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초연부터 앙코르 공연까지 모두 출연 "지겹냐고요? 매 시즌 새로워요""AI 시대, 살아있는 라이브 무대 예술의 가치 더욱 귀해질 것"
  • ▲ 뮤지컬 '팬레터' 공연 사진.ⓒ라이브
    ▲ 뮤지컬 '팬레터' 공연 사진.ⓒ라이브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사라지는 시대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콘텐츠는 범람한다. 그러나 이 거센 변곡점 속에서도 "결국 인간의 본질을 관통하는 라이브 무대의 예술은 더욱 귀해질 것"이라며 확신에 찬 눈빛을 보내는 배우가 있다. 뮤지컬 '팬레터'의 역사를 함께 써 내려온 이규형이다.

    '팬레터'(한재은 작, 박현숙 작곡)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김유정과 이상, 순수문학단체 구인회의 일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창작 뮤지컬이다. 천재 소설가 김해진과 그를 동경하는 소설가 지망생 정세훈, 비밀에 싸인 작가 히카루를 중심으로 문인들의 예술혼과 사랑을 그린다.

    이규형은 2016년 초연부터 현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진행 중인 10주년 기념 앙코르 공연까지 한 시즌도 빠짐없이 '김해진' 역으로 무대에 섰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 집에서 만난 이규형은 피로함 대신 10년째 맡고 있는 인물에 대한 깊은 사유와 무대를 향한 여전한 설렘을 드러냈다.

    한 배우가 한 작품의 전 시즌에 참여하며 10년을 함께하는 것은 뮤지컬계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사실 10년 동안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지겹지 않냐고 물어보시기도 하는데 오히려 매 시즌 새로워요. 초연 때는 단순히 텍스트 그대로 쓰여 있는 인물을 보려고 했다면, 시즌을 거듭할수록 모티프가 된 인물(김유정)과 당시의 역사에 대해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인물을 대하는 태도가 매년 정교해지고 있어요."
  • ▲ 뮤지컬 '팬레터' 공연 사진.ⓒ라이브
    ▲ 뮤지컬 '팬레터' 공연 사진.ⓒ라이브
    대극장으로 무대가 넓어지고 동선이 효율적으로 변했음에도 이규형이 결코 놓치지 않으려는 것은 바로 소극장의 섬세함이다.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기 때문에 모교인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초연)에서 선보였던 연기 디테일을 유지하기 위해 동료 배우들과 끊임없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규형은 매 시즌 김해진을 표현하는 주안점을 조금씩 달리하며 캐릭터에 입체성을 불어넣었다. 그는 "어떤 시즌에는 죽기 전 유작을 남기겠다는 일념 하나로 글만 쓰는 작가로, 또 어떤 시즌에는 사랑을 붙잡으려는 절박한 인물로, 때로는 그저 사람으로서 더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표현하고자 했어요"고 털어놨다.

    '팬레터'는 국내 소극장에서 출발해 대극장으로 규모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대만,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며 K-뮤지컬의 저력을 입증했다. "작품이 출세했죠. 2018년 8월 대만 공연 당시 2000석 규모의 대극장이 꽉 찬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언어가 다름에도 관객들이 엄청나게 집중해 주셨고, 그날의 감동을 잊지 못해 지금까지도 한국을 찾아와 관람해 주시는 팬들이 있어요."

    이규형은 2024년 9월 열린 일본 라이선스 초연을 보기 위해 직접 도쿄를 찾았다. "현지 연출가인 쿠리야마 타미야가 '핍박을 견디며 죽어간 예술가들의 이야기이기에 한 글자 한 글자를 소중히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말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외면할 수도 있는 역사임에도 진심으로 공부해 준 거죠. 시대와 국가를 관통하는 본질이 있기에 이 작품이 앞으로 고전으로 남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 뮤지컬 '팬레터' 공연 사진.ⓒ라이브
    ▲ 뮤지컬 '팬레터' 공연 사진.ⓒ라이브
    이규형은 '팬레터'를 비롯해 '사의 찬미', '위대하게 은밀하게', '사랑의 불시착', '한복 입은 남자' 등 유독 창작 뮤지컬 초연에 자주 이름을 올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창작 뮤지컬은 라이선스보다 배 이상 어려울 만큼 과정 자체가 고통스럽기도 해요. 가장 큰 매력은 배우들의 아이디어나 의견이 작품에 반영된다는 점이에요. 배우들이 직접 대사나 노래 가사를 써오기도 하며 다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요. 작품에 제 숨결과 혼이 녹아들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말할 수 없이 뿌듯하고 재미있어요."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전전후 활약을 펼치고 있는 이규형에게 고향인 무대는 일상을 넘어선 삶의 동력이다. 지금은 3시간에 가까운 공연을 능숙하게 이끌지만, 20대 대학로 데뷔작이었던 연극 '두근두근' 시절에는 오직 열정 하나로 무대 위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그는 "공연이 끝나고 심장마비가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힘들어 벤치에 누워 통증을 가라앉혀야 했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이규형은 최근 캐릭터 연구를 위해 구글의 AI 프로그램 제미나이(Gemini)를 활용해 당시 문인들이 드나들던 다방이나 술집 등의 자료를 찾아봤다고 했다. 기술의 편리함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최근 명령어 두 줄로 정교한 액션 신을 만들어내는 AI 기술을 보며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영상은 기술로 무료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관객들이 로봇이나 휴머노이드가 하는 연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지는 않을 것 같아요. 로봇이 따라 할 수 없는 라이브 무대만의 가치는 앞으로 더 높아질 겁니다. 저를 완벽히 대체하는 똑같은 휴머노이드가 나오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은퇴해야겠지만, 지금은 제가 해오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집중할 뿐이에요"라고 전했다.

    뮤지컬 '팬레터'는 오는 6월 7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