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50년 10월1일 38선을 돌파한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기념비로 나무 기둥에 '아, 감격의 38선 돌파'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이승만대통령이 38선돌파를 주저하는 맥아더 장군을 보자 정일권 참모총장을 불러
    ▲ 1950년 10월1일 38선을 돌파한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기념비로 나무 기둥에 '아, 감격의 38선 돌파'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이승만대통령이 38선돌파를 주저하는 맥아더 장군을 보자 정일권 참모총장을 불러 "국군이 먼저 돌파하라"고 명령하여 '북진통일'에 앞장선 기록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38선은 소련군이 한반도로 전광석화처럼 남진하므로 이에 놀란 미국이 즉흥적으로 그은 것이다.
    , 스탈린의 한반도 점령 야욕 때문에 미국의 계획에 없던 한반도 분단선이 생겨난 것이다.

    1945년 포츠담회담 직후 미국이 원자탄을 일본에 떨어트리자마자 88일 스탈린은 즉각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하고, 대기하던 수십만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로 동시에 물밀 듯 총진격한다.

    뜻밖의 소련군 남진 속도에 놀란 미국은 810~11일 긴급비상회의를 소집, “소련군을 저지하라. 되도록 북쪽으로 저지선을 쳐라결정한다. 그냥 놔두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기세였으며, 이는 4대국공동신탁통치 국제협약에 위배되는 공산군 단독침략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스탈린이 미국의 38선 제의를 즉시 동의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스탈린은 미국의 제안을 받자 즉시 역제안을 한다. “38선 말고 양국이 연합사령관 1명씩 두어 한반도를 공동관리하자이는 한반도를 독점하겠다는 의도였다. 왜냐하면 얄타밀약에서 루즈벨트가 스탈린에게 한반도에 미군을 주둔시키지 않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기간 공동관리후에 미군이 철수하면 소련 단독지배가 될 전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복수 사령관 제안을 거부하였고 스탈린이 그제야 38선 설정에 동의한다. 스탈린의 미-소 공동관리 술수는 그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로 현실화한다. 4개국신탁통치 대신 -소양국 신탁통치라는 소련안에 미국이 동의했던 것이다.

    미국은 처음부터 소련에 속았다. 이승만은 속지 않았다. 38선을 처음 알게된 순간부터 이를 반대하며, -소의 한국흥정을 내다보고 공동위원회같은 기구 설치를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소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다음장 참조).

    한마디로 38선은 스탈린의 영토적 야욕 때문에 생겼고, 스탈린은 애초부터 한반도를 독점하려 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었음을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 ▲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 모인 처칠, 트루먼, 스탈린(왼쪽부터).
    ▲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 모인 처칠, 트루먼, 스탈린(왼쪽부터).

    포츠담회담과 얄타회담의 차이점 

    얄타회담 5개월후 1945년 717일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Potsdam)에서 개막된 포츠담회담은 그 5개월간 많은 변화를 일으킨 만남이었다그 사이 소련은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럼 제국을 장악하였고미국은 새로운 대통령 트루먼이 등장하였으며영국은 처칠이 일단 참석하였짐반 회담중 선거결과가 뒤집어져 처칠은 귀국하고 노동당 애틀리(Clement R. Attlee)가 교체 참석한다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소련 스탈린은 동유럽 지역을 점령함과 동시에 공산화 작업을 착착 성공시키고 있었다소련군은 발트해 연안국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 및 루마니아를 장악폴란드엔 얄타회담에서의 약속을 깨고 꼭두각시 루불린(Lublin)정권을 기정사실화하였고다른 나라들에서도 같은 공작을 진행하였다이는 서유럽과 미국에 반공’ 기류를 확산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둘째미국에선 루즈벨트를 승계한 부통령 트루먼 대통령이 난생처음 국제회의그것도 민감한 전후처리 3거두(巨頭)회담에 나섰다앞에서 보았듯이 루즈벨트가 유엔창설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는 식으로 스탈린에게 많은 양보를 했던 것과 달리그런 부담이 없는 트루먼은 탐욕적인 스탈린을 경계하였다루즈벨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동유럽을 일방적으로 통치했으며처칠이 이란의 영-소 양군을 동시 철수하자고 요구해도 불응하였기 때문에 스탈린=팽창주의자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이는 2년후 1947년 3월 발표한 반소-반공의 트루먼 독트린이 잘 말해준다.

