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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된 것인가?

    1930년대의 프랑스와 2015년의 한국, 그 類似性(유사성)

  • 趙甲濟   
      
       광우병 난동, 천안함 폭침, 세월호 침몰, 메르스 사태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분열상과 혼란상은 히틀러가 독일군을 재무장시켜 유럽을 정복할 계획을 밀고 나가던 1930년대의 프랑스를 연상시킨다.

       히틀러는 프랑스의 언론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프랑스는 전쟁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나라"라고 판단, 라인란트 진주,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 흡수 전략을 이어갔고 드디어 폴란드 침공을 통하여 2차대전을 일으킨 뒤 전격전으로 프랑스를 6주 만에 항복시켰다.
     
       메르스 소동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을 김정은은 "아, 한국은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이구나"라고 자신만만해 할 것이다. 1개 연대가 전멸해도 언론의 선동에 넘어간 국민들이 항복하자고 나설 나라라고 판단할 것이다. 미국은 "이런 대한민국과 한미동맹을 과연 유지할 수 있나"라고 懷疑(회의)할지 모른다. 미국이 IS와 싸우고 있고 중동의 여러 나라와 호주까지 파병을 하는데도 한국은 동맹국으로서 꼭 해야 할 일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동맹은 주고 받는 관계이다. 한국인은 미국에 주는 것 없이 받기만 바란다. 이런 공짜 심리가 늘 통할 정도로 국제관계는 안이하지 않다.
     
       처칠: "소설을 집어치우고 愛國논설을 써"
      
       앙드레 모로아(1885~1967)는 프랑스의 작가, 평론가였다. '영국사' '프랑스사'의 著者(저자)로 유명한 그는 1차세계대전중 4년간 영국 육군사령부에 파견된 프랑스 연락장교였다. 反英(반영)감정이 강한 프랑스에서 親英派(친영파)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1939년 9월에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2차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정부로부터 영국 육군참모본부 근무 '프랑스측觀戰(관전)연락武官(무관)'으로 초빙되었다. 그는 1940년 5, 6월에 히틀러의 전격전에 걸려 6주 만에 프랑스가 항복하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프랑스 항복 후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으로 건너가 강연과 집필생활을 했다.
      
       그는 전쟁 체험담이기도 한 책을 냈다. 1940년 11월에 나온 '프랑스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What happened to France)란 책인데 나중에 '프랑스의 비극'(Tragedy in France)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태평양전쟁 직전 일본에선 '프랑스 지다'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가 大敗(대패)한 원인을 군사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와 국민의 士氣(사기)면에서도 관찰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과 북한을 생각했다. 1930년대의 프랑스가 오늘의 한국이고 그때의 나치 독일이 북한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의 동맹국 영국은 한국의 동맹국 미국과 거의 같은 처지이고.
      
       평화至上(지상)주의, 패배주의, 사회주의가 득세하고 左右대결이 깊어진 프랑스 사회는 무섭게 군비증강을 하는 나치 독일을 쳐다보면서도 전쟁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히틀러와 선전의 천재 괴벨스는 이런 프랑스 사회의 분열을 획책하였다. 프랑스의 左右대결을 부추기고 특히 英佛 동맹을 이간질시키는 심리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했다. 독일의 선전부는, 영국의 對獨(대독) 강경론 때문에 프랑스마저 전쟁에 휘말려 들 것이라고 反英감정과 厭戰(염전) 무드를 선동했다. 이런 요인들이 합쳐져서 프랑스는 독일과 싸워 조국을 지켜낸다는 擧國(거국)일치의 전쟁의지를 확립할 수 없었고 투지만만한 상대를 만나 어이없는 大敗를 당하고 말았다.
      
       모로아는 이 책에서 문필가로서 자신의 책임을 맨 먼저 지적한다. 1935년 12월 말 그는 영국의 귀족 부인 집에서 당시 윈스턴 처칠과 점심을 함께 했다. 처칠은 끊임없이 히틀러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으나 동료 정치인들은 對獨유화론을 지지하여 그는 고립되어 있었다. 식사를 끝낸 뒤 처칠은 모로아를 옆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로아君(군), 소설 쓰는 것은 그만두게. 傳記(전기) 따위도 집어치워."
       놀란 표정의 모로아를 향해서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소설도, 傳記도 쓰지 말고 하루 한 편씩 논평을 써! 그 내용도 이것 하나만 다뤄야 해! 프랑스 공군은 과거엔 세계 제1이었지만 지금은 4, 5위 정도란 말이야. 독일 공군은 과거 미미했으나 지금은 세계 1위에 육박하고 있어요. 君은 프랑스에 돌아가거든 매일 이 점을 지적하란 말이야. 만약 프랑스가 君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君은 여자의 사랑, 남자의 야망이니 하는 것들을 주제로 글을 쓴 것보다 훨신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야!"
      
