마, 환궁하소서“ 상소가 잇따랐음은 물론 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도 고종의 굴욕적인 ’사대주의‘ 행태는 한술 더 뜨는 판이었다. 
그때 왕정개혁의 열망에 피 끓는 청년 이승만이 국민 계몽 시 ’고목가‘를 쓴다. 망국의 위기를 한탄하면서 러시아에 밀착된 부패황제와 모리배 간신들을 비판하면서, 중국 대신 나라를 휘두르는 러시아 ’비바람‘을 규탄, 친러정권의 교체와  ’러시아 축출‘의 뜻을 드러낸 혁명적 시다.

▲ 이승만이 잇따라 창간한 3개 신문. 1898년1월1일 주간 협성회회보. 4월9일 매일신문, 8월10일 제국신문. 매일신문은 한국민간인 최초의 일간지. 제국신문도 일간지, 모두 한글전용. ⓒ뉴데일리DB

#A ▶언론인 이승만◀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언론인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13세부터 19세까지 과거에 응시한 이승만은 친일정부의 갑오개혁에 따른 과거시험 폐지로 취업길이 막힌다. 20세때 ”영어라도 배워 밥벌이 하자“는 친구의 권유에 따라 미국선교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들어간다. 거기 눈앞에 펼쳐진 ’신천지‘에 경악한 이승만. ”영어보다 소중한 자유“를 알게 되자 ’자유의 신대륙 미국‘의 정치제도와 독립전쟁사, 신문 등 사회문화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연구한다. 동시에 세계 역사 지리 과학등에 눈을 뜨고 딴사람이 되었다.
★서재필의 권유로 한국 최초의 학생회 ’협성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된다.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에 참여하면서 시국토론회=왕정개혁 토론회를 51회나 진행한다. 그 중에 백성계몽에 시급한 신문 발행을 주장.’신문국(新聞局)‘ 설치를 촉구한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1898년 1월1일 이승만은 ’협성회회보‘를 창간하고 곧 일간지로 바꿔 1898년4월9일 [매일신문]을 창간한다. 한국인 최초의 민간일간지다. 4개월후 8월10일 또 하나의  일간지 [제국신문]을 창간한다. 이승만의 모든 신문들과 모든 글은 한글전용이다. 반세기 후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이 되어 문맹퇴치를 성공시킨 그 한글전용이다.
★[협성회회보]에서 러시아의 ’부산 영도‘ 조차(租借)문제를 규탄한 논설 투쟁을 벌였고, 잇따라 [매일신문]에서 고종이 러시아-프랑스 등과 국토할양 이권을 거래한 밀약을 폭로하여 국제문제를 일으킨다. 결과는 고종과 러시아의 굴복이었다.
★독립협회의 거리정치집회 ’만민공동회‘의 인기 스타 이승만은 자신의 신문들과 정치시위를 입체적으로 활용, 계몽과 왕정혁파 투쟁을 병행한다. 특히 일본인 신문 [한성신보]와 끊임없이 벌인 지면 논쟁은 국내 일본 경찰과 상인들의 횡포를 고발한 독립캠페인의 백미중 하나였다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갇힌 뒤, 몰래 글을 써서 감옥 밖으로 전달. [제국신문] [신학월보]등에 수백편의 논설을 게재한다. 내용은 모두 왕정과 국정개혁, 입헌 군주제, 기독교 교육 등인데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내자‘는 칼럼도 있다. 이승만은 투옥직후 참혹한 고문을 받던 중에 ’성령‘을 받아 기독교로 회심(回心)한 바, “기독교정신 교육만이 자유 독립의 기본”이라는 국가 교육철학은 이때부터 죽는 날까지 불굴의 신념이 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옥중저서 [독립정신]을 저술한다. “한문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썩었고 나쁜 물이 들어 희망이 없으므로 백성들의 힘만이 독립의 원천이기에 순한글로 썼다”고 이승만은 머리말에 강조한다. 뒷날 미국 유학 후 1910년에야 LA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대한민국 건국의 설계도‘라 불릴 만큼 독립운동가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일본 당국은 판매금지-압수를 계속하였다.
★1912년 일본총독부가 조작한 ’105인사건‘ 주모자로 몰려 망명, 하와이에서 ’태평양 잡지‘와 ’태평양 주보‘를 잇따라 창간, 독립운동의 무기로 삼았다. 여기에 유명한 ’공산당의 당부당‘등 반공 논설을 여러차례 반복, 교민들의 교재가 된다. 일본은 ’반일분자 두목‘ 이승만의 목에 30만달러 현상금을 걸었다.

▲ 러시아 공사관 옛모습(프랑스 프랑뎅 공사 후손 칼메트 소장사진. '다시 만나는 이웃'(2010)에서 전재). 오른쪽은 6.25때 파괴되어 현재 종탑만 만들어놓은 모습.

