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본명은 물론 별명도 있다. 특히 별명의 경우에는 내가 불러달라고 해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의외모, 성격, 습관 등을 보면서 일방적으로 붙인다. 별명 중에는 나의 단처(短處)를 꼬집고 부각시키는 것들이 많아 가슴앓이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물론 이런 문제는 사적인 것이다.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적인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이름으로는 부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론의 장이라면 다르다.
    ‘공적이성(public reason)’을 지향하는‘공론의 장’에서 잘못된 이름이나 거품성 용어들이 범람하는 것은 단연 경계해야할 일이다.
    그 교언영색(巧言令色)의이미지로 인하여 담론 자체를 오도하는가 하면, 담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불필요하거나 심각하기 짝이 없는 혼란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바른 이름붙이기의 중요성, 즉 정명(正名)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다워야 한다’는 것이 정명의 핵심이라면, 아버지가 아버지다울 때 아버지가 되는 것이고, 자식이 자식다울 때 자식이 된다.
    자식이‘원수’처럼 행동하는데 어떻게 자식이라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한국의 좌파가 ‘진보’라는 말에 어울릴 만큼 ‘진보답게’ 행동했는가.
    오히려 그이름에 거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행동을 고치지 않고 이름만 고치려고 하는 것은 작명가를 찾아가 이름만고쳐 출세해보겠다는 필부의 속물적 근성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일찍이 오캄(William Occam)이 ‘유명론(唯名論,nominalism)’이라고 불렀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좌파세력은 자신들을‘진보’로 불러달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요구해왔다.
    ‘좌파’라는 말을 쓰면“또 색깔론이 등장했다”고 난리다.
    좌파쪽에서노정하는 그런 불만은 근거가 없다. 진보는 보수에 비해 긍정적인 함의를 갖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 말을 좌파가 독점해야하는 것인가.
    프랑스 혁명의회의 역사를 보면 진보·보수보다 좌파·우파가정확한 말이고 또 중립적인 말이다.

    좌파·우파의 개념과 진보·보수의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확연한 사례는 1990년대의 소련과 동구의변화였다. 1990년대에 이르러 공산주의가 붕괴되었을 때, 보수와 진보의 개념이 좌파와 우파의 개념과는 일치하지않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즉,소련사회에서‘보수’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공산당과 그 추종세력을 일컬었고, 공산주의 체제를 혁파하려는 민주세력은‘진보’로 자리매김했다.
    이와같은 현상은 동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좌파를 적어도 일률적으로 ‘진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특히 80년대의 NL이나 PD 범주에 구태의연하게 머무르고 있는 ‘친북좌파’나 ‘종북좌파’의 경우처럼 진보하지 않는 세력 혹은 헌법적 가치에대한 존경심도 없고 세계사적 흐름이나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세력을‘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동안 우리가소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피땀 흘리며살아온 가치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헌법에 규정된 인간의 기본적 권리 등 인권이나 문명사적 가치에 둔감한 좌파 혹은 문(文)·사(史)·철(哲)의 기본적 교양을 갖지 못한 구태 좌파를 ‘진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마치‘검은 백조’라는 말처럼 모순적표현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총선과 대선에 참패했으면서도 반성문 하나 쓰지 않고 버티며 폭력시위를 광장민주주의라고 하면서 투표에서 잃은 것을 길거리에서 줍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좌파 중에도 ‘극좌’의 행태인데, 이런 행태를 두고 어떻게‘진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좌파’로 불리는 현실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행태를 고치는일부터 서두르는 것이 중요하다.
    ‘진보’를 유명론의 범주로 격하시킨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그들 자신의 탓이다.
    한국 좌파의 문제는 지독한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고 생각하는 것들 사이에 괴리가 생길 때 나타나는 것이 인지부조화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부자가 된 사람에 대해서는 강한 혐오를 드러낸다.

