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 "교과서 집필기준부터 잘못""검정교과서 없애고 국정교과서로 돌아가야 할 시기"
  • ▲ 이주영 교수ⓒ정상윤
    ▲ 이주영 교수ⓒ정상윤




    한국사 교과서를 두고 말이 많다.

    좌익과 우익의 [이념 전쟁]에서
    전체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역사 전쟁]으로 용어는 변했지만
    대한민국의 성공을 질투하는 세력과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측의 싸움은 여전하다.

    10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에서
    (사)건국이념보급회가 주최한 <제32회 이승만포럼>의 주제도
    최근 검정을 통과한 8종의 한국사 교과서였다.

    이날 이주영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가 발표자로 나섰다.
    (사)건국이념보급회의 전신인 <이승만연구소>의 공동대표로
    오랜 시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연구한 이 교수는
    최근 논란의 중심이 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포함한 8종의 교과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최근 검정을 통과한 8종의 한국사 교과서 중
    5개는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기술했다.
    2개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나마 1개는 조금 다뤘다.


    이승만 대통령을 다루지 않아도
    부정적으로 다뤄도

    검정을 통과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이는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집필 기준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에 태어나 1965년까지 90년을 살았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 강점기를 겪고
    대한민국을 건국했던
    역사적 순간을 살아낸 인물이다.


    한국사 교과서에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 이주영 교수


    이주영 교수는 집필 기준을 정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좌경화를 우려했다.
    이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이 대한민국 한국사 교과서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 이유가
    역사로 먹고 사는 역사학계의 치우친 이념적 한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독립협회에서 애국계몽운동가로 활동했던 청년 이승만,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발행한 언론인으로서의 이승만은
    충분히 역사적으로 기록할 의미가 있다.

    또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며 국제회의에 참석한 외교가 이승만,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알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
    미국을 동맹국으로 만든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역사에는
    꼭 있어야 할 기록이다.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좌경화 돼 있다.
    집필 기준을 만드는 학자들이
    삐딱한 사관을 가지고
    있기에
    제대로 된 역사교과서가 탄생할 수 없다.

    이는
    [민족]이라는 허상에
    매몰된 학자가
    많기 때문이다.

    과거 일제 강점기에 독립투쟁을 한 세력들 중
    공산주의자가 다수 존재했다.

    이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독립을 주장했고 [민족]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거부감 없이 대중들을 설득했다.

    아직도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종북세력은
    [민족]을 내세운다.

    이런 종북세력에 영향을 받은
    역사학자가 많이 있는 듯 하다"

       - 이주영 교수




  • ▲ 이주영 교수ⓒ정상윤
    ▲ 이주영 교수ⓒ정상윤




    이주영 교수는
    이런 역사학계의 문제와
    한국사 교과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국가가 나서서 올바른 역사를 홍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담은 한국사 교과서는
    지금의 검정 교과서로는 책임소재가 불문명하기에
    과거의 국정 교과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학계의 자정을 기다리며
    대한민국 역사가 망가지는 모습은
    더 이상 바라볼 수만은 없다.

    좌경화된 역사학계에 의해
    왜곡된
    역사적 사실들이 거짓이며 허구라는 것은
    이미 많은 진실된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져다.

    국가가 나서서 진실을 홍보하는 게
    역사전쟁을 종결하는 지름길이다"

       - 이주영 교수


    다음은 이날 이주영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요약한 자료와
    <역사전쟁>에 대해 정리한 자료다.


    [제32회 이승만포럼 요약본]


    주  제 : 한국사 교과서의 이승만 서술
    발표자:  이주영 (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

    1. 역사전쟁과 이승만(1875-1965)

    <한국사> 교과서 6종,
    2014학년 <한국사> 교과서 8종(교학사 포함)

    이승만(1875-1965)의 역사적 위치
    (1)애국계몽운동가로서의 이승만
    (2)독립운동가로서의 이승만
    (3)건국운동가로서의 이승만
    (4)건국·호국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2. 역사전쟁의 원인과 그 대응책