대특종 ’고종과 러시아의 비밀거래‘ 폭로

[매일신문] 창간 한달 뒤, 이승만은 충격적인 ’대특종‘을 터트려 세상을 놀라게 한다.
이미 ’고목가‘로 경종을 울렸던 이승만이 5월16일자 1면 전체와 2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한 기사는 바로 ’국가기밀‘에 속하는 것, 즉 고종황제가 러시아 및 프랑스와 비밀거래를 흥정한 내용이었다. [매일신문] 사장-주필-기자를 겸한 이승만이 직접 취재하여 쓴 기사로 고종황제와 강대국 간에 은밀히 오고가던 비리를 보란 듯이 만천하에 공개하였던 것이다. 
내용인 즉, 러시아는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에 인접한 사방 10리 땅과 섬들까지 사겠다고 요구하였고, 프랑스의 요구는 평양지역 석탄광산을 채굴하여 경의선 철도 부설에 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구한국 외교문서. 손세일 지음 ’이승만과 김구‘ 제1권 P401).
두달 전 3월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독립협회 청년 지도자 이승만은 규탄논설을 이렇게 썼다. “땅을 아주 주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것인 즉 관계치 않다고 하니, 이는 전국을 다 빌려주어도 좋다는 말이라.....동맹제국을 다 같이 공평히 대하자면 삼천리 강산이 몇 조각이나 남겠으며...”
이번 대특종 폭로에도 이승만은 기사 끝에 국민정신을 일깨우려는 선동적 글을 덧붙인다.
“이런 말을 들음에 치가 떨리고 기가 막히어 분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는 지라. 참 대한신민의 피가 끓는 소문이라. 어찌 가만히 앉아 있으리오. 동포들은 일심으로 분발하여 속히 조치를 취할 도리를 생각들 하시오.”

서울 외교가와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러시아 공사 마튜닌(N. Matunine)은 즉시 공문을 외부(外部=외교부)로 보내 ’기밀 누설’에 항의하며 재발 방지를 요구하고. 프랑스공사 플랑시(V, Colin de Plancy)도 관련자 처벌을 촉구했다. 
외교부는 이승만을 불러 책망 반 애원 반이다. 국가기밀을 퍼뜨려 황궁과 외국의 힐문에 끼어 못 견디겠으니 어쩌면 좋으냐는 호소였다. 이승만의 대답은 명쾌하다.
“외부대신이 외국 사람이 아니고 외부가 외국 관청이 아니거늘, 나라 일을 외국 영사와 몰래 의논하면서 우리 백성을 모르게 할 이유가 어디 있소? 이만한 일도 어렵다고 하면 외국 군사가 침노할 때는 어쩔 테요? 신문기사 때문에 나를 불러 이러시니 우리 신문이 우리나라 말고 외국을 도와주는 말을 해야 옳단 말이오?” ([매일신문] 보도)
“그러면 뭐라고 답변하면 좋으냐?”고 묻는 관리들에게 이승만은 답변까지 일러준다.
“신문기자나 대신들은 모두 대한 신민들인지라 내 나라를 위하여 하는 일이니 외국이 하지말라고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답하라.” 

이러고서 외부를 나온 이승만은 이때의 경과와 대화내용까지 [매일신문]에 빠짐없이 게재하여 뿌린다.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국제필화사건

이 사건은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일어난 국제 필화사건이 된다.
국가 기밀과 국민의 알권리 충돌 문제는 지금도 언론자유의 핵심쟁점, 구시대 전제주의와 맛서 싸우는 개혁청년 이승만의 현대적 언론감각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러시아 공사는 잇따라 새로운 항의를 제기한다. 이승만이 원산항에서 일어난 러시아 해군장교의 행패와 주민들의 규탄내용을 세 차례나  [매일신문]에 보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승만의 신문제작은 국민 계몽은 물론 강대국과 싸우는 독립운동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신문과 언론자유야말로 국민교육과 국가발전에 최선의 무기”임을 주창하며 대형신문사 설립 계획을 논설로 쓰기도 할 만큼 ‘미국 같은 자유세상’을 앞당기려 분투하였다. 

“외국 공영사도 이 종이 조각을 군사 몇 만명보다 두려워하니...” ([제국신문] 논평) 공방을 거듭하던 국제필화사건은 이승만과 독립협회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고종황제와 외교부, 러시아 및 프랑스도 두 손을 들고 계획을 철회하는 수 밖에 없었다.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거리 집회와, 청년 언론인 이승만의 신문동원 합작 투쟁은 대한제국에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영토적 야심에 결정적인 제동을 걸었다. 
이해 3월서 5월까지 거둔 성공은 다음과 같다. 고종이 들여온 러시아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철수하게 만들었고, 부산 절영도의 조차요구도 철회시켰으며, 개업 한 달도 안된 한러은행까지 문을 닫아야 했다. 

★23세 언론인 이승만은 알고 있었을까.
청년시절 러시아와의 이런 싸움이 90평생 ‘소련 스탈린과의 전쟁’이 될 줄을.
그것은 운명일까, 행운일까. 이승만의 운명이요, 대한민국의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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