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로고

◆새 연재◆ 이승만 건국사⑴ 스탈린과 40년전쟁

입력 2022-11-23 15:13 수정 2022-11-23 15:57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44세ⓒ뉴데일리DB


●연재를 시작하며

대한민국의 건국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피와 땀이 이룩해낸 성공이다.
그 선구적 리더가 이승만이었음은 역사적 기록이 증명한다. 김구는 어떠했던가?
지금 대한민국은 건국의 주역 이승만을 제쳐놓고 ’건국을 반대한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가장 숭앙하는 역사왜곡의 아이러니에 빠진지 오래다. 왜 그럴까?

1948년 3월,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 총선거(5.10)를 앞두고서 벌어진 건국전쟁의 현장을 보자. ’유엔감시 총선을 통한 건국‘이란 외교독립론에 마침내 성공한 이승만 박사는 김구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까지 유엔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적극 동조하던 김구가 하루밤새 돌변하여 ”김일성과 통일 협상“ 주장을 들고 나와 평양행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갈 테면 모스크바로 가라. 소련의 꼭두각시 김일성을 백번 만나봤자 무스 소용이 있겠나.
남북통일을 논의하겠다면 분단의 원흉 스탈린을 직접 만나서 담판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유 총선거를 무산시키려는 남북회의에 참가하면 스탈린의 목적에 이용만 당할 뿐이다. 
한국 지도자 중에서 이것을 홀로 모른채 평양행을 고집한다니 대세에 몽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오. 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국가 대사에 방해되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니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이승만 담화)

’갈 테면 모스크바 스탈린을 찾아가 담판하라‘는 한마디가 두 사람의 격차를 드러낸다.
’소련은 최악의 독재‘라는 말을 [백범일지]에 써놓았던 김구가 자신의 정당 한독당까지 반대하는데도 굳이 소련의 하수인 김일성을 꼭 만나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지정학의 함정‘에 놓여있는 한반도, 
국경선에 몸 붙인 주변국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당대의 군사대국들, 
’독립유지‘에 필요한 것은 지정학적 상상력, 지정학적 접근, 지정학적 전략전술이다.
조선왕조의 ’사대주의‘ 선택이 그 시대적 요구였다면, 강대국들 약육강식 전쟁시대에 일본식민지 약소민족의 독립은 누가 어떻게 이루어 낼 수 있으랴.

다행히도 스무살 청년선비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들어가 ’자유의 신대륙‘ 미국을 발견한다.
미국선교사들과 서재필과 유치호로부터 세계역사, 세계지리, 수학, 물리학, 천문학등 선진과학 문명과 영어를 배워 익히면서 망국직전 조선을 혁파하여 자유민주국가로 거듭나야하는 할 것인데 미국을 새로운 독립국가 모델로 삼는다. 
독립협회의 청년 지도자, 한국최초의 민간 일간지를 두 개나 창간한 언론인, ’만민공동회‘의 인기스타 젊은 혁명가는 급기야 한성감옥에 갇힌다. 모진 고문을 받던 중에 ’뜨거운 성령‘을 받아 기독교로 회심한 사형수 이승만, 그 순간 기독교의 순교자적 신앙에 녹아든 자유와 민주주의 ’건국의 꿈‘은 옥중저서 [독립정신]에 오늘 봐도 참신한 그림으로 꽃피운다.


