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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올해 신년연설은 경제문제로 할애됐다. “지난 3년간 고생 많으셨다. 송구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내수가 살아나고 있기 때문에 체감경기도 좋아질 것이다”는 노 대통령의 말은 그동안 ‘삶의 무게’에 짓눌린 서민들을 위무하기에 충분했다. 서민 대통령, 친근한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임기 안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멀리 내다보고 할 일을 뚜벅뚜벅 해나가겠다”는 맺음말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결연한 정치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노 대통령은 중간매체를 통하지 않고 국민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신년연설을 십분 활용했다. 그리고 연설은 ‘희망의 메시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희망의 메시지는 장밋빛 환상에 가깝다. 이내 기대가 우려와 비관으로 바뀌게 된다. 우선 노 대통령의 현실 인식에서 자기성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자화자찬을 넘어 오류가능성을 배제하는 ‘무오류의 오만’이 읽혀진다. 그리고 미래 전망이 지나친 낙관에 기초해 현실성이 부족하고 더욱이 처방과 정책지향이 시대역행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양극화와 저성장’간의 인과관계 도치
신년연설의 키위드는 양극화 해소이다. 양극화가 지속되면 우리 경제가 장기적으로 ‘저성장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극화 해소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관건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이다. 이는 양극화가 심화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데서 문제해결의 단서를 찾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양극화 문제’를 지적했을 뿐 왜 양극화가 심화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IMF외환위기 이후 가시화된 양극화 현상은 참여정부 들어 더욱 뚜렷해졌다. 참여정부 출범 첫해인 2003년부터 2005년(1~9월)사이의 월평균 가구소득 증가율을 소득계층별로 비교해 보면, 최하위 20% 가구소득 증가율(7.9%)이 최상위 20% 가구소득 증가율(11.2%)보다 크게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득배율을 기준으로 해도 마찬가지다. 2003년의 최상위 20% 가구소득은 최하위 20% 가구소득의 7.1배였으나, 2005년에는 그 값이 7.3으로 확대되었다. 이 같은 양극화는 참여정부의 잘못된 국정 운영의 결과로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경제침체가 길어지면서 심화된 것이다.
지속적 경제 침체의 직접적 원인은, 수출은 유례없는 호조를 보였음에도 투자와 소비를 포함한 내수가 극도로 부진했기 때문이다. 수출 실적이 설비 투자와 소비 확산으로 연결되지 않아 고용과 소득 면에서 상당한 ‘기회 손실’이 발생했고, 이 같은 손실을 저소득층이 주로 부담해 양극화가 심화된 것이다.
간단한 모의실험을 통해 이해를 돕고자 한다. 우리의 경제규모(2003년 명목 국내총생산은 725조원)를 감안할 때 1%의 성장률 감소는 7조원 이상의 소득 ‘기회손실’을 유발한다. 국내총생산 중 월급(피고용자보수)의 비중을 45%로 잡으면, 1% 저속성장으로 연간 3조원의 월급이 날아간다. 이는 연봉 2000만원의 일자리 15만개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수출경기와 내수경기의 양극화는 수출과 내수부문에 속한 근로자의 소득 양극화로 나타나게 되며, 소득과 고용의 기회손실은 대부분 내수부문이 떠안게 된다. 결국 ‘저성장’으로 인해 양극화가 심해진 것이다.
이는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성장률을 높여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양극화 해소를 위해 분배를 중시해야 한다는 참여정부의 주장은 정책인식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조세제도를 개혁해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정책사고도 사실은 같은 맥락이다.
참여정부 들어 내수부진에 시달린 것은, 정치과잉과 이념과잉이 투자심리와 기업가정신을 위축시켰기 때문이다. 경제는 복잡해 보이지만, ‘심리’와 ‘흐름’ 그리고 ‘유인’의 문제로 귀결된다. 따라서 불확실성을 없애 경제심리를 안정시키고 경제자원의 흐름이 순조롭도록 시장 친화적 경제정책을 구사하면 된다. 그리고 시장기회를 포착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완화하면 경제 유인이 커져 경제 활력이 살아나게 된다. 양극화는 성장을 통해 완화되는 것이 ‘정책 순리’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연설에서 이 같은 정책 시각은 발견되지 않는다.
경제는 기복이 있기 때문에 성장률에도 기복이 있다. 그러나 잠재성장률을 계속 밑도는 경제성장률 실현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저성장의 원인에 대한 냉정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는 “인위적 경기부양 대신 경제체질 개선을 통해 지속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식의 자기합리화에 함몰되었다. 노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면, 원칙대로 일관성 있게 장기적 안목으로 경제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성장을 대가로, 경제체질이 개선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리고 미래성장 동력을 갖춰 지속성장의 틀이 마련되었는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양극화란 말은 자제되어야 한다. 어느 사회나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방글라데시에도 부자가 있을 수 있으며, 쿠웨이트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다. 따라서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양극화보다는 빈곤층에 대한 배려를 강화하는 데 정책적 초점을 두어야 한다. 정책적 관심은 빈곤층의 생활형편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개선되어지는 여부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이동’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 양극화는 ‘이분법적’ 정책접근이 아닐 수 없다. 양극화의 지나친 강조는 정치적 대립구도를 형성하기 위한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는 의구심을 살 수도 있다.