    셋째무엇보다 큰 변화는 그동안 진행하던 미국의 핵개발 실험이 포츠담회담 개막 전야에 역사적 성공을 거둔 일이다이 원폭 성공은 포츠담의 회담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꾼다.

  • ▲ 1945년 7월16일 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미국의 '트리니티' 핵실험에서 솟아오로는 거대한 핵구름.
    ▲ 1945년 7월16일 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미국의 '트리니티' 핵실험에서 솟아오로는 거대한 핵구름.

    원자탄이 트루먼-처칠의 길을 바꾸다

     개막 첫날독일 빌헤름 황태자의 집 체칠리엔 궁에 들어선 트루먼은 상기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바로 전날 16일 새벽 5(미국시간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Alamogordo)에서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코드명:트리니티 trinity)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트루먼도 몰랐다가 대통령 되고서야 브리핑 받은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 1942년 본격 개시한 원자탄 개발이 마침내 성공하여태평양전쟁은 물론 세계사를 바꾸리라는 눈부신 상상에 부푼 트루먼은 참 운도 좋다루즈벨트가 4번째 임기 초장에 죽음으로써 부통령 취임 80일만에 대통령이 된 신참 대통령은 놀랍게도 취임 넉 달만에 막강한 원자탄 파워까지 무장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행운을 잡은 것이었다.

     트루먼은 이번에 스탈린을 처음 만났다.
    친소주의 루즈벨트가 남긴 유산 중에 가장 버거운 짐 스탈린그의 안하무인 독주에 대하여 미국정부 당국자들의 경고가 잇따랐다.

    국무부가 622일 작성한 종전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정세와 미국의 정책」 중 한국항목에서 소련이 참전하면 한국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점령하고 친소정부를 수립할지 모른다고 경고하며 이를 막기 위한 정책은 카이로선언의 실현이라 강조하였다(Department of State, ‘An Estimate of Conditions in Asia and the Pacific in the Close of War in the Far East and the Objective Polices of the United States’ FRUS 1945, vol. .)

    포츠담회담 개막 전날 트루먼에게 보고서를 제출한 전쟁부(국방부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은 이미 이승만이 주장해 온 소련의 한반도 공산화론을 다시 상기시켰다.

    소련이 4개국 신탁통치에 동의했지만 상세한 것은 합의된 게 없다소련이 외국군의 한반도주둔을 원치 않는 이유가 있다제가 알기로 소련은 이미 1-2개 한인병력사단의 훈련을 마쳤는데 이를 소련지배하의 정권수립에 이용할 것이다이것은 소련이 약속을 깬 폴란드 복사판을 극동에 옮겨놓는 격이다.”

    이러면서 스팀슨도 신탁통치의 강력한 추진을 건의하고 미군의 상징적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키자고 제안하고 있다한반도를 어느 특정국가가 지배하면 국제분쟁이 재발할 것이므로 소련의 지배를 막으려면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의 반복이다.(Stimson to Truman, Jul.16,1945, FRUS 1945 Conference of Berlin Potsdam, vol.)
    이렇듯 당시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한국인의 즉각 독립 희망과 관계없이 표면적인 분쟁방지에 초점을 맞춘 막연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미군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소련을 대일전에 꼭 참전시켜야한다고 거듭 요구하였다.
    미국 엘리트층의 정치적배경이 약한 시골 출신’ 대통령 트루먼이 국무부나 군부의 주도에 끌려가던 당시한국문제는 카이로 선언에서 한발작도 나아가지 않은 상태로 포츠담회담에서 도 신탁통치를 위한 군사작전상의 부수적 문제로 다뤄졌다는 이야기다. 