▲ 1910년8월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왼쪽),오른쪽 책 표지는 프린스턴대학이 단행본으로 출판한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집.ⓒ뉴데일리DB

”미국 같은 나라 세우기 위해“ 미국 동부 엘리트 대학교만 찾아 5년내 국제법과 국제정치 박사가 된 35세 이승만은 당시 지구적 정세 통찰력과 지정학적 역사관을 갖추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박사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란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승만은 미국독립이래 100년간 국제관계와 국제법, 전시 자유통상 무역에 끼친 미국의 영향력에 관해 집중 연구하였다. 결론은 ”아메리카 만세“였다. 즉, 해외 영토 야욕이 없는 고립주의(Monroe Doctrine)의 역사적 검증과, 기독교 국가의 국제적 자유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정학의 굴레에 묶여 3강국의 먹이가 된 한반도에서 주변국의 위협을 물리치고 독립을 지켜줄 힘을 바로 미국 역사연구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힘을 이용한 한국독립“이란 지미친미용미(知美親美用美)의 현대병법으로 무장, 당시 유일한 글로벌 리더십을 갖춘 독립운동가로 스스로의 전투태세를 완성한다. 고종 황제 부자가 대한제국을 ”일본 천황폐하께 기꺼이 양도“하던 1910년 8월이었다.
’준비된 지정학적 리더‘의 탄생, 이렇게 자신을 새로운 국가리더로 무장한 현대적 독립운동가가 그 시대 누가 있었던가. 만약 이승만도 중국으로 건너갔다면 대한민국과 한미동맹은 과연 탄생할 수 있었을까. 


▲ 소련 레닌과 스탈린.(자료사진)

▶왜 ’스탈린과 40년 전쟁‘인가?
5천년 침략의 제왕 중국은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물리쳐주었다.
러일전쟁으로 또 일본이 쫓아낸 러시아는 세계1차대전중 레닌의 공산화 쿠데타로 국제공산주의 맹주가 되었다. 그 레닌과 부하 스탈린이 상하이 임시정부를 공산화로 뒤엎은 역사를 아시는가.

임정 초대대통령 자유주의자 이승만은 반기를 들었다. 
1923년 3월 ’공산당의 당부당‘ 논문을 발표, 당시 세계 최초로 반공노선을 천명한다.
세계를 열광시킨 공산주의를 겪어보지도 않고 왜 ’인류의 적‘으로 낙인찍는단 말인가? 
이승만은 이미 그런 인물이 되어있었다. 조선왕조의 전체주의와 싸우고, 천황 신권국 일본의 전체주의와 싸우고, 이어 등장한 국제공산당 전체주의 정체—-기독교 자유주의와 서구 문명사를 꿰뚫은 이승만의 글로벌 망원경 렌즈에는, 구미 지식인들이 환호하는 유토피아가 필경 사라질 악마주의임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하나님의 적은 인간의 적, 붉은 사탄의 공세는 이승만을 평생 반공주의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이승만이 시작한 ’스탈린과의 전쟁‘은 얄타회담 음모와 해방3년을 거쳐, 6.25침략전쟁중 스탈린이 죽은 뒤까지 이어진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은 스탈린이 북한에 만들어놓은 가짜 김일성 왕조의 핵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 연재는 ’이승만과 스탈린의 전쟁‘에 국한시킨다. 
4.19이후 현재 이 시간까지 한반도 ’스탈린 분단체제‘가 자행하는 반인류-반역사의 야만적 폭력행위들의 역사적 성찰을 모두 담을 그릇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40년 전쟁‘이란 이승만이 상하이 임정 대통령으로서 레닌-스탈린 하수인 세력의 임정 공산화에 맞서 싸우던 1920년부터 자진사퇴한 1960년까지를 말한다. 

지금 다시 살아난 중국-러시아-김씨왕조의 삼각 핵동맹의 포로가 된 대한민국, 이제 ’스탈린과의 전쟁‘에서 ’시진핑과의 전쟁‘ ’푸틴과의 전쟁‘ ’김정은과의 전쟁‘이다. ’햇볕정책‘이래 친북-친중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여러분의 피로한 몸에 한 모금 생수가 되고자 함이 연재의 조그만 바램이다.


뉴데일리 댓글 운영정책

뉴데일리 경제

대구·경북

메인페이지가 로드됩니다.

로고

뉴데일리TV

칼럼

특종

미디어비평

제약·의료·바이오

선진 한국의 내일을 여는 모임. 한국 선진화 포럼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