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 '김순덕 칼럼'란에 이 신문 김순덕 논설위원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요즘도 ‘천년만년 살고 지고’ 할 사람이 있을까만 1만 년도 아닌 20만 년 동안 지구를 지배했던 종족이 있다. 구석기시대 살았던 원인(原人) 네안데르탈인이다. 현대인 못지않게 영리했다던 네안데르탈인이 경쟁자를 만난 지 1만년도 안 돼 멸종했다. 4만 년 전 등장한 인류의 조상 호모사피엔스에 패해서다.

    호모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이 못하는 걸 할 줄 알았다. 교역과 분업이다. 자유무역과 노동 분업이 번영을 가져온다고 설파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바로 호모사피엔스의 후예였다. 시장경제의 DNA가 우리 몸속에 박혀 있는 셈이다.

    ‘타고났다’는 말은 때로 얄밉게 들린다. “어쩜 그렇게 피부가 고우냐”는 찬사에 피부는 타고났다는 답이 오면 “잘났어” 싶어지는 게 사실이다. 인간의 공통된 본성이 따로 있다는 이론은 그래서 환영 못 받는다. 타고난 유전자에 따라 개인의 기질과 특성도 달라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봉변한 학자가 적지 않다. 

    인간 본성이 시장경제와 맞는다고 하면 반(反)시장주의자들에게 칼 맞을지 모른다. 이기적 인간성, 경쟁적이고 물질적인 사회야말로 그들에게는 개혁 대상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역사란 인간 본성 변형의 기록이라고 했다.

    영국의 공공정책학자 콜린 탤벗 교수도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당연히 인간 본성은 없다고 봤다. 그러다 뇌신경과학, 진화심리학, 사회생물학에서 쏟아지는 연구를 보고 인간을 ‘재인식’했다. 그는 “인간 본성이 호모사피엔스시대 그대로임을 부인할 수 없다”며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인간 본성에 근거한 정책도 위계질서가 있다. 첫째가 시장을 키우는 성장정책이다. 네안데르탈인의 퇴장도 교역과 분업을 안 하고 못해서였다. 투기 방지 등 정치적 목적에서 나온 특수한 정책은 생존의 문제 다음에 와야 한다. 

    사방이 꽉 막힌 교도소에서 담배를 사고파는 일이 생기는 것도 인간의 못 말리는 시장정신 때문이다. 옛 소련은 암시장을 막지 못하고 무너졌다. 문화혁명으로 자본가정신을 뿌리 뽑으려던 중국은 거대한 자본주의 국가가 됐다. 인간성을 개조해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리더는 전체주의 독재와 대량학살 끝에 사라졌다고 역사가 일러 준다.

    1960년대 말 홍위병으로 날뛰었던 중고교생 27명은 지금 기업가 교수 전문직 종사자가 돼 물질적 성공을 누리고 있다. ‘신(新)중국 마오의 아이들’이란 책에 나오는 대목이다. 사업을 하는 우샨렌 씨는 “돈이면 권력도 산다”고 자랑했다. 4만 년을 이어져 온 호모사피엔스의 본성이 유한한 권력에 흔들릴 리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동산정책에선 시장 원리 가지고 헷갈리게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양극화 극복을 위해 시장 논리를 넘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던 이정우 전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의 소신은 여전히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뼈대다. 주택시장을 통제하고 기업 출자를 제한하는 ‘시장 초월’ 정책이 성공한다면 호모사피엔스 화석이 놀라 일어설 일이다. 

    시장엔 이기심과 경쟁, 효율성만 난무하지 않는다. 오는 정 가는 정의 호혜(互惠)와 협동, 정의가 살아 있어 시장도 굴러 왔다. 이런 ‘미덕의 기원’이 신뢰다. 노무현 정부는 시장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자본인 신뢰까지 허물고 있다. 

    화폐와 문서 없이 교역했던 호모사피엔스 시절부터 부정(不正)에 예민한 것이 인간 본성이다. 거짓말과 사기꾼을 눈치 채는 본능도 여기서 비롯됐다. 손해 보는 한이 있어도 규칙 위반자는 반드시 찾아내 벌줘야만 그 사회의 신뢰가 유지된다. 

    노 대통령은 측근이면 어떤 죄를 지었어도 금방 사면하고 등용하는 행위로 인간 본성을조롱하고 있다. 코앞의 과거를 뒤집으면서 먼 과거부터 바로 세우겠다는 사회에선 미래의 시장도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