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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외심친 일편운간명월(三千里外心親 一片雲間明月)'
함경도에서 벼슬살이하던 조선전기 문인 양사언이 한양에 살던 친구에게 써서 보낸 편지 내용이다.
`삼천리 밖에서도 달을 보며 당신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친구와 가족을 만날 수 없는 절절한 외로움과 간절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추석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날만 되면 어김없이 슬픔에 빠져드는 이들이 있다. 이산가족 1세대가 바로 그들이다.
올해 103세로 8만 여명(상봉 신청자 기준)의 이산가족 1세대 중에서도 최고령에 속하는 송한덕 할아버지(1908년 4월 출생)도 이맘때만 되면 고향 생각이 간절해진다.
현재 충남 아산에 사는 송 할아버지의 고향은 개성 부근 장단. 5형제 중 차남인 그는 1951년 1·4 후퇴 때 세 동생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그는 12일 기자에게 "큰형이 부모님 역할을 대신해왔는데 그때 가족이 많아 같이 오지 못했다"며 형제가 이별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했다.
4형제는 남한사회에 잘 정착했고 송 할아버지는 슬하에 3남2녀를 뒀다. 그는 "증손자까지는 봤는데 아직 고손자는 못 봤다"며 허허 웃었다.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함께 피난왔던 동생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 이제는 송 할아버지만 남았다. 그러나 큰형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작은 희망을 품게 된 것은 2000년 이산가족 상봉이 본격화되면서부터. 그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신청서를 써냈다. 당시 송 할아버지는 90세가 넘었다.
그는 "큰형은 세상을 떠났겠죠. 조카들이라도 만나야 하는데. 70∼80살 정도씩 됐을 겁니다"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10년이 넘도록 상봉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 후에도 두 번 정도 신청서를 냈지만 큰형의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송 할아버지는 2005년 8월 현대아산이 하루 일정으로 마련한 개성시범관광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 개성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아 눈으로만 고향 풍경을 담아와야 했다.
송 할아버지는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장단은 개성에서 50리 북쪽" "아마도 해방될 때 (당국에서) 다른 곳으로 가족을 이사보냈을 것"이라는 말만 되뇌었다.
작년까지 건강하다 요즘 무릎이 아프다는 송 할아버지는 "그래도 여기 아산시에서는 내가 나이가 많으면서도 제일 건강하다고들 한다"며 웃었다.
상봉통지가 오면 나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는 "천천히 지팡이를 짚고라도 갈 수 있다"며 기대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게 되겠느냐. 내가 70∼80살만 됐더라도 희망을 품고 기다리겠는데"라며 금세 실망감을 보였다.
만약 큰 형님을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형님을 만난다고요?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울고불고…."
이산가족 상봉을 주도해온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상봉 신청을 낸 이산가족 1세대는 모두 12만여 명으로 이 중 4만6천700여 명이 상봉의 날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8만2천명 안팎의 대기자가 언제 올지 모를 자신의 상봉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정부는 이산가족상봉을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인도적인 과제로 보고 있지만 남북관계 악화로 1년째 중단된 상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