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0년전 철학자들 경고 '민주주의의 타락' 나타난 것'타락한 중우(衆愚) 민주주의 폭력' 재조명 해야
  • ▲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제74회 에미상 드라마 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정재가 12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이크로소프트 시어터의 프레스룸에서 트로피를 들고 활짝 미소 짓고 있다. ⓒ연합뉴스
    ▲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제74회 에미상 드라마 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정재가 12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이크로소프트 시어터의 프레스룸에서 트로피를 들고 활짝 미소 짓고 있다. ⓒ연합뉴스
    이정재의 에미상 수상

    추석 휴일 기간에 오징어 게임의 이정재가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한국인이 이젠 문화 콘텐츠에서도 세계 제일로 치솟았다. 

    어렸을 때 필자 세대를 포함한 한국 청소년층은,
    “우린 언제나 저렇게 사나? 도저히 안 되겠지?” 하는 절망에 빠지곤 했다.
    대학생이 되면서,
    이 절망은 곧잘 반(反) 서구적 민족주의와 종속이론 같은 시각과 만나곤 했다.
    그런데 1960~1970년대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체육 부문에서 세계 1등 사건이 가끔 일어났다.
    마라톤 권투 레슬링 유도 배구,
    그러더니 어럽쇼,
    축구도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 전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하면 된다”고들 외쳤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골프 수영 피겨 스케이팅 영화에서도 스타가 탄생하는 사태가 왔다. 

    산업화-민주화-선진화 한 세기만에

    더 놀라운 사실.
    한국 경제가 세계 10위권 이내로 올라갔다.
    “자본주의 방식으론 이 지긋지긋한 최빈국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겠지?”
    하던 부정적 시각이 깨져나간 것이다.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를 한 세기 이내 짧은 기간에 이룩한 세계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문제는 이 ‘기적’이라고 밖엔 설명할 길 없는 사실을,
    여전히 각급 선거가 있을 때마다 유권자 한 절반가량이 죽어라 인정하질 않는,
    또 하나의 ‘기적’이다.  

    물론 이 가운데는,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 더 발전하자고 하는 소리지”라고 말하는 유권자들도 많다.
    이런 유권자들의 취지는 충분히 알아듣는다. 

    그러나 “기적은 무슨 기적, 그건 발전이 아니라 식민지화였다”라고,
    속아 믿는 부류도 아마 꽤 있을 것이다.
    그들을 대변하는 극좌 정파도 우리 주변엔 분명히 있다.
    주사파, NL파, 신구(新舊) 마르크스주의자, 광장의 급진·과격 떼가 그들이다. 

    이런 부류는 어느 선진국에나 다 있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런 부류가 자유 체제 세력보다 엄청 더 세다는 게 역설 중 역설이다.
    이러고도 선진국이라고?
    경제는 혹 선진국일지 몰라도 철학, 세계관, 문화의식, 법치의식은 글쎄...
    아직도 적잖이 후진적이라 해야 할 듯싶다.

    <광우병난동>과 <촛불정변>과 <홍위병난동>

    이 후진적 현상을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2300년 전 경고한,
    민주주의의 타락’ ‘타락한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광우병 난동>, <촛불 정변> 따위에서 볼 수 있었던 광풍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으로 치면 <홍위병 난동>이다.

    중국 문화혁명 때 호되게 당했던 지식인을 훗날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눈을 내리깔고 “아~” 하며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으로 그는 답을 대신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필자는 그때까지만 해도 과두(寡頭) 권력자들의 횡포는 체험했어도,
    '타락한 중우(衆愚) 민주주의 폭력'은 체험하지 못했다.
    그러다 <광우병 난동>과 <촛불 정변> 때 그런 광풍을 목격할 수 있었다.

    미친 바람에 대한 문명적 성찰

    그 광풍은,
    극좌 직업적 음모가들,
    그 음모가들에게 조종당하는 좌익 대중단체들,
    이 대세에 휩쓸린 보통의 대중들,
    이들을 광장으로 몰아넣은 선정적 언론매체들(좌뿐 아니라 우라고 하는 매체들도)의 가짜뉴스,
    우파로 분류되던 정당 일부의 배신,
    이들이 모여 만든 합작품이었다. 

    허위를 만드는 자들과 허위에 휘말리는 자들이 만들어낸,
    환각적 흥분사태와 폭력사태,
    이에 겁먹은 정계와 담론(談論)계 지식분자들의 투항,
    이게 <광우병 난동>과 <촛불 정변>이었다.
    무지, 악의, 위선, 허위, 광기, 공포, 비굴의 광풍이었다.
    이제 그 난(亂)은,
    문명적 성찰(省察) 앞에서 철저히 재조명되어야 한다.

    이재명-이준석-문재인 응징의 의미

    그 문명적 성찰 중 한 항목이,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이재명·이준석·문재인에 대한 응징이다.
    사법부에 침투한 운동권과 일부 미디어 메신저들이 이 응징에 훼방을 놓고는 있다.
    그러나 이 추세는 거스를 수 없는 국민적 이성(理性)의 발로다.
    타락한 중우정치에 대한 순수이성의 교정이다. 

    세대가 모여앉은 추석 음복(飮福) 식탁에서, 고향 친구들 회동에서, 국민적 이성은 냉철한 공동인식에 도달했을 것이다.
    “사람이 그럴 수가. 나라가 그렇게 돼서야.”
    이러면서, 성공한 나라 대한민국을 망치는 악의에 대한 치유의 에너지를 발했을 것이다.

    시작하자.
    자유민주주의 대반격을.
    저들이 자행하는 인민민주주의·전체주의 반란을 가차 없이 일거에 분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