    (1) 일제시대 혁명운동의 유산이 주된 원인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의 환상, 
    민족주의의 명분은 북한-사회주의를 자동적으로 포용,  
    대응 논리의 개발과 홍보(국민교육)의 부족

    (2) 역대 정권의 책임과 과제

    대한민국의 생존 논리를 천명하지 못한 정권들,
    민족주의 명분에 밀려 4·19이후 역대정권이 건국 기념을 회피,

    (3) 앞으로의 과제:

    새로운 한국사 교과서를 만들 때 집필기준은
    민족주의 대신 大韓民國의 國家主義와 國民主義에 토대를 두어야 

    한국사 교과서는 현재의 검인정 제도를 국정(國定) 제도로
    바꾸어야(한국사는 국민교육의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여러 집필자와 여러 출판사의 재량에 맡기기 보다는 정부(교육부)가
    공식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통일된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


  • ▲ 이주영 교수ⓒ정상윤
    ▲ 이주영 교수ⓒ정상윤





    [참고자료]


    역사전쟁에서 友軍을 갖지 못한 대한민국


    현실을 외면한 <민족주의·민중주의 史學>을 극복하고
    국가적 정체성과 헌법적 가치에 적합한 역사학이 출현할 때가 되었다


    1. 대한민국을 옹호할 <국민주의史學>이 없다

    미국의 역사학계에는 국가적 정체성을 옹호하기 위한
    보수적 역사학으로서의 <보수주의 史學(사학)> 또는 <국민주의 史學>이 있다.

    그러한 역사학이 탄생하게 된 것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이상에 토대를 둔 미국적 체제가
    1930~1940년대에 유럽의 공산주의와 파시즘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아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역사학계에는 대한민국을 옹호할 역사학이 없다.
    대한민국은 헌법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그 정체성으로 명시하고 있지만,
    그것의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자유주의史學>,
    <자유민주史學>, <보수주의史學>, <국민주의史學>,
    <국가주의史學>과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日帝(일제)시대부터 내려오는 <민족주의史學>과 <사회경제史學>,
    그리고 그것들의 변종인 <통일史學>, <민중史學>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대한민국은 그의 적대 세력들과 벌이는
    이념전쟁 또는 역사전쟁에서 도움을 받을 友軍(우군)의
    역사학자들을 갖지 못한 위태로운 나라가 되었고,
    그에 따라 建國日(건국일)조차 분명치 않은 애매한 역사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의 애매한 역사적 위치는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의 탄생에 자연스럽게 붙여지는
    建國이란 단어가 대한민국의 탄생에는 적용되지 않고 단순한
    <정부 수립>으로 처리되는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 민족주의가 사회주의도 포용하는 말로 사용되는 현실

    이처럼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이 역사가들에 의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의
    지식계를 지배하고 있는 통일지상주의적인 민족주의 감정 때문이다.

    그것은, 일제시대의 민족주의 운동이 목표로 했던
    민족국가의 건설이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분노에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을 민족국가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른바 <결손 국가>로 폄하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그러한 한국인의 민족주의 감정은
    1987년 9월10일 흥사단 금요강좌에서 있었던
    김대중의 연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해방 이후 42년은… 한 마디로 말해서 민족 발전이 저해된
    그런 42년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민족의 발전을 저해한
    최대 요인은 외세의 간섭이었다고 단언하면서

    우리가 천 소리 만 소리 해도 조국통일이 없으면 민족발전도 없고,
    우리 민족도 자꾸자꾸 뒤떨어져 갑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통일해야 돼요"라고
    함으로써 통일지상(統一至上)주의의 면모를 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민족주의가 주로 통일지상주의로 이해되면
    당연히 그것의 反外勢(반외세) 측면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경제 속에 들어가 있는 남쪽의 대한민국에만
    분단의 책임을 떠 넘기게 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동맹국인 미국을 통일의 장애물인 외세로
    비난하는 反美(반미) 사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만열의 표현에 따르면,
    미국은 처음부터 한민족의 자주성을 침해할 의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해방 직후 남한에서 어떠한 민족자주적
    역할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에서 드러났고,

    무엇보다도 미국이 한민족의 자주성을 제약하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실은 "휴전 후 지금까지 미군이 우리 땅에 주둔해 있는 것"이었다.