       '2차세계대전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처칠은 글과 말의 동원력을 안 지도자였다. 그런 그도 소설, 傳記따위는 집어치우고 오직 프랑스가 직면한 국방상의 위험을 알리는 게 글 쓰는 이들의 의무라고 말한 것이다. 모로아는 이 책에서 자신은 그런 글을 쓰지 않았다고 후회하고 있다. 처칠은 마지막으로 모로아에게 이런 경고를 했다고 한다.
       "君의 조국 프랑스는 독일 공군 때문에 멸망할지 모른다. 모로아君! 힘이 따르지 않는 文化는 내일이라도 死滅(사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
      
       처칠의 경고를 오늘날 한국의 글 쓰는 이들에게 變用(변용)한다면 이런 말이 되지 않을까?
       "여러분의 조국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성, 특히 김정은과 종북세력의 음모, 한국 지도층의 무사안일을 지적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소설과 傳記와 詩는 나중에 써도 되지만 음모를 폭로하는 글은 지금입니다. 한국이 누리는 예술과 문화가 국가수호의지의 뒷받침이 없다면 내일이라도 여러분들은 글 쓸 자유, 말할 자유를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하루 한 건씩 논평을 쓰세요. 그 주제는 오직 하나 한국의 위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글로 해서 국민들이 깨어나 이 음모를 저지한다면 여러분들은 노벨 문학상을 받는 것보다 훨씬 고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평화지상주의와 좌파득세 
          
       앙드레 모로아가 미국으로 건너가 쓴 책에서 프랑스가 망한 원인을 분석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1. 평화至上주의가 프랑스의 국가수호의지를 약화시켰다.
       2. 소련을 조국으로 삼는 사회주의자들이 국가를 분열시켰다.
       3. 군대가 정치에 종속되어 재무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4. 영국과 프랑스를 이간질 시킨 나치의 선전戰이 효과를 보았다.
      
       이걸 2015년의 한국 상황에 대입하면 이렇다.
     
       1. 핵무장한 북한정권 앞에서 평화至上주의자들이 한국인의 생존투쟁 의지를 마비시켰다. 核前무장해제 상태이다.
       2. 북한을 조국으로 삼는 종북세력이 진보를 자처, 국가를 분열시켰다.
       3. 군대가 좌경세력에 눌려 北核에 대응하지 못한다. 심지어 미사일 방어망 건설로, 좌익 눈치를 보면서 만들지 못한다.
       4. 한국과 미국, 한국과 일본을 이간질시키려는 좌익 선동술에 보수세력까지 놀아난다. 특히 아베를 김정은보다 더 미워한다. 
        
       프랑스는 독일이 1935년경부터 본격적인 재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좌익들이 확산시킨 평화至上주의 무드에 정치권이 넘어가 군비증강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 우파는 좌파의 분열책동에 신물이 나서 공산주의의 씨를 말린 나치 독일에 은근히 호감을 가졌다. 이래저래 프랑스 지도층 안에선 애국심과 決戰(결전)의지가 약화된 것이다.
       1차세계 대전 때 主전선은 프랑스-벨기에-독일전선이었다. 여기서 프랑스 젊은이 약 160만 명이 전사했다. 20대 젊은이들의 약 40%가 죽었다고 한다. 이런 참화를 겪은 나라이니 厭戰(염전)사상이 퍼져가기 쉬웠다. 더구나 사회주의자들은 평화지상주의라는 위장술로써 國論을 분열시키고 국방력을 약화시켰다.
       1930년대의 프랑스와 2015년의 한국은 비슷한 점이 많다. 나치를 북한정권, 사회주의자들을 친북세력, 영국을 미국으로 바꿔놓으면 역사적 무대의 설정이 흡사하다.
       세계사에서 敵對(적대)관계에 있는 두 국가 사이에서 일방의 사회가 이 정도로 他方(타방)에 대하여 굴종적인 예도 드물 것이고 그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경우는 더 드물 것이다. 
          