  • 2. 트루먼 소련 참전 불필요”...처칠 일본 상륙전도 불필요

    개막 다음날 트루먼은 원폭개발에 참여한 영국 처칠에게 성공을 알려주고스탈린에게 알릴 것인지 말 것인지 의논했다지금 스탈린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면 소련이 당장 참전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처칠은 지구를 흔들만한 뉴스라며 기뻐하였다그리고 원자폭탄이 두 가지 난제를 해결했구나’ 생각했다-영군은 이제 엄청난 희생을 치를 일본 본토상륙작전을 안해도 되고더 좋은 일은 대일전에 소련이 참전할 필요가 없어진 상황변화였다.(처칠 회고록 [세계2차대전:승리와 비극] 1953)

    당연히 트루먼의 인식도 다르지 않았다포츠담회담에서 가장 급한 것이 소련의 참전을 앞당기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거꾸로 소련의 참전여부를 미국이 재검토해야할 정세로 뒤집힌 것이다그는 소련군의 도움 없이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종결미국 단독 승리를 원하고 있었다.

    회담이 폴란드 등 동유럽문제와 독일처리문제태평양전쟁 종결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721일 트루먼이 기다리던 반가운 보고가 또 들어왔다.

    “81일 이후에는 원자탄의 실전 사용이 가능합니다.”

    트루먼은 무릎을 쳤다. ‘골치 아픈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드디어 전쟁을 끝낼 수 있구나
    724일 미-영연합참모본부와 소련참모본부가 처음 합동회의를 열고 한반도에서의 작전문제를 협의하던 날 저녁식사를 위해 휴식에 들어갔을 때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다가갔다우리는 굉장한 파괴력을 가진 신무기를 갖게 되었소.” 원자탄이란 말은 빼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스탈린은 반가운 소식이군요일본에 잘 쓰기 바랍니다라고 간단히 답했다(Harry S. Truman [Memoires] Doubleday & Company,1955, 손세일 번역 [트루먼 회고록지문각, 1968). 

    이날 열렸던 연합국 3개국 참모본부 연석회의에서 논의된 한반도 작전 문제는 애매하게 끝났다소련군 참모총장 안토노프(Aleksei Antonov)가 소련군의 작전에 미군의 대응 여부를 물었을 때 마셜(George C. Marshall) 참모총장은 그런 계획은 없다고 미국의 한반도 상륙작전 가능성을 부인하였다그리고 뒤늦게 작전부장 헐(John E. Hull) 중장에게 미군의 한국진공작전 계획을 준비하라” 지시하였다.
    이것이 포츠담회담 막판에 가서야 미군의 한국관심이 처음 표면화된 대목이다.
    이처럼 미국 정부나 미 군부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한국 점령 문제나 전후처리 등에 한가지도 확정된 계획이 없이 원자폭탄에 의한 승전에만 매몰되어갔다.
    단지 7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 8항에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연합3국이 확인하는 것으로 넘어갔을 뿐이다.

    같은 날 영국 총선결과가 최종 집계되었다. 80% 승리를 예상했던 전쟁영웅 처칠의 보수당이 참패하고 노동당이 승리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1883~1967)가 포츠담에 참석하고 처칠은 돌아갔다.

  • ▲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소련의 태평양함대는 1945년 8월 대일전 참전때 한반도로 남하, 청진, 나진, 원산을 기지로 삼았으며, 부산, 제주, 대한해협까지 장악하려다가  스탈린이 38선에 동의하자 원산으로 돌아갔다. 사진은 1940년대 한반도 근해에서 활약한 소련의 W식 잠수함. 해방3년간 제주4.3폭동 등을 일으킨 남한의 좌익들에게 소련제 무기를 몰래 보급하였다.
    ▲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소련의 태평양함대는 1945년 8월 대일전 참전때 한반도로 남하, 청진, 나진, 원산을 기지로 삼았으며, 부산, 제주, 대한해협까지 장악하려다가 스탈린이 38선에 동의하자 원산으로 돌아갔다. 사진은 1940년대 한반도 근해에서 활약한 소련의 W식 잠수함. 해방3년간 제주4.3폭동 등을 일으킨 남한의 좌익들에게 소련제 무기를 몰래 보급하였다.