    그처럼 미국을 외세로 비판하다 보니 미국의 자유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그것과 대립되는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할 수도 있었다.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민족통일의 명분에서 북한을 품으려하다 보면
    저절로 북한의 전체주의(全體主義)적인 공산주의 체제도 끌어안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민족주의는 계급투쟁의 도구인 민중주의의 의미로도 활용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민족>은 그 구성원 모두를 의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少數(소수)의 엘리트와 
    대립하고 있는 多數(다수)의 민중을 주로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민족주의의 명분만 내세우면 구태여 사회주의 간판을
    내걸지 않고서도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이다. 
       
    3. 남북한이 꼭같이 <내재적 발전론>을 공통분모로 삼는 역사학

    이러한 민족주의를 토대로한 역사학의 중요한 이론이
    이른바 <內在的(내재적) 발전론>이다.

    그것은 김용섭 등에 의해 널리 전파된 이론으로서,
    한국 전통사회 내부에서도 진보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요소들이
    발전해 왔기 때문에 구태여 서양에서 배우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국수주의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그것은 韓末(한말) 유학자들의 <위정척사론>이나
    동학농민운동의 민중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놀라운 근대화는
    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과 자본의 도입과는 그렇게 깊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강만길의 경우처럼,

    "1960년대의 경제성장은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식민지 시기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결과가 아니라,

    中世(중세)시대부터 쌓여진
    우리 민족사회의 문화역량의 결과라고 봐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재적 발전론>의 주장은
    우파 성향의 역사학자들에게서도 꼭같이 나타난다.

    1969년의 <중·고등학교 국사교육개선을 위한 기본 방향> 보고서를 보면,
    그것을 작성한 4명의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합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파 성향의 한우근, 이기백이든, 좌파 성향의 이우성, 김용섭이든,
    모두 민족의 주체성, 내재적 발전론, 민중의 역할을 중심으로
    역사를 써야 한다는 데 합의했던 것이다.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북한의 역사학계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와
    꼭 같이 <내재적 발전론>을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교과서도,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기초 건설은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특수한 사회 경제적 조건과 환경에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노동 계급의 기성 이론이나 다른 나라의 경험을 가지고서는
    우리나라 혁명과 건설에서 제기되는
    이론 실천적 문제들을 옳게 해결할 수 없었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남한의 좌파, 남한의 우파,
    북한 역사학계 3者가 모두 민족주의와 <내재적 발전론>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학에 관한 한, 남북한은 좌우합작의 상태에 있거나
    또는 거의 통일의 상태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는  한말 개화파의 전통에 따라
    <세계화를 통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낼 수 없게 되고,
    그에 따라 서양의 자유주의 문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갖게 된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국가로서 인정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4. 민족주의의 명분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

    이처럼 민족주의적인 감정이 팽배한 사회에서
    남북합작, 좌우합작의 명분이 강조될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래서 조동걸은 분단 이후의 세대가 북한에 대한 애정을 갖도록
    초·중등학교에서 북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국가 차원의 대대적 식량지원을 역설했다.

    그래야만 "후세에 민족적 죄인의 길을 가지 않을 뿐 아니라
    통일이 달성될 시점에서 우리 민족이 북한의 주인이라는 민족의식과
    국제적 발언권을 행사할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만열도 이 시대의 과제를
    <민주화, 자주화, 민족통일로 집약>으로 정의하면서,

    이승만의 北進(북진)통일론에 맞서 대담하게 평화통일론을 내세웠던
    김낙중과 조봉암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개신교 연합체인 한국교회협의회(KNCC)의
    <1988년 통일선언>과 그에 따른 개신교 주도의
    북한 돕기 운동을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정부와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이 통일문제를 민족의 至上(지상)과제로 올려놓은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문제를 더욱 더 심각하게 만든 것은,
    그러한 성향의 역사학을 역대 정권들이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이다.