       전쟁중에도 반목한 프랑스 지도부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로아는 미국에서 발간한 '프랑스의 비극'에서 프랑스의 국가지도부가 독일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반목, 분열해간 사정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수상은 에도알 달라디에였다. 이 내각의 재무장관은 폴 레노. 두 사람은 상대를 나름대로 높게 평가하면서도 公的(공적)인 일에선 앙숙이었다. 1940년 3월 달라디에 수상이 핀란드 사태와 관련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레노가 수상이 되었다. 그는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달라디에를 육군장관으로 붙들어놓았다.
       앙드레 모로아는 레노 수상에게 축하의 뜻을 담아 이런 문구를 써보냈다고 한다.
       <의회는 평화시엔 국민을 대표하고, 戰時엔 군대를 대표한다.>
      
       군대를 신뢰하고 밀어주라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사태는 정반대로 흘렀다. 레노 수상은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인 가므랑 원수를 싫어했다. 너무 소극적이란 이유에서였다. 가므랑 원수는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쳐들어가고 있던 때를 틈타서 독일을 쳐야 한다는 견해를 묵살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때 프랑스 군대가 선제공격을 했다면 독일군대는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주력하느라고 프랑스 접경지대에 배치했던 병력을 많이 빼버렸던 것이다.
      
       가므랑의 논리는 이러했다.
       <우리 프랑스는 출산율이 매우 낮다. 1차 대전 때처럼 피를 흘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人的 자원이 없다. 人命(인명)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한 과학전쟁을 해야 한다.>
       레노 수상은 공격적 전략을 원했고, 가므랑은 방어 위주의 전략을 고집했다. 두 사람은 반목했다. 당시 프랑스 지도부엔 이런 異見(이견)을 조정하고 종합하여 더 나은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도력이 부족했다. 이 점이 영국과 달랐다. 異見은 어떤 조직에도 있다. 문제는 그 이견이 반목으로 악화되는가, 아니면 더 높은 수준으로 승화되는가이다.
      
       "서로 싸운다고 敵과 싸울 시간이 없다."
      
       레노는 가므랑을 교체하려고 했다. 이런 움직임을 가므랑도 알았을 것이니 전쟁을 지도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지 모른다. 레노 수상은 독일군이 벨기에로 쳐들어갈 것이 뻔한데도 벨기에 정부가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진주를 허용하지 않는 데 화가 났다. 그는 벨기에 영토로 강제 진입할 생각을 했는데 가므랑은 이에 반대하여 싸우기도 했다.
       독일군의 기습이 시작되기 열흘 전인 1940년 4월29일 앙드레 모로아가 레노 수상 집무실을 찾아갔더니 그는 이렇게 불평했다.
       "탱크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한다. 대포와 기관총은 창고에서 잠 자고 있다. 독일은 240개 사단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고작 100개 사단밖에 없다. 달라디에의 게으름과 우둔함이 모든 것을 망쳤다."
       모로아가 "그래도 달라디에는 프랑스를 사랑하는 사나이입니다"라고 변호했다. 레노가 한 말은 이랬다.
       "그렇다. 달라디에는 프랑스의 승리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승리 이상으로 내가 실각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독일군 침공 나흘 전인 5월6일에 모로아는 다시 레노 수상 집무실에 들렀다. 책상에 세 개의 직통전화가 놓여 있었다. 정부기관, 외부, 그리고 愛人(애인)인 모 백작부인 거실로 통하는 전화였다. 그때 레노는 백작부인으로부터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날도 달라디에와 레노는 국회에서 격렬하게 충돌하여 대통령이 중재에 나서야 했다.
       5월10일 독일군의 全面(전면) 공격이 시작되었다. 독일 기갑군단은 벨기에의 아르덴느 숲지대를 지나 프랑스 軍의 취약지구를 강타했다. 독일군은 탱크와 전투기를 결합한 電擊(전격)기동전술로 전선을 돌파하여 배후로 진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레노 수상은 가므랑 원수를 해임하고, 그를 싸고돌았다고 해서 육군장관 달라디에를 외상으로 전보시킨 뒤 자신이 육군장관을 겸했다. 戰線(전선)은 무너지는데 내부 권력투쟁에 더 치중한 것이 프랑스 지도부였다. 한 영국군 장교가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동료끼리 싸우는 데 바빠서 독일군과 싸울 시간이 없다."
      
       앙드레 모로아는 "개인끼리의 싸움 때문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었던 가장 좋은 사례를 프랑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 때도 당시 대통령 포앙카레와 클레망소 수상은 사이가 나빴으나 전쟁 지도 면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對독일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모로아는 "지도층의 不和가 결정적 패인은 아니었지만 군대로부터 마지막 抗戰(항전)의 기회를 앗아갔다"고 평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분열상은 親北세력이 좌파적-계급적 적대감으로 대한민국 주류층을 공격하고 현대사의 정통성을 부정한 데서 발생했다. 북한군의 기습이 성공하여 초전에 국군이 밀리고 서울이 포위될 때 국군과 국민들은 대통령과 함께 서울을 死守(사수)할 것인가?
       중요한 일들은 진공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축적된 원인의 결과로서 일어난다. 지금 친북세력이 한국 사회에서 축적시켜가고 있는 분열과 증오와 반목의 원인들이 무슨 재앙을 한국에 가져다 줄 것인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 
       