좌파적 경제운용: 큰 정부와 작은 시장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좌파정부 논란은 여러모로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의 재정규모가 GDP대비 27%로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 준거로 들었다. 그럼에도 참여정부 경제운용은 ‘좌(左)편향’임을 숨길 수 없다. 역사적으로 좌파는 인간의 이성(reason)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왔다. 좌파에게 인간의 이성은 “대문자 R로 시작되는 이성”인 것이다. 그들의 눈에 ‘자생적 질서’로서의 시장은 무질서하고 비윤리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성에 기초를 둔 정부 조직을 통해 시장을 통제․관리함으로써 윤리적이고 이상적 사회를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왔다. 참여정부는 이 같은 지적조류를 따라 출범부터 ‘큰 정부’를 지향했다. 큰 정부는 ‘작은 시장’과 정책조합을 이루게 될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작은 정부 대신 ‘일하는 정부’ ‘효과적인 정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큰 정부의 명분은 ‘대 국민서비스 확대’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정부의 역할 확대는 ‘시대정신’으로 포장된다. 기득권 위주의 경제 구조를 바꾸고 성장과 분배의 새로운 틀을 짜는 것이다. '균형, 분배, 형평, 복지, 약자 보호, 양극화 해소'가 그 핵심이다. '도덕적이고 온정적이며 일하는 정부'는 이처럼 시장위에 ‘군림’해 왔다. 이처럼 노 대통령이 ‘큰 정부’에 확신을 갖는 한, 친시장, 친기업 정책은 구사되기 어렵다. 큰 정부는 민간의 활력을 저상(沮喪)시킨다.
노 대통령은 2030년까지 장기재정계획을 세워보면, 아무리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지출구조를 바꾸더라도 재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했다. '톱 다운' 예산을 도입해 예산을 절약하고 거래의 투명성을 높여 탈세를 막더라도 이러한 조치로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주장을 했다. ‘복지국가’를 상정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경제를 이미 성숙단계의 서구 복지국가와 ‘수평 비교’하면서, 이들 국가의 재정운영을 벤치마크하겠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노 대통령이 예로 든 나라는 모두 복지 부문의 과잉 팽창에 따른 재정의 경직성 때문에 경제가 활력을 잃고 실업자가 양산되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정권교체의 진통을 겪으며 ‘우(右)편향’을 꾀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리고 임기 2년 남은 대통령이 2030년의 장기재정계획을 세운다는 것도 비현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공부문을 통한 일자리 창출: 일자리는 기업이 만든다
노 대통령의 양극화 문제의 해법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정책인식은 타당하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중소기업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고학력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급 서비스산업을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적절하다. 분명한 것은 일자리는 기업이 만든다는 것이다. 일자리는 전형적인 ‘파생수요’이다. 즉 기업이 사업계획을 확정하고 투자를 결정해야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업은 불확실성이 최소화되고 경영권이 안정될 때 투자계획을 세우게 되며, 노동시장이 유연해야 신규인력을 충원할 수 있다.
이처럼 정부의 책무는 일자리 제공이 아니라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제도적․정책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간부분의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조치에 대한 언급이 있었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대신 경제계도 때로는 노사간 대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과감하게 양보해야 한다는 추상적인 그리고 노동편향적인 권고가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노 대통령이 일자리 창출로 예시한, 보육․간병․교통․치안 등과 같은 사회적 서비스직 13만명 고용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 실망스러운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정부 부문도 인력을 고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그 자체로서 타당성을 지녀야 하며, 단지 일자리를 만들 목적으로 인력을 충원해서는 안 된다. 참여정부는 출범 이래 이미 공무원을 2만3000명 늘렸다. 2003년 16조8000억원이던 공무원 인건비는 2005년 19조291억원으로 13.5%늘었다. 인건비 증가는 차치하더라도, 공공부문의 인력증가는 규제완화 추세와 역행한다. 공공부문의 인력과 조직이 팽창할수록 늘어난 인력들은 할 일을 찾게 되고 이는 결국 불필요한 규제의 양산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Hayek)는 인간의 ‘지적 오만’을 특히 경계했다. 인간이 이성이 완전하다면 자유는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인간이 있다면 그의 지시를 따르면 된다. 자유는 우리 모두의 무지(無知)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가 허용될 때 무지는 시행착오를 통해 메워지게 된다. 시장은 개인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곳으로, 시장의 선별과정을 통해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의 제약이 그만큼 완화된다. ‘큰 정부․작은 시장’ 조합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과신하는 데서 비롯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큰 정부와 작은 시장’의 조합을 선택한 국가들이 어떤 역사적 발전 경로를 밟았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시장을 이기는 정부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개인은 엇갈린 길을 걷게 될 것이다.[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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