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전 11시 서울 수유리 묘전에서 기념사업회 주최로 추모식 열려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해공 신익희 선생 57주기 추모식>이
    5일 오전 11시 서울 수유리 묘전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남덕우)>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추모식은 정양성 보훈처 차장, 김유길 광복회 부회장, 목요상 헌정회장, 유지수 국민대 총장,
    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덕우 기념사업회장의 개회사, 김충환 前의원의 약력보고,
    보훈처 차장․광복회장․헌정회장․국민대 총장의 추모사,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된다.

  • ▲ 이승만 대통령(우측)을 만나 국정운영을 의논하는 신익희(좌측) 선생. 그는 반공우파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 이승만 대통령(우측)을 만나 국정운영을 의논하는 신익희(좌측) 선생. 그는 반공우파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해공 신익희 선생은 임시정부 때부터 광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한,
    대표적인 반공우파 정치인이다.

    신익희 선생은 1892년 7월 11일 경기 광주(廣州)에서 출생했다.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귀국해
    고향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다.

    이후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교수가 됐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해외 연락업무를 맡았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탄생을 위해 활동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법무차장, 내무․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1945년 12월 귀국한 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現국민대)> 초대학장을 역임했다.

    1947년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의장을, 1948년 <제헌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해 위원장에 취임했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국회의장을 맡았다.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民主黨)>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 최고위원이 됐고,
    1956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지만 선거유세 중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