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던 해공 선생5일 오전 11시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선생의 뜻 기려
  •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을 하지 않았을 것’

    해방 전까지는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혼란스런 시기 속에서 국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정치인이 있었다. 바로 해공 신익희 선생이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4일 “해공 신익희 선생 55주기 추모식이 5일 오전 11시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남덕우)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신익희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내무․외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는 국회의장으로서 의회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으셨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외친 '단성보국(丹誠報國. 일편단심으로 오로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자)'이라는 말은 1990년 독립기념관의 표석으로 남아 있다. 

  • ▲ 1919년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앞줄 중앙 안창호 선생 왼쪽이 신익희 선생이다.
    ▲ 1919년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앞줄 중앙 안창호 선생 왼쪽이 신익희 선생이다.

    신익희 선생(1892. 6. 9~1956. 5. 5)은 경기 광주(廣州)에서 출생,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1913년 귀국해 고향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다. 이후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교수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 연락업무를 맡았으며, 그 해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고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법무차장, 내무․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임시정부를 통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을 겸했고, 1947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장, 1948년 제헌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여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때는 국회의장이 됐다.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民主黨)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유세 중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5일 추모식은 박희태 국회의장,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양정규 대한민국 헌정회장, 이성우 국민대총장과 학생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식은 남덕우 기념사업회 회장의 개식사, 신상식 기념사업회 이사의 약력보고, 국회의장·국가보훈처장․대한민국 헌정회장·국민대 총장의 추모사와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