    자신의 자녀는 미국으로 유학 보내면서도 미국산 쇠고기, 미국과의 FTA 등 미국적인 모든것이 증오의 대상이다. 자신의 자녀가 전교조 교사 밑에서 지도받는 것을 꺼리면서도 전교조에 대한 지지는 강렬하다.
    북한에 가서 살기는 싫어하면서도 ‘친북주의자’나 ‘종북주의자’로 처신하고 있다. 이들 행태는 자기 식당의 불량식품을 손님들에게 팔면서 자신의 식구들에게는 먹지 말라고 하는 양심불량의 식당 주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일련의 ‘인지부조화’현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현저한 것은 대한민국의 좌파로 살면서 그것을 가능케한 대한민국의 성취는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와 인권, 시장과 민주주의가 꽃피는 나라이기에 좌파로서 권력도 10년 동안 잡는 등 왕족처럼 살아온 것이 아닌가. 북한이라면, 김일성·김정일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국정을 책임지는 세력이 된다고 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런데도 2008년 건국 60주년을기념하는 일에 대해서는 한사코 비판적이었고 냉소적이었다.
    권력의 특혜란특혜는 다 누리면서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기초가 된5·10선거를 국민 대다수가 반대했다고강변하기도 했다.
    차라리 그런 정부 하에서 대통령을 하지 않았다면 좌파의 절개라도 보존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흔히 고층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이 헬멧을 쓰지 않아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것은 단순한 안전불감증 때문이 아니다.
    위험한 것과 일하고 있는 것 사이에인지부조화가 발생했을 때 자신의 일터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헬멧을 쓰지않음으로써 자신에게 확신시키려는 것이다.
    이처럼 좌파도 건국이 어떤 것인지, 북한이나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면서도 그 진실을 받아들이면 그 동안 좌파로서 투쟁해오던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까봐 건국무익론, 반미주의, 친북주의, 종북주의를‘근본주의자’처럼 고집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그러한 좌파를‘진보’로 부르는 것이‘정치적 올바름(politicalcorrectness)’의 한 표현이라고 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진보나 보수는‘이념’이 아니라‘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에‘우파’도‘진보’가 될 수있고‘좌파’도‘보수’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좌파를 ‘진보’로 부르는 것은 부정확하다.
    뿐만 아니라‘진보’라는 말은 좋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그 좋은 말을 좌파가 독점할 수는 없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진보는 본명보다는 별명과 같은 것이다.
    진보라고 불리기를 바란다면‘건강한 좌파’로 행동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행동은 ‘퇴보’처럼 하면서‘진보’로 불리기만을 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선 북한 인권에 대한 자신의 입장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문명국의 시민들이 북한의‘죽음의 수용소’에 대하여 그리고 김정일에대한 1인숭배에 대하여 치를 떨고 있고머리를 흔들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채 오히려 남한의 인권이 잘못되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문제를 삼으니, 어떻게‘진보’라고할 수 있을 것인가.
    또 한동안‘반전 반핵’을 외치면서평화주의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북한이 핵을 갖고난 다음부터 교묘하게‘반핵’을 빠뜨리고 ‘반전평화운동’으로 바꾼 이상한‘친북주의자’와‘종북주의자들’의 행태를 보면서 어떻게‘진보’라고 부를 수있을 것인가.
    한국의 좌파가‘진보’가 되려면 변해야 한다.
    ‘진보연대’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진보하지 않은 좌파들끼리 연대하여법치를 무시하고 대중동원으로 힘을 과시하면서 참여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기 전에 자기 기만을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2008년 출범한지 수개월도 안된 정권초기가 아수라장이 된 데는 이명박정부의 잘못이 크지만, 대선에서 참패하고도 권력 금단현상을 극복하지 못해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대선불복종으로일관하면서 제대로 된‘실패학’을 쓰지못한 좌파의 잘못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물론 좌파를‘진보’로 세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좌파의 미래가 없다.
    자신들의 주장과 행동에서‘인지부조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또 자신이 불리워지기를 원했던‘진보’라는 말에 거품이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진정한 진보’가 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하는 문제를 정상적으로 풀어가고자 하는 진솔한 의지를 가질 때, 비로소 건강성이 담보되는 좌파의 길이 열릴 것이다.

    <대한언론인회보 5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