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
    이것은 김구가 [백범일지]에 토로한 해방소감이다. 그가 해방 소식에 접한 것은 일본의 항복선언 사흘 뒤였다. 서안(西安)에서 광복군과 OSS독수리작전훈련생들을 시찰하고 식사하던 중이었다고 썼다, 본국에 침투하여 일본군과 싸울 준비를 하던 김구는 만사허사(萬事虛事)의 허탈감에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고 한탄한다.

    광복군 독수리작전은 이승만이 미연합참모분부에 한국청년 활용을 요구하여 OSS(Office of Stratigic Services:전략첩보국) 국장 도노반(William J. Donovan)장군이 뒤늦게 급조한 게릴라전투 프로그램이다. 이때 이승만의 끈질긴 한국인참전요구는 광복군이 연합군 전쟁에 합류해야만 전후처리에서 독립건국의 국제적지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략에서였다. 

    이승만, 소련의 대일전 참전 우려...서둘러 귀국 신청

    김구가 꿈을 잃고 망연자실한 그 때, 이승만은 신이 나고 바쁘기만 했다.

    40년을 기다린 해방 독립만세! 4년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가장 폭발적인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그것은 이승만이 평생을 기다린 최대의 뉴스, 바로 [JAPAN INSIDE OUT]에서 미국의 일본공격을 촉구했던 바, 미국만이 일본을 멸망시켜 줄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엊그제 일본에 떨어진 두 방의 원자탄, 미국의 선전포고후 이승만이 부르짖었던 그 불벼락이다. “싸워라, 동포여, 얼마 안가서 왜적의 머리에 불벼락이 쏟아질 것이라고 방송(VOA)했던 바로 그 불벼락! 독립운동 40여년간 기도한 하나님의 천벌그것이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부터 이승만이 가장 걱정한 것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 여부였다.
    7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자 이승만은 더욱 초조했다. 미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에게 편지(83일자)를 보내 이렇게 요청한다.

    한국과 가까운 필리핀 마닐라로 날아가서 단파방송을 통하여 국내동포의 봉기를 선동하고, 가능하다면 미군과 함께 귀국하고 싶다

    이것은 소련군의 참전에 대비, 그들보다 앞서 고국에 가서 소련군의 한반도 점령을 어떻게든지 막아보려는 계획이다. 믿을 것은 미군 밖에 없잖은가.
    그런데 8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이틀후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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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또 투하되자 다급해진 이승만은 미국 전쟁부(육군부)로 달려간다. 하루속히 조국으로 가야한다. 마셜의 응답을 기다릴 여유도 없으니 서둘러 귀국을 신청했다. 810일이다.

      해방순간 이승만 소련이 걱정...미국이 잘못하면 동족상잔 피 흘릴 것

    소련군이 금방이라도 한반도를 점령해 버릴 것만 같아 안절부절, 드디어 815일 일왕(日王)의 포츠담선언 수락, 즉 무조건 항복 방송이 나왔다이승만은 측근들 임병직(林炳稷) 장기영(張基永) 한표욱(韓杓頊) 부부와 몇 명의 측근들을 불러 워신텅 시내 식당에서 해방의 기쁨을 나누며 귀국과 건국 문제를 상의한다.

    문제는 소련이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일세. 만약 미국이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동족상잔의 피를 흘리게 될지로 모르지. 우리 민족세력과 공산당 간에 충돌이 뻔하지 않나..“

    이런 염려는 상하이 임정대통령 시절부터의 체험이 말해준다고 했다. 해방의 기쁨보다 내전부터 걱정해야 하는 한민족의 형편이다. (한표욱 [이승만과 한미외교] 중앙M&B,1996)

     4대 연합국 정상들에게 축전...스탈린경고전문

    이승만은 우선 루즈벨트, 스탈린, 장제스, 영국의 애틀리 수상에게 축하전보부터 쳤다.

    트루먼에게=“대한이 일본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데 대하여 가슴 깊이 박힌 감사를 표시하며,

    27년전 항일혁명(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출발한 우리 민국정부는 미국 제도를 모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기가 없었습니다. 오늘 미국이 승리하였음에 일치된 기쁨을 표합니다

    스탈린에게=“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으로서 저는 각하와 위대한 소비에트 연방이 거둔 최후의 승리와 세계 평화의 복구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평화를 사랑하고 소비에트연방에 변함없는 호의를 갖고있는 우리 3천만 한국인이 건설할 통일 민주주의 독립국가는 소비에트공화국과 극동 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지키는 안전장치가 될 것임을 확약합니다.” ([The Syngman Rhee Correspondence in English, 1904~1948] vol.7, 연세대, 2009).