    <민족적 민주주의>, <민족 주체성>, <국적 있는 교육>의 말로
    민족주의를 강조한 朴正熙(박정희)는 한국학 진흥을 위해
    각급 학교에서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만들고,
    한국학 연구자들과 학생들에게는 막대한 연구비와 장학금을 주고,
    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좌파 성향의 역사가들이 적지 않게 육성되었다.
    全斗煥(전두환)도 독립기념관을 지어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을 지원하고
    육성함으로써 박정희의 그것과 같은 목적에 기여하였다. 

    盧泰愚(노태우)는 남북합작·좌우합작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1989년 9월 그는 국회 특별연설에서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시하면서,
    북한에 대해  <남북연합>을 제의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정의했는 데,

    그것은 국가안보를 책임진 대통령으로서는 전혀 적합하지 않표현이었다.

    1992년의 <부속 합의서>에는
    미군철수를 전제로 하게 될 [정전상태의 평화 상태로의 전환]에 관한
    위험한 조항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金泳三(김영삼)도 <이념보다 민족이 우선>이라는
    民族至上주의의 순진한 입장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였다.

    5. 좌우합작·남북합작을 지나치게 강조한 역사 교과서

    민족주의 감정이 팽배해 있는 우리 사회의
    획일적인 지적 풍토가 잘 드러난 경우가 역사 교과서였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의
    해방 전후사에 대한 설명을 보면,

    지금의 역사 서술이 "있었던 그대로" 서술한다는
    역사학의 임무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1945년의 해방과 분단은 우리 한국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국제적인 힘과 국제관계의 産物(산물)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이 거의 전적으로
    우리 내부에 있었던 것처럼 좌우합작과 남북합작의 노력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당시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좌우합작운동을 벌인
    김규식과 여운형 우익과 좌익에서 소외된  약자들이었다.

    따라서 좌우합작이 성공해도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남북협상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파는 북한 측과 대등한 위치에서
    회담을 한 것이 아니라, 북한 측이 마련한 남북조선諸(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라는
    사실상의 군중대회에 참석한 손님으로 홀대되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남북합작의 또 다른 경우인 미소공동위원회도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1945년 9월 20일자의 스탈린 전문 지시에 따라
    이미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우고,
    <토지개혁>이란 공산혁명을 추진해 북한을 異質化(이질화)시킴으로써
    통일정부 수립을 불가능하게 만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소공동위원회는 애당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형식적인 것이었는데도 역사 교과서들은 그것에 큰 의미를 두고
    길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교과서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1948년의 건국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건국 세력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독립촉성국민회(배은희),
    서북청년회(선우기성, 문봉제) 등과 건국단체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 그들에게 지도력과 자금을 제공한
    김성수, 장덕수, 김준연 같은 한민당 세력들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다.

    또한 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유엔으로 가져가기 위해
    애쓴 임영신과 임병직,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를 UN으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파리 UN총회에서 힘겨운 외교적 노력을 벌인 장면, 조병옥 등의 노력에 대해서도
    전혀 서술이 없다.

    중경의 임시정부가 만든 <건국강령>에 대해서도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소개되고 있다.

    1948년의 建國憲法(건국헌법)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그것이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것의 좌우합작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2011년 새로운 교과서 편찬을 위한 공청회 과정에서 나타난
    <민주주의 對(대) 자유민주주의>의 논쟁도 우리 역사학계의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공산주의를 民主主義(민주주의)로 바꾸어 불러왔다.
    그 때문에 북한의 [민주주의]와 우리의 민주주의를 구분하기 위해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自由民主主義(자유민주주의)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우파 학자들이 제안했는 데, 그것이 반박을 당했던 것이다.

    6. 건국일조차 기념되지 않게 된 이상한 나라

    이와 같은 역사학계의 분위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그 역사적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정체성 위기를 겪게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이 선포된 날인 1948년 8월15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1960년 이후 거의 모든 8·15행사가 1
    945년의 해방 또는 광복은 기념했지만
    1948년의 독립 또는 건국을 기념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1948년의 건국이 있은 지 60년이 되는
    2008년 8월15일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명박 정부가 <대한민국 건국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설치하여
    각종 기념사업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1958년 이승만 정부가 건국 10주년을 경축한 지
    40년 만에 처음 치러진 획기적인 행사였다.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그 같은 기념행사가 추진되어,
    경기도(지사 김문수)는 건국·호국 유공자들을 위한 위안 행사,
    건국 60주년기념 음악회, 그리고 1948년 8월15일에 태어난
    <건국동이> 위안 행사 등이 열렸다.

