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연아ⓒ연합뉴스
    ▲ 김연아ⓒ연합뉴스



    유난히 말이 없던 아이, 
    남 앞에 서면 쭈뼛거리던 아이.

    수줍기만 하던 여섯 살 김연아는 
    1996년 7월 과천 시민회관 빙상장에서 
    드레스를 입고 <빙글빙글>도는 <언니>들을 바라 본 뒤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4년 2월 21일 마지막 프리스케이팅까지
    17년 7개월을 달려온 그녀의 피겨스케이팅과의 인연도 그날부터다. 

    취미로 시작한 피겨스케이팅은 김연아에게 늘 즐거운 놀이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초등학교 때부터
    그녀에게 피겨스케이팅은 놀이가 아니라 일이 됐다. 

    9세에 전국체전 초등부 우승을 차지하고
    열두 살의 나이에 다섯 종류 트리플 점프를 완성한 실력은
    남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으려고 노력한 근성의 열매였다.  

    어린시절 시작한 운동은 부상으로 이어졌고
    발목, 허리, 꼬리뼈 등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2006년 은퇴를 고민했을 때,  
    또 2008년 고관절 통증으로 진통제를 달고 운동해야 했던 때도  
    그녀에게는 모두 뼈를 깎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대한민국을 휩쓸던 김연아가
    세계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쇼트와 프리 합계 207.71점을 받아 
    최초로 200점을 넘긴 선수가 됐을 때부터다. 

    김연아는 2010년 벤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설이 됐다. 

    쇼트와 프리에서 모두 자신의 개인 기록을 넘어서며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겨 선수라는 극찬을 받고 24살의 나이에
    은퇴도 번복하고 다시 스케이트를 신은 김연아.

    17년 7개월간 23번의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피켜 불모지 대한민국에 김해진(17), 박소연(17)이라는
    씨를 뿌린 그녀.

    비록 그녀의 마지막이 된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들에 대한 편파 판정 의혹이 일어나며 
    아쉽게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끝까지 실수하지 않고 자신의 경기를 펼친 김연아의
    스케이팅은 전 세계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