    반소주의자 이승만의 전략적 축전, 뼈 있는 다짐이며 경고장이다. ‘평화와 안보를 지키는 안전장치란 말은 독립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강조하여 침략하지 말라고 경고한 말이었다. 

    소련 정부, 이승만 경계령...”가장 반동적인 인물

    참고로 이 무렵 나온 소련내의 이승만 경계령을 보자.

    811일자 소련공산당 기관지 [공보]와 정보매체 [새시대] 15일자에서 이승만은 전쟁기간 여러차례 반소성명을 발표했고 지금은 조국의 진정한 해방(=공산화)에 반대, 소련의 위협을 운위하고 있다고 질타하였다. 동시에 한국은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대륙에 연결되어있고 대륙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통하여 대륙국가로서만 번영할 수 있다고 단정했다. 특히 크렘린 외무부 극동국장 주코프(D. A. Zhukov)sms)’‘이승만의 특징이란 보고서에서 가장 반동적인 인물로 찍었다.

  • ▲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이 워싱턴에 설립한 구미위원부(임정 외교부) 멤버들이 1920년 3.1절 첫돌을 맞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임병직. 청년시절부터 임병직은 평생 '이승만 외교'의 첨병이었다.
    ▲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이 워싱턴에 설립한 구미위원부(임정 외교부) 멤버들이 1920년 3.1절 첫돌을 맞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임병직. 청년시절부터 임병직은 평생 '이승만 외교'의 첨병이었다.

    ◆ 38선 날벼락...“소련 말고 미군 단독 진주하라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난데없이 청천병력같은 뉴스가 터졌다.
    한반도에 38미국과 소련의 남북한 분할점령일본군 철수 관리를 위한 한시적 군사분계선이라고 했다70세 이승만은 온몸이 불타는 격분에 사로잡혀 얼굴도 손도 부들부들 떤다.

    얄타 밀약의 현실화불과 4개월 전에 이승만은 그 진상을 공개하라고 폭로전술을 폈는데 그 때 그 추측과 의구점이 백일하에 실체를 드러낸 것이었다과연 소련공산당에서 전향한 언론인 구베로의 제보가 정확했다. ”미국이 한반도를 소련에 맡겼다는 정보 그대로 남북한을 나눠먹은 강대국들의 음모가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이승만을 빨아들인다어쩔 것인가.

     이승만 예견...”신탁통치--소공동기구 절대 반대

    국제전략가 이승만 박사는 다시 한번 당사자들에게 긴급 전문을 보낸다.

    트루먼에게=“한국 국민들은 오로지 미국만을 한국의 점령군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한국국민은 단일민족인 자국민을 분열시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초래할 신탁통치나 공동위원단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각하께서 한국의 완전한(통일독립을 주장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독립 민주국가가 되어야 할 저의 조국의 미래는 각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3 서한집 ])

    장제스에게=“독립을 위장하여 한국을 괴뢰로 이용하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소트루먼 대통령에게 이 계획을 채택할 필요가 없다고 권고해 주시오완전한 독립을 부여하지 않는 계획은 모든 한국국민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우리는 각하에게 보장합니다단결되고 민주적인 한국이 장차 귀국의 충실한 맹방이 될 것입니다.”(821일자)

    영국 애틀리 수상에게=“한국이 또 다른 폴란드가 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각하께서 중재해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립니다명목상의 독립이라는 미명하에 한국을 노리개로 사용하려는 시도가 집중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부디 대한민국이 극동의 평화와 자유의 안전판으로서 통일 민주국가를 건설하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맥아더에게 소련 오면 공산화유혈내전의 씨앗