    그러나 중앙정부 차원의 경축행사는 열리지 못했다.
    강기갑 등 74명의 야당 국회의원과 그에 동조하는 광복회 등의
    민간단체 대표들의 이름으로 정부의 <건국 60주년> 경축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8월15일 당일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세종로 거리에서 주관한 경축식도 순조롭지 못했다.

    바로 그 시간에 그 행사의 취지에 반대하는 야당 국회의원들과
    광복회 같은 사회단체들 및 역사 관련 단체들이 정부 주관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효창공원의 백범기념관에서 1919년 상해에서 세워진
    임시정부의 89주년을 기념하는 별도의 행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7. 1948년의 건국 사실에 대한 잘못된 역사 해석

    이와 같은 행동이 나타나게 된 데는
    대한민국이 1948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1919년 상해에서 세워졌다는 생각,
    즉 <1919년 건국설>로 불릴 수 있는 독특한 역사관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 모두가
    대한민국은 1919년에 상해에서 건국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1948년에 일어난 일은 건국이 아니라
    <정부수립>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을 보면
    국가의 탄생과 관련하여 고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에 대해서는
    [건국]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1948년의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정부 수립]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1948년에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건국을 단순한
    정부 수립으로 폄하하고 교과서에서 건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1948년 8월15일 중앙청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을 세계에 선포한
    행사장에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란 현수막이 걸리고,
    그 이후 건국이란 말과 함께 정부 수립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는 건국 과정의 본질을 벗어난 주장이다.
    1948년에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7년 11월14일 UN총회의 결의를 따른 것으로서,
    건국 과정은 자유총선거, 국회 구성, 헌법 제정,
    그리고 정부 수립의 4단계에 따라 진행하도록 되었다.

    따라서 1948년 8월15일에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는 것은
    마지막 단계의 작업이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건국 과정이 완료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정부 수립은 곧 건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잘못된 역사해석은
    이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간간히 나타나고 있다.

    <미래앤컬처그룹> 출판사가 출간한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출범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라는
    작은 제목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1919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현이
    조선왕조의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된 것이다.

    만일 1919년에 나라가 세워졌다면
    36년간의 독립운동은 왜 필요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3大 요소인 영토, 국민, 주권이 없는 임시정부가
    어떻게 국가일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1948년에 채택된 <대한민국>이란 國號(국호)도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붙여진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1948년 7월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국호가 정해질 때 여러 대상을 놓고 투표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라는
    투표에 따라 결정된 국호였다. 

    8. 국가의 정체성 혼란을 가중시킨 1987년의 개정헌법 前文

    그처럼 편파적인 역사 해석이 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데는 1987년 <6·29선언>의 여파로 이루어진
    제9차 개정헌법 前文(전문)의 영향이 컸다.

    1948년에 제정된 건국헌법의 前文은 대한민국이 기미독립운동의
    <위대한 獨立精神(독립정신)을 계승>해 세워졌다고 밝혔다.

    그것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는
    문구에서 나타나 있다.

    당시 이승만은 건국에 반대하는 김구, 김규식 일파를 끌어안으려는
    의도에서 임시정부와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건국이 된 지 첫 몇 개월 동안은 정부 공식문서에
    1948년을 <민국 1년>이 아닌 <민국 29년>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의 <6·29선언> 직후 개정되어 지금 사용되고 있는
    제9차 개정헌법 前文에는 대한민국이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臨時政府(임시정부) 법통>과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에서 나타나 있다.

