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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일까? 정말일까? 정말일까?’
"90년대 초반부터 남한 라디오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북한에선 워낙 선전매체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포장해 방송한다. 언론은 원래 그런 것으로 알고 있었고, 당연히 남한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만난 황모 씨는 대북 라디오 방송을 들었을 때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아니 저런 말도 방송에 나올 수 있어?’
"KBS라디오 사회교육방송이었나. 탈북자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했다. 진행자와 탈북자간에 대화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정말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있었다."
"북한에선 방송에 나가면 틀에 짜여진 각본대로 시키는 말만 한다. 방송을 자주 접하다보니 ‘선전이나 각본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한 방송을 믿게 된 황 씨는 고민 끝에 탈북을 결심한다.
"민간단체 대표가 방송에 나와서 '5,000원이면 북한 주민 한 사람을 한 달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다'며 빵 공장을 차렸다고 한다. 큰 감명을 받았다. 북한은 인민을 위한 국가라고 했는데 정말 그러했는지 다시 반문하게 됐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중-북 국경지역의 밀무역 업자였다. 북한의 송이버섯을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 구입한 남한 상품을 북한에 팔았다.
"시장에서 인기상품은 남한 상품이었다. 상인들은 단속을 피하려고 한글로 씌어진 품질표시 등을 제거한다. 북한 주민들은 품질표시가 제거된 상품을 보면 암묵적으로 ‘남한 상품’이라고 생각했다."
밀무역에 종사하다보니 그는 북한 군인들과 친분이 있었고 경비들의 묵인 하에 탈북했다.
"중국 연길에서 보름 간 숨어지냈고, 브로커를 통해 사막을 건너 몽골로 갔다. 그곳에서 2달 정도 머물다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그는 국회 앞에서 "탈북자는 변절자가 아니다. 임수경 사퇴하라"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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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 있을때 ‘탈북자’를 어떻게 생각했나?
"비참하다고만 생각했다. 특히 부모님을 통해 잘 알던 장교 분께서는 ‘변절자(북한에서 탈북자를 지칭)의 비참한 말로’라며 다큐멘터리를 보여준 적이 있다."
<안기부(현 국정원)에서 처음에 회유를 한다. 여자를 통해 돈을 다 빨아먹고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대북비방을 시킨다. 그러다 다시 간첩으로 북한에 파견한다. 만약 본인이 응하지 않으면 탈북자는 모두 죽는다.
하지만 남한에서 올라온 탈남자는 집도 주고 대학도 보내주고 결혼도 시켜주는 등 정말 모든 것을 보장해준다.> - 다큐멘터리 내용- 남한 방송의 영향이 큰가?
"크다. 그 때문에 탈북을 결심한 친구들이 상당히 많다."
- 그만큼 접하기 쉬운가?
"내가 있을 때도 상위 30%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지금 한국에 있는 탈북자들 대부분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시장 상품도 남한 상품이 많다. CD, 드라마, 음악 등 남한 것을 많이 보고 듣는다. 최근 간접적으로 연락이 되는 친구들에 소식을 묻고 그랬는데 이제는 대부분이 접할 수 있다고 한다."
- 왜 북한 당국에선 제제하지 않을까?
"제재를 하긴 한다. 문제는 제제를 하는 사람들도 남한 상품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북한 보위부 직원이 우리와 거래를 많이 하는데 남한 CD를 회수했으면 다량으로 우리에게 다시 팔고 이득을 챙겨간다. 우리한테 의뢰를 해서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주문해 본다. 가끔 보위부 직원이 ‘이런 검열이 들어오니까 잠깐 몸 피했다고 오라’고 하기도 한다."
- 몇몇 직원만 그런 것 아닌가?
"아니다. 중앙 방침이 하부에 내려오면서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집행자 자체도 ‘이건 아니다’란 인식이 강하다. 당시에도 보위부 직원들이 하는 얘기가 ‘북한 정권은 얼마 남지 않았다. 빨리 무너졌으면 좋겠다’였다.
자기들도 기존에 보장된 생활이 더 이상 유지가 안되고 본인들이 알아서 생활해야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상부로 올라가면 남한 소식을 훨씬 더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는게 많으니 사회적인 불합리와 부조리를 훨씬 더 느끼고 있지 않을까.