    이어 828일 이승만은 신뢰하는 동지 맥아더 장군에게 간절한 호소를 보낸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이 미국의 지휘관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장군의 명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우리는 공동점령 또는 신탁통치에 반대합니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인들이 흘린 피와 비용의 댓가로 미군만의 단독점령을 환영합니다대일전쟁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세계를 안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왜 우리가 피한방울 흘리지 않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서 공산주의를 확립하고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의 유일의 희망은 극동의 평화를 위하여 트루먼 대통령과 장군께서 단일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 한국을 보장해주시는데 있을 뿐입니다이 중대한 시점에서 본인을 한국에 보내어 어떤 자격으로라도 미군과 협력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요망합니다.” ([The Syngman Rhee Correspondence in English, 1904~1948] vol.7, 연세대, 2009)

    소련의 무임승차를 지적한 대목은 국제법박사의 예리한 전략적 분석이다태평양 전쟁을 구경만 하다가 원자탄이 터지니까 공짜로 승전 열매를 차지하려는 스탈린의 목표는 분명 한반도 재점령일 것이다무슨 자격으로 38선 이북에 진주한단 말인가.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의 소련 공산화 작업을 지켜보는 이승만의 통찰력은 한반도의 분단과 유혈내전을 걱정하는 대목에서 정곡을 찌른다.
    특히 러일전쟁 체험을 비롯상하이 임정에서 겪은 공산당의 탄핵‘ 소동은 이승만을 반소-반공의 전문가로 만들어놓았다하와이에서 발표한 공산당의 당부당‘ 논문(1923)이래 펼친 반공투쟁이 정확히 설명해준다.

    무엇보다 해방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가 결정한 신탁통치와 미소공동위 설치를이미 4개월 전에 예상하고 반대를 분명히 한 것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앞서가는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해방-독립 과시‘ 만찬회 개최

    일단 한숨을 돌린 이승만은 새로 건국할 대한민국의 존재감을 높이려는 축하행사를 펼친다.

    830일 저녁 워싱턴에서 보란 듯이 한국 해방의 밤(Korea’s Liberation Night) 만찬 연설회를 개최한 것이었다미국인맥이 풍부한 이승만은 미국 정계 등 VIP들을 초청, 130여명이 참석하였다특히 미국 유력인사들로만 조직한 한미협회 간부들이 앞장서 모임을 진행한다.

    동방의 빛 코리아의 해방을 축하하고 조속한 독립을 격려하는 연설들이 줄을 이었다.

    이승만의 오랜 동지 필리핀의 로물로(Carlos P. Romulo) 장군은 언론인이자 외교전문가로서 한국과 이승만에 대하여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또한 뉴욕에서 달려 온 가톨릭 해외선교부의 월시(Walsh) 대주교의 기독교적 연설이 이승만의 기독교적 독립운동을 찬양하여 박수를 받았다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이승만은 이처럼 가톨릭에도 인맥을 쌓아 놓았다이날밤 늦게까지 진행된 만찬 연설회는 ABC방송이 미전역에 중계하였다. (Syngman Rhee to Oliver, Sept. 5, 1945. ‘대한민국사자료집-28)

  • ▲ 미국정부에서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두달이나 막은 것은 미국무부내 소련 간첩 등 친소파였다. 사진은 소련 간첩 알저 히스.
    ▲ 미국정부에서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두달이나 막은 것은 미국무부내 소련 간첩 등 친소파였다. 사진은 소련 간첩 알저 히스.

    ◆ 미국이 이승만의 귀국을 두달 막다?

     810일 신청한 귀국 신청에 소식이 없자 이승만은 한미협회 이사진을 동원한다.

    아메리카대학교 총장 더글라스(Psul. F. Douglas), INS통신 사장 윌리암스(Jay J. Williams), 거물 변호사 스태거스(John Staggers) 3명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822일 연명으로 이승만 박사의 조속한 귀국 청원 편지를 보냈다이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한다.

    첫째미국정부가 이승만의 즉각적인 귀국에 모든 편의를 제공해야 마땅하다.
    둘째이승만과 한국인들의 열망에 대하여 더 이상 냉대를 그만두기 바란다.
    셋째한국인들이 지난 27년간 유일한 정부로 인정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빨리 승인하지 않는다면 한반도에 큰 혼란과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에 덧붙여 트루먼을 설득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은 이승만 에피소트를 소개하였다. 