          戰時에 不信당한 지도부
          
       작가 앙드레 모로아는 1940년 말에 미국에서 펴낸 '프랑스의 비극'이란 책에서 左右대결이 계층간 증오심을 폭발시켜 애국심을 실종시킨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계급엔 희망을, 中産(중산)계급 일부엔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이 된다는 생각을 심었다. 소련과 독일은 프랑스 국민들에 대한 선전전을 통해서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이 두 나라의 工作(공작)이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정치 때부터 있어왔던 분열상을 더욱 깊게 했다.>
       독일이 1940년 5월 프랑스를 공격하자 전통적인 애국심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인들이 참전했으나 결코 열심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정치인들 전체를 혐오하고 있었다. '미운 정치인들이 전쟁을 지도하게 되니 국민들이 흔쾌히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開戰(개전) 6주 만에 프랑스가 抗戰(항전)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해버린 데는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이런 不信(불신)이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지금 한국인들은 정치인들을 어느 정도 믿는가? 이들이 전쟁을 지도하면 안심할 것인가?
      
       프랑스 지도부가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프랑스 일부 국민들은 "敗戰(패전)한 것은 안 된 일이지만 저런 놈들이 당하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요컨대 프랑스 좌파는 소련을 조국처럼 생각하고 이 꼴을 보다 못한 우파는 차라리 나치 독일이 들어와 좌파를 혼내 주는 것을 보고싶다는 심정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세태와도 비슷하다. 한국의 종북세력은 북한 정권보다 애국세력을 더 증오하고 있다. 애국세력도 북한 정권보다 종북세력을 더 증오하여 "저런 반역세력이 당하는 꼴을 봐야 한다"고 벼르고 있다. 이럴 때 북괴군이 남침한다면 한국인들은 열심히 싸울까? 지금 핵무장한 敵(적)을 앞에 두고 대한민국 안에선 치명적인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평화至上주의가 좀먹은 自衛(자위)의지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오늘의 한국처럼 평화至上주의가 팽배했다. 어떤 代價(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對獨유화정책이 히틀러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좌파는 핵실험을 하고 침략근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북한정권에 대한 自衛조치까지 "그렇다면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윽박지른다.
       1936년 히틀러가 독일군을 비무장 라인란트 지역으로 불법 진주시켰을 때 프랑스가 군사적 대응을 했더라면 독일 군부의 쿠데타로 히틀러는 실각하게 되어 있었다. 평화至上주의에 빠져 있던 프랑스는 영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단독으로 武力(무력)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영국도 프랑스를 위해서 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 했다. 기회를 놓친 프랑스는, 재무장에 성공하여 강대하게 된 독일군과 불리한 입장에서 상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애국심이 약화되자 노동자의 직업윤리가 붕괴되고 기업인들도 이기주의에 함몰되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군수산업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기업인들은 國産(국산)무기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외국 무기의 수입을 방해하였다.
       앙드레 모로아는 이 책에서 "프랑스는 어떻게 했더라면 패전을 면할 수 있었을까"라고 自問自答(자문자답)했다.
     
       <첫째, 강하게 되었어야 했다. 국민은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는 언제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곧 자유를 잃는다. 민주주의는 국민도덕이 붕괴한 뒤엔 성립할 수 없다.
       둘째, 민첩하게 행동해야 했었다. 민주주의와 의회정치가 과정을 중시한다면서 일을 미루고 기업은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총체적 비효율이 패전의 한 원인이었다.
       셋째, 국론통일.
       넷째,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국민의 여론을 보호했어야 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중에는 독일로부터 돈을 받고 親獨(친독)여론을 조작한 이들이 많았다.
       다섯째, 국가분열적인 사상, 즉 사회주의 이념으로부터 청년들을 지켰어야 했다.
       여섯째, 국민들이, 특히 지도층이 고결한 생활을 했어야 했다.>
      
       위의 처방은 그대로 한국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은 많으나 행동하는 사람은 적다. 울분을 터뜨리는 사람은 많으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시간을, 지식을, 돈을, 손발을 희생하려는 사람이 적다. 논평자와 분석가들은 많으나 구체적인 救國(구국)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이런 방관과 무사안일의 축적은 패배주의를 만들어낸다. 막연한 패배주의와 막연한 낙관론 속에서 대한민국호는 지금도 기울고 있다. 30도인가, 45도인가? 이 기울기에서 復元力(복원력)은 과연 있는가?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