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국·베트남 생산기지 이전 '공동화 상흔' 새겨야급변하는 AI 반도체 산업 … 한국 매력적 선택지일지 미지수美 레드카펫과 韓 노란봉투 사이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아
  • ▲ 법원 출석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뉴데일리DB
    ▲ 법원 출석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뉴데일리DB
    2000년대 초 일본과 유럽의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메모리 왕좌에 오른 삼성전자의 시선은 중국과 베트남으로 향했다. 당시 삼성이 거둬들인 막대한 이익은 가전·스마트폰 생산기지를 중국에 이어 베트남으로 옮기는 결단으로 이어졌고, 이는 '신의 한수'로 남았다. 글로벌 생산기지와 저렴한 생산 비용을 확보하면서 중국을 추격을 따돌렸기 떄문이다. 만약 생산 기지 중심축 이동이 늦어졌다면, 현재 삼성전자 스마트폰 수익성은 중국 기업들과의 가격 경쟁에서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삼성의 승부수는 국내 제조 생태계에는 공동화라는 뼈아픈 상흔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삼성전자의 올해 영업이익이 150조원에 육박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앞다퉈 실적 컨센서스를 올려잡기 바쁘고, 정부여당은 잔뜩 거둬들일 법인세에 싱글벙글이다. 하지만 과거의 공동화 아픔을 겪은 산업계는 불안하기만 하다. 삼성이 향후 2~3년 간 벌어들일 막대한 영업이익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기업들이 인공지능(AI)과 로보틱스라는 거대한 전환기를 맞아 분출구를 찾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그리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은 파격적인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앞세워 삼성전자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들을 자국 영토로 끌어들이고 있다. 기업은 자산 효율성을 극대화 하려는 유기체다. 미국은 ‘레드카펫’을 깔고 투자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수백조 자금이 들어오면 고민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일본 노무라 증권은 "삼성과 SK하이닉스과 관세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미국에 메모리 공장을 새로 지어야 할 것"이라는 보고서까지 냈다.

    국내 상황은 정반대다. 정년연장과 노란봉투법 등 노동 유연성을 저해하는 정책이 쏟아지고, 경쟁국에 비해 빈약한 보조금 지원안을 담은 반도체특별법 조차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기껏 수백조 투자 계획을 세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마저 정치 논리로 뒤흔드는 판에 삼성이 파운드리에 이어 주력 사업인 메모리 생산기지 마저 미국으로 옮기는 '비장의 카드'를 쓰지 말란 법도 없다. 

    글로벌 산업 지형이 꿈틀대는 작금의 상황이 삼성이 가전·모바일 엑소더스를 시작한 2000년대와 맞닿아 있다는 것도 께름칙한 지점이다. 중국이 HBM을 비롯한 고부가가치 메모리 기술력 추격 가속 페달을 밟고 있고, 인텔·마이크론을 앞세운 미국의 견제도 본격화 되고 있다. AI 기술 패러다임이 학습에서 추론으로 이동하면서 폭증한 메모리 수요는 단순히 '잘 만드는 것'에서 '싸고 많이 그리고 잘 만드는 것'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0여 년 이상 차곡차곡 실탄을 쌓아온 삼성이 주력 사업을 국내에 남겨둘 것이란 막연한 생각은 혼자만의 짝사랑에 가깝다.

    비단 삼성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대박을 낸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Atlas)’를 주도한 보스턴 다이내믹스는 그룹 승계 구도의 핵심 자산이 미래 산업의 주역으로 우뚝 섰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틀라스의 무대는 한국이 아닌 미국 월스트리트다. 나스닥 상장이 임박한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사례는 현대차그룹의 중심축이 한국 증시와 제조 기반에서 미국으로 급격히 이동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기업 가치가 수십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 핵심 계열사가 해외로 둥지를 트는 것은, 국내 규제 환경에 지친 자본이 내리는 ‘조용한 항의’다.

    정부와 정치권은 삼성의 150조 영업이익에 축포 대신 긴장감을 느껴야 할 때다. 우리 경제 재도약을 위한 축배의 재료 보다는 한국을 떠나기 위한 기업의 ‘이별 예고장’이 될 지도 몰라서다. 자본과 기술에는 국경이 없다. 2000년대 삼성의 해외 진출에서 확인한 국내 제조업 공동화 실수를 다시 반복할 순 없다. 반도체와 로보틱스 산업이 국내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제도적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첨단 기업들의 수백조 영업이익이 한국 경제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축배의 재료가 될 지, 아니면 기업이 태평양 건너로 향하는 편도행 티켓이 될 지는 정부와 정치권 몫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