    이와같은 모든 위기상황은 이승만 박사가 한국에 들어감으로써 피할수 있습니다그는 한민족이 펼친 기나긴 투쟁의 살아있는 상징입니다우리는 국무부에 제출할 증거들을 수집하면서 한국에서 귀환한 다수의 선교사들을 만났습니다그들은 이 박사가 한국인들의 가슴속 가장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심지어 일단의 선교사들이 송환을 기다리던 수용소에서 사슬에 묶여 수감된 한국인 죄수 여러명이 이승만 박사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미국에서 활약하고 계십니까?” 묻더라고 합니다그렇다고 대답해주자 그들의 얼굴에 환한 행복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그들은 일본인들의 고문과 박해를 이제 더 잘 견딜 수 있다고 했습니다」 (Korean American to Truman, Aug.22,1945. FRUS,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백악관의 답신...미국의 한국인식을 보여주다

    이승만은 97일이 되어서야 미국무부 극동국장 발렌타인(Joseph W. Ballantine)으로부터 극히 이례적인 편지를 받았다왜냐하면 모처럼 백악관 지시를 언급한 편지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에게.
    백악관의 지시에 의하여 답합니다귀하가 대일전 승리와 한국문제의 여러문제에 관하여 보내신 8월 15, 21, 28일의 전보와 88, 18일에 보내신 편지가 접수되었음을 확인함국무차관을 대신하여 극동국장 발렌타인 올림 

    답변같지 않은 답변, 사실상 이승만의 많은 질문과 요구에 대한 답변 거부였다.
    참으로 어이없는 이승만은 지독한 모멸감을 참아야했다. 822일 청원서에 대한 코멘트조차 없다백악관도 국무부도 아직까지 한국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일 줄이야....이승만은 쓴 웃음을 지었다그렇구나역시나 국무부는 현재도 소련간첩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구나알저 히스를 만난이래 가진 의구심에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이승만은 그러나 이 정도로 좌절할 수 없었다. 

    또 하나의 날벼락여권취소 통보

    소련과 신탁통치를 추진해야하는 미국은 반소’ 이승만의 귀국을 원하지 않았다더구나 미국무부의 소련 간첩들과 친소분자들이 가만있겠는가.
    그때까지도 무국적을 고수하고 있던 이승만은 일본이 1차 항복의사를 밝혔던 810일 귀국 여권을 신청하였다미국무장관 번스가 한 달 지나서 9월중순 일단 여행권을 재가하였다.
    하지만 출국을 위해서는 일본 점령사령관 맥아더의 입경허가를 받아야하고 교통편의를 허용하는 전쟁부의 보증을 받아야 한다아직도 한반도는 일본 땅아니 미국의 점령지다. 

    차일피일 세월만 흘러가는 가운데 또 날벼락이 떨어졌다. “여권 취소‘ 통보였다.
    이유는 여권신청서에 기재한 주미고등판무관이란 신분이 부절적하다는 것그 신분명칭은 4년전 임시정부가 부여한 주미외교위원장이란 직명을 ‘High Commissioner to the United States’로 영어 표기하여 사용해온 것인데 이제 와서 새삼 왜 시비일까.

    또 일주일이 지난 921일 다른 통보가 왔다이승만의 신분을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국인’(Korean national returning to Korea)이나 그 밖의 다른 용어로 바꿔서 신청하라고 했다이승만의 직명표기대로 입경 허가를 내준 합동참모본부의 스위니(Sweeney) 대령은 이미 처벌까지 받았다고 했다. (올리버 [신화속의 인물 이승만앞의 책).

    이승만의 귀국을 돕기 위해 앞장선 굿펠로가 이리저리 뛰어도 국무부는 더 이상 이승만의 여행계획을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입을 막았다.
    이런 시비의 주역은 새로 부임한 극동국장 빈센트(John C. Vincent)와 일본과장 딕오버(Dickover)였다중국 근무시 중국공산당에 기울었던 빈센트는 루즈벨트 측근이자 소련 간첩인 알저 히스(Alger Hiss)와 함께 사상적 문제아임이 밝혀진다. 1951년에 전 소련간첩에게 고발당한 빈센트는 공무수행 부적격’ 판정을 받고 1953년 덜레스 국무장관 요청으로 축출된다. 