평양에서 무역회사를 했던 대표는 내게 ‘상부 쪽에선 정말 어느 순간에 목이 잘릴지 모르니까 함구하고 있지만 불만이 더 많다. 외부 접촉이 더 많기 때문에 사회 불만이 훨씬 더 크다’ 고 한 적이 있다."
- 남한 소식을 제대로 전해주는게 중요해보인다.
"사실 지금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탄압 당사자들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게 최선의 방법이다. "
- 북한 반발을 일으키니 남북교류를 해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90년대 후반 햇볕정책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북한이 망했을 수도 있다. 지금 상황이 벌어진 가장 큰 책임은 햇볕정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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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5공동선언 4주년을 맞아 당국과 민간차원에서 6.15공동선언 정신을 잇는 각종 기념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사진은 2000년 6월13일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 공항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 연합뉴스
- 햇볕정책 이전 분위기가 어떠했는가?
"통제기능 자체가 상실됐었다. 그래서 주민들도 '좀 더 있으면 뭔가 일이 나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길거리에 시체들이 방치돼 있었다. 기존 같았으면 이미지 문제 때문에 바로바로 치웠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시체가 즐비했고 며칠씩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또한 집집마다 보위부 직원들이 숙박검열을 하고 보고하고 그랬었는데 그런 기능자체가 없어졌다. 배급도 안나오고 공장은 다 문닫고….
- 햇볕정책 이후엔?
"그러다가 2000년도 들어서면서 단속이 강화되고 통제가 다시 시작됐다. 가끔 있던 ‘공개처형’도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북한 정권이 분위기를 잡아갔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랐다.
한국에 오고 나서 알게 됐다. 햇볕정책으로 북한에 식량이 지원됐다는 것을. 그 지원품으로 관리자들, 정부 공무원들 배급과 월급을 주며 통제기능을 다시 회복한게 아닌가."
- 대부분의 탈북자들도 햇볕정책을 그렇게 생각하나?
"다들 ‘북한에 식량지원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있을 때 실질적으로 도움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 쌀 값을 하락시키지 않았느냐. 남한 쌀포대를 보고 대한민국 글자를 보고 간접효과를 보지 않겠느냐.’
이런 주장들도 있는데 그건 미사일로 참새를 잡으려는 것이다. 투자에 비해 너무나도 효과가 미비하다."
- 대북방송·전단을 더 효과적으로 보나?
"그렇다. 북한 상황을 잘 모르고 하는 말들이 너무 많다. 북한 눈치를 봐서는 안 된다. 대북방송·전단에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북한 정권에 가장 큰 독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정보가 가장 큰 독이다. 북한 정권의 실상을 잘 아는 탈북자들이 전해주니 북한 사람들에겐 실질적인 정보다. 그래서 민감하게 반응한다."
- 야권에선 반대한다.
"야권 쪽 사람들의 백분토론, 토크쇼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남한에서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은 북한 정권에서 선전하는 그 내용대로 말한다. 대한민국을 뒤흔들려는 적국의 논리를 따라하는데 그건 종북이 아니라 간첩이다. 그걸 지적하는게 어떻게 ‘색깔론’인가.
야권에선 국가보안법 철폐하라는 얘기도 하는데 북한에서도 많이 들었다. 한국에 와서 보니까 일반 사람들은 그 법에 저촉될 일이 없다. 국가를 지키는 초보적 울타리를 왜 폐지하려하나. 공산주의 사상침투나 적화통일 방지위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 북한 인권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은?
"남한 사람들에 북한 인권을 많이 알려주고 싶다. 학교에서 북한인권사진전-학술세미나 등을 준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초등학교나 고등학교 등에서 북한인권과 현실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한국외대가 ‘종북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학교가 정말 통일을 위해 탈북자 출신 청년을 많이 받고 지원도 많이 해주고 있다."
- 탈북자들이 북한 인권에 잘 나서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나도 아쉽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정치적으로 받은 상처가 너무 크다. 그런 부분에서 적극적이지 못하지 않나. 마음에는 한결같이 정말 잘못됐다고 개인적으로 애기하지만, 그게 비춰지면 어떤 피해를 입을지 두려워한다. 국민 여론도 사실 무시할 수 없고. 우리는 소수자니까…. 극복해야 할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