    그러한 변화는 변혁을 요구하는 급진적인 물결이
    나라 전체를 휩쓸던 1987년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1987년 제9차 개정헌법 前文의 일부 변경은 경우에 따라서는
    1948년 건국헌법에서 확립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크게 바꿀 위험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48년 12월 이후 國家保安法(국가보안법)을
    운영해 오던 대한민국이 1987년의 헌법 개정으로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하게 됨에 따라 反共國家(반공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임시정부는 1940년부터 김구의 우파와 김원봉의 좌파 사이에
    左右合作(좌우합작)을 통해 운영되어 왔으므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것은
    반공국가로부터 좌우합작 국가로 바뀌었다고 해석될 수 있고,
    그에 따라 국가보안법도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1987년에 헌법 前文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했다]는
    건국헌법 前文에도 없었던 새로운 문구를 새로이 넣은 것은
    당시의 변혁을 요구하는 급진주의적인 시대 분위기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성급한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서 공산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국가로부터 건국유공자로 예우를 받게 되었지만,
    정작 해방 직후의 1945~1948년 기간에
    서북청년회, 대동청년회, 전국학련 등과 같이 좌익들의 폭력에 대항해
    건국 투쟁을 벌였던 건국 세력들에게는 아직까지도
    건국유공자의 영예가 주어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현행 헌법 前文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했다는
    문구가 들어간 것은 임시정부의 상징인 김구의 원래 생각과도 맞지 않는 것이다.

    1948년 5월31일 제헌국회 의장인 이승만이
    곧 새롭게 건국될 나라가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에 대해 김구는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8월15일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세계에 선포하게 되었을 때,
    진정한 민족주의자로서 분단을 애통해한 김구는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김구는 1948년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와 연관시키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가 국가로 생각했던 것은 남북이 통일된 민족국가였던 것이다.

    1987년에 제9차 헌법 개정 당시 헌법 前文에 <임시정부법통 계승>의
    문구를 넣는 과정에서 정치적 역할을 했던 인물들은 헌법 개정 대표위원들이었다.

    여당인 민정당 측에서는 이종찬 의원, 야당인 신민당 측에서는
    이중재 의원이 대표로 참여했고,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총책임자의 역할을 맡았다.

    그들을 학문적인 입장에서 설득한 사람은
    역사가인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었음이 그의 책을 통해 알려졌다.
     
    9. 대한민국 국가주의에 토대를 둔 ‘자유주의史學’이 정립되어야

    대한민국은 헌법 4조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표방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역사학의 主流(주류) 자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대변하는 <자유주의史學>이 차지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불행히도 主流의 자리는 엉뚱하게도 대한민국에 적대적인 좌파성향의 역사학,
    즉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에 토대를 둔 <민족주의史學> 또는
    <민중‧통일史學>이 차지하고 있다.

    북한인들이 자신들을 <한민족>이 아닌 <태양민족>,
    <김일성 민족>으로 부르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민족의 개념에 입각해 남북 문제를 생각할 수는 없게 되었다.

    민족주의적인 역사인식은,
    1945년의 해방 이후 남·북한인들의 생활방식,
    즉 文明(문명)이 크게 달라진 사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은 중국 중심의 大陸文明圈(대륙문명권)에
    그대로 남아 있는 북한과는 달리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적인 海洋文明圈(해양문명권)에 편입된
    <문명사적 전환>이란 대혁명을 겪은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 즉 헌법적 가치에 적합한
    역사학이 출현할 때가 되었다.

    그러한 역사학은 우선 舊韓末(구한말) 개화기에
    위정척사파에 맞서 근대화 운동을 추진하려 했던
    開化派(개화파)에 대한 재평가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라 선진국 문물의 도입을 통한 富國强兵(부국강병)을 의도했던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이승만, 이상재, 남궁억과 같은
    자유주의적 선각자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일제시대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선진적인 해양문명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한
    윤치호, 김성수 같은 선각자들을 재평가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개화파 전통>에 속하는 이 인물들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 기여한 건국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등장할 초석을 놓은
    새로운 엘리트였다.

    새로운 엘리트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명분 앞에서 친일파로 매도당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새로운 역사학은 建國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그러한 누명을 벗을 수 있도록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현실을 정확히 국민 대중에게 알리는 작업에
    우선적으로 힘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