    미국무부의 핑퐁...“친공친일분자들의 장난

    이승만은 101일자 메모랜덤에 이들 국무부 안의 친공친일분자들이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아래 두기로 스탈린과 비밀협약을 만든 자들이고자신의 출발까지 막고 있다고 적었다.(이정식 해방전후의 이승만과 미국’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도대체 누가 이승만을 붙잡고 늘어져 귀국을 두 달이나 늦게 만들었을까.
    한마디로 이승만을 핑퐁’ 치듯이 핑계 저 핑계 국무부의 미루기 작전’ 그것이었다.
    국무장관이 결재한 여행허가서를 그 이래 간부들이 트집잡아 미룬다.
    이승만의 동지 굿펠로(Preston Goodfellow, OSS부국장)가 중국을 방문하게 해달라고 하자 극동국장은 차관보에게 미룬다.
    이승만의 직위’ 명칭이 잘못되었다며 그냥 한국인이라 적으라고 비토한다.
    맥아더 사령부의 허가를 받은 스위니 대령이 하라는 대로 수정한 새 허가서를 신청하자 뜻밖의 응답이 왔다. ”국무부는 이승만의 여행계획을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굿펠로가 다시 찾아가 재촉하자 이승만에 호의적이던 여권과장 시플리(Ruth Shipley)여사마저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다고 잘랐다.
    이승만은 마지막으로 맥아더 장군에게 긴 전보를 보낸다.

    그때 서울의 하지 사령관으로부터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국민들이 재촉한다는 전보를 받고 있던 맥아더는 필리핀 경유로 신청된 이승만 여행을 일본 경유로 바꾸어 허가한다. 해방을 맞은지 2개월이나 지나서야 귀국의 길이 열린 것이다.

  • ▲ 이승만 박사(오른쪽)가 일본에서 맥아더 부부와 인사하고 있다.
    ▲ 이승만 박사(오른쪽)가 일본에서 맥아더 부부와 인사하고 있다.

    망명 33년의 고별사 가슴이 터지고 피가 끓는다

    마침내 이승만이 워싱턴을 떠난다참담한 모욕과 핑퐁치기를 견뎌낸 이승만은 당시의 심경을 고별사로 남기며 가슴이 아프고 피가 끓는다고 했다.

    ”...우리 임시정부는 아직도 타국에 체류하야 오도가도 못하며외국(중국)을 의지하고 국권을 방해하는 자들이 편만하야 충역(忠逆:충신과 역적)이 혼잡되어 혼돈상태를 만들어 놓았으니우리 삼천리 강토가 우리의 것인지우리 3천만 민족이 자유민인지 아직도 모르는 중이라...

    어찌 가슴이 터지게 아프고 피가 끓는 것을 면하리오나의 사랑하는 애국남녀 동포여어찌해서 우리 형편이 이리 된것인지 생각들 해보시오....미주와 원동(중국)에서 불량한 한인들이 사욕과 시기로 임시정부를 멸시하며 독립을 방해하고 이목을 가려서타국정부로 하여금 우리 임시정부를 사사로운 단체들과 동등으로 대우하게 하고...“ 

    이승만은 뼈에 사무친 교민단체의 분열 싸움과 중상모략 이권쟁탈전에 대한 울분을 거침없이 토로한다중국과 미주 동포사회의 친공세력과 기회주의 세력들이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활동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파괴한 지난 30년 과거사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특히 미주의 한길수나 서북파(평안도 흥사단 등)의 집요한 인신공격과 끼어들기 공작은 막판까지 미국정부내 친소파가 임정승인 거부 핑계로 써먹지 않았던가.

    ”...유일한 희망은 국내동포의 애국심으로 충역과 시비를 분간할 줄 알고 목숨을 내놓은 혈전고투하고 있는 것이며 나 한 사람은 죽든지 살든지 일평생 지켜온 한가지 목적으로 끝까지 갈것이니 의심말고 후원해주시오 

    아깝고 아까운 2개월...소련은 그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이승만은 일본에 도착하여 맥아더를 만나 왜 한국이 38선으로 분할되었는가를 논의하고 서울에서 온 하지를 만난 뒤 1016일 오매불망 조국의 하늘로 날아간다맥아더가 내준 전용기 바탄(Baatan)에 오른 이승만은 이역만리 33년 역정을 돌아볼 틈도 없이 조국의 장래를 설계한다. 8.15 해방후 두 달이나 워싱턴 국무부와 허송한 세월이 너무나 길고 길었다.

    억만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운명의 2개월소련군이 점령한 조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이승만은 한시가 천추 같은 비행을 끝내고 마침내 김포공항에 내렸다마중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미군정이 비밀에 붙였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