    3. 포츠담선언문 서명에 스탈린 이름 빼다

    미국무장관 번즈(James F. Byrnes)가 주도한 포츠담 선언문 서명자 명단에서 스탈린의 이름이 빠졌다대신 중국의 장제스가 들어갔다갑자기 무슨 까닭인가미국의 설명은 ‘1941년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은 태평양전쟁의 비교전국이므로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불복시 섬멸전을 규정한 선언문에 서명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이었다요컨대소련에게는 참전자격이 없다는 메시지즉 참전 말라는 통보나 마찬가지다.

    그동안 포츠담회담에서는 미국이나 영국은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지도 않았다원자탄 성공이후 달라진 미국정부의 노선이 처음 냉전의 안개처럼 피어오른 장면이다선언문 사본을 받아본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발표를 늦춰달라 했지만 번즈는 이미 언론에 배포되어 안 된다고 잘랐다스탈린은 미국의 배신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4. 스탈린의 참전준비는 회담전 벌써 끝나 있었다 

    트루먼이 신무기를 가졌다고 말했을 때 스탈린은 즉각 알아차렸다.
    오래전부터 맨해튼 프로젝트에 심어놓은 과학자나 간첩 등 정보망을 통하여 원자탄 성공을 예측하고 있던 스탈린이다거의 실시간으로 개발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던 참이다예상보다 빠른 원폭성공을 확인하자 스탈린은 기존의 대일전 참전계획을 독려하고 나선다.

    독일 항복 3개월 뒤 참전하겠다고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약속했다그것은 8월이다소련군 참모본부는 그때부터 극동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시베리아 철도로 병력과 무기군장비를 계속 실어 날랐다당시 40개사단이던 극동군(사령관 알렉슨드르 바실레프스키 Aleksandr Vasilevsky)은 80개 사단으로 배나 커졌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루즈벨트로부터 확약 받은 만주사할린남부쿠릴열도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을 착착 진행시킨 것이었다중요한 작전은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 공격동시 점령을 목표로 한다특히 블라디보스톡 태평양함대는 신속한 한반도 부동항 상륙이 계획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군 공격작전을 성공시키려면 후퇴하는 일본군의 배후 차단은 상식이다바로 대규모 일본군의 퇴로 부산(釜山), 대마도까지도 선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탄 핵구름(1945.8.9).
    ▲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탄 핵구름(1945.8.9).

    5. 사상 최초의 원폭 투하...히로시마 쑥대밭 

    남태평양 티니언(Tinian) 섬에서 일본의 태풍이 잠자기를 기다리던 B-29 폭격기는 86일 새벽 245분에 이륙일본 열도를 향해 고공비행을 시작한다기장 티베츠(Paul W. Tibbets) 대령이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은 에놀라 게이’(Enola Gay) 폭격기에 원자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싣고 히로시마(廣島)를 찾아간다.
    당시 실험한 원폭은 두 개플로토늄탄이 길죽한 꼬마’ 리틀 보이우라늄탄은 통통한 팻맨’(fat man)이다.
    열도 상공을 선회한 에놀라 게이가 리틀보이를 투하한 시간은 아침 8시 15출근시간 히로시마는 76,000여개 건물중 7만개가 핵폭풍에 전소하고 11만명의 시민과 군인2만명이 즉사피폭자 14만명이 그해에 사망한다.

    포츠담에서 귀국하는 트루먼은 오거스타 함상에서 기쁨의 웃음을 터트린다.
    이 폭탄은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을 도발한 행위에 대한 보복이다포츠담 선언은 일본 국민들을 구하려는 것이었는데 일본 지도자들이 즉시 거부하였다만일 그들이 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본적 없는 파괴의 비’(rain of ruin)를 받아야 한다.” 백악관이 발표한 트루먼의 성명이다.

