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지주 장기집권 관행, 손댈 명분은 충분투명성 없는 연임 구조가 불신 키웠다개혁의 핵심은 인사 교체가 아니라 룰 교체'이너서클 해체'가 '새 이너서클'로 끝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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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의 '황소 연작'을 보면 묘한 착각이 든다. 점점 단순해지는 선을 보며 "대충 그린 것 아니냐"고 말하기 쉽다. 하지만 그 마지막 한 줄짜리 황소는 수십 장의 사실적인 데생을 통과한 끝에 도달한 결과다. 덜어냄은 무능의 산물이 아니라, 완전한 이해 이후에야 가능한 선택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생중계에서 발언한 "부패한 이너서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금융지주 회장들의 연임 관행을 정면으로 겨냥한 이 표현은 과격했지만,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지는 않는다. 금융권의 문제는 특정 인물이 오래 자리를 지켰다는 데 있지 않다. 그 인물이 어떻게, 어떤 검증을 거쳐, 어떤 견제 속에서 연임하는지가 불투명하다는 데 있다.

    금융권에 투서가 넘쳐난다는 대통령의 언급은 결과에 가깝다. 투서가 반복되는 이유는 인선 시스템이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룰이 작동한다면, 굳이 대통령실과 감독당국을 향해 문서를 날릴 이유가 없다. 투서는 불신이 제도화된 금융권의 또 다른 얼굴이다.

    금융지주 회장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권한을 견제해야 할 이사회는 독립성을 잃고, 회장의 영향력 안으로 흡수된다. 회추위는 절차를 밟지만, 결과는 대개 예측 가능하다. 이 구조 속에서 연임은 관행이 되고, 관행은 곧 권력이 된다. '이너서클'은 음모가 아니라 시스템의 귀결이다.

    그렇다고 해법이 단순한 인적 청산이어서는 곤란하다. 대통령의 발언이 진짜 개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분명한 전제가 필요하다. 낙하산은 없어야 한다는 것. 이 전제가 무너지면 개혁은 곧바로 관치로 변질된다. 금융권이 대통령 발언 이후 가장 경계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이너서클을 해체한다는 명분 아래, 또 다른 이너서클이 만들어질 가능성이다. 과거 여러 정권에서 반복됐던 장면이기도 하다.

    개혁은 '누가 물러나느냐'보다 '어떤 규칙이 남느냐'의 문제다. CEO 자격 요건, 사외이사 임기, 회추위의 외부 검증, 이해관계 차단 장치까지 함께 손보지 않으면 구조는 그대로 남는다. 사람만 바뀐 자리는 곧 다시 닳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람을 바꾸는 정치적 결단이 아니라, 룰을 바꾸는 제도 개편이다. 회장 후보군을 실질적으로 넓히고, 선임 절차를 공개하며 이사회가 회장으로부터 독립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연임을 하든 교체를 하든, 그 결과가 숫자와 절차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피카소의 황소가 단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모든 선을 그려봤기 때문이다. 금융지배구조 개혁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덜어내기부터 시작하면 남는 것은 공백뿐이다. '부패한 이너서클'이라는 진단이 옳으려면 그 처방은 반드시 구조를 향해야 한다. 그래야 투서도 줄고, 시장의 의심도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