    6.원폭 투하’ 듣자마자 스탈린은 총공격명령 

    모스크바로 돌아온 스탈린은 급하다.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하여 소련을 제쳐놓고 단독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으면 절대 안된다원자탄을 쓰기 전에 참전하자아니다원자탄을 맞은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이 절호의 기회다.

    기회를 놓치면 미국이 원자탄을 무기로 소련까지 지배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빼낸 정보로 개발 중인 소련의 핵무기는 언제 성공할지 아직 막막하다. 

    86일 드디어 원폭 투하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작전개시총공격명령을 내린다.
    외상 몰로토프가 일본대사에게 선전포고문을 전달한 것이 모스크바 시간 88일 오후6포츠담회담 폐막과 함께 전투태세로 배치해 둔 3개방면군1극동방면군2극동1방면군바이칼방면군은 동시에 만주 국경지대와 한반도의 두만강을 넘어 쇄도하였다.

    그 시간 두 번째 원폭 팻맨을 탑재한 B-29가 일본열도로 들이닥친다.
    당초 목표는 큐슈(九州고쿠라(小倉)였으나 두꺼운 구름 때문에 선회하다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한다일본시간 89일 오전 11, 4만명이 즉사했다트루먼은 또 라디오로 진주만의 보복이다” 성명을 발표한다.

  • ▲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북위38도선에 '38'을 표시하는 병사.
    ▲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북위38도선에 '38'을 표시하는 병사.

    7. 소련군의 목표미군 상륙 전에 서울 점령? 

    두만강을 넘어온 소련군은 제1극동방면군 산하 제25연해주집단군의 사단장이던 치스차코프(Ivan H. Chistiakov)가 지휘하는 4만명 규모의 병력이다. 88일밤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경찰서 습격 방화하고나진(羅津)항엔 조명탄을 쏘아올려 일본 관동군의 물자와 창고를 불태우며 부두의 유류 드럼통이 모두 폭발하여 항구일대는 그야말로 불바다가 되었다웅기(雄基항에 소련 군함2척이 들어와 쏟아져 나온 소련군이 일제히 상륙작전을 벌였다. 13일엔 청진(淸津)에 함포사격, 15일까지 육군 1개사단과 전차부대가 상륙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사흘간의 전쟁은 18일 소련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일본군의 소련 침공 작전기지가 완전히 파괴되고 소련군은 열흘 만에 함경북도를 장악했다.
    서부지역에 쇄도한 소련군은 822일 평양을 점령하고 25일엔 황해도까지 장약한다
    일본 천황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항복방송(8.15)이 나간 지 불과 열흘 만에 소련군은 북한 전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다미군 선발대는 98일에야 인천에 들어온다.

    8. 38선 탄생 이야기 

    810일 일본이 항복의사를 밝힌 다음날 811미국정부 3(국무부전쟁부해군부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SWNCC)가 열렸다포츠담 회담 한 달 전에 트루먼이 소집한 군 수뇌회의에서 처음 한반도 작전문제를 포함한 소련 참전 대책을 논의한 뒤 두 달 만에야 이번엔 국무부까지 포함하여 일본 항복후의 미국정책을 결정하는 회의를 연 것이다늦어도 너무 늦었다스탈린은 이미 포츠담회담 전에 모든 참전 준비를 끝냈고 지금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에 공격물밀 듯이 전격작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811일 군부의 요구에 따라 포츠담선언의 조건부 수락을 내놓았다. ‘천황의 지위 유지가 항복 조건이다.
    미국은 즉각 거부하였다그리고 지금 3부조정위원회는 최종 방침을 결정하고 이를 문서화하느라 분주하다이 회의가 만든 것이 일반명령1‘(General Order No. One)이다.

    1항은 일본 천황과 일본 정부의 권위(authority)는 항복한 순간부터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것을 규정하고4항에서 일본의 궁극적인 정체(政體)는 일본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여 천황제 유지의 가능성을 일단 양보한 것이 되었다.
    이 유명한 <일반명령 1>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정해진 것이 38선이다.
    원자탄 투하로 소련의 참전 없이 일본의 항복을 받으려던 미국의 생각은 생각일 뿐일찌감치 물 건너갔다스탈린이 예상보다 빨리 선전포고를 발하고 만주와 한반도를 빠른 속도로 진격하기 때문이다미국은 당황하였다이대로 두면 한반도는 우려했던바 폴란드의 복사판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38선을 30분만에 그은 장교 트리오

    트루먼 대통령이 만든 SWNCC는 백악관 비서실 별채에 상주하였는데임시 차출된 엘리트 장교들 중에 ‘38을 뚝딱 만들어낸 3명이 들어있었다.
    바로 일반명령 1’ 작성을 담당한 팀의 조지 링컨(George A. Lincoln·1907~1975) 소장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III·1909~1977) 대령딘 러스크(Dean Rusk·1909~1994) 중령이 그들인데 모두 옥스퍼드 출신 30대중반 자칭 천재그룹이다.
    지난달 7월 포츠담에서 마셜의 지시를 받은 육군 작전국이 만들었던 계획안은 일본 열도는 물론 한반도까지 독일처럼 4개연합국이 도별로 분할 점령하는 것이었다이 안은 소련이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는 긴급 상황에선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3부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ames C. Dunnn)은 8월 11일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한 저지선으로서 미국이 수도 서울과 인천부산을 장악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시간은 새벽 2뉴욕 타임즈를 읽고 있던 링컨 소장은 본스틸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똑 같은 지시를 내린다본스틸과 러스크는 코리아 지도를 찾았으나 마땅한 게 없어 고민하다가 벽걸이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지도를 보았다이를 내려놓고 두 사람은 “30분쯤 궁리 끝에” 푸른 잉크로 서울과 인천을 포함하는 38선을 그어 링컨 소장에게 보고했다. (러스크 회고록: Dean Rusk & Chales Rusk [AS I SAW IT] 1990)
    이 안이 합동참모본부(JCS)와 3부조정위원회의 번스(James Byrnes) 국무장관스팀슨(H. Stimson) 전쟁장관포레스털(J. V. Forrestal) 해군장관의 검토를 거쳐 트루먼 대통령에게 올라가고 최종적으로 맥아더 연합군총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9. 스탈린연합군사령관 2명 제안 한반도 공동관리하자

     흔히 스탈린은 미국이 38선을 제안하자 뜻밖에 순순히 응했다고들 말한다과연 그랬던가
    뒷날 공개된 미국무부 문서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협의과정에서 스탈린은 한반도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할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미국측과 소련측의 두 사람으로 정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패망 후 일본영토 분할에 스탈린은 얄타회담서 약속받은 전리품(남만주철도남사할린쿠릴열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양국이 대등하게 나눠 갖자는 속셈을 드러냈다는 이야기이다.그리하여 스탈린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서울을 선점하려고 빠르게 남진했던 것이고미국이 38선을 제안했을 때 이미 38선을 넘어 개성(開城남쪽까지 내려와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미국은 물론 ‘2명의 연합군총사령관’ 제안을 거부한다스탈린은 자의반 타의반’ 수락한다.
    서울로 육박하던 소련군은 다시 38선 개성쪽으로 철수하였고한반도 동해로 내려오던 소련 함대는 후퇴 지시에 따라 U원산항으로 돌아갔다.

    스탈린은 왜 미국의 거부에 반항하지 못하고 물러갔던가원자탄 때문이다트투먼은 루즈벨트가 아니었다기다리자언제까지지금 미국의 기술을 훔쳐다가 개발 중인 소련의 핵실험이 성공할 때까지!

     스탈린의 부산 상륙’ 지령은 사실인가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면스탈린이 직접명령을 내렸다는 문서나 기록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대일전 참전을 앞두고 소련 외무부나 군부가 올린 보고서들이 간접증언을 해주고 있다소련 적군(赤軍:육군)과 해군 참모본부 문서에는 대일전시 점령지를 적시한 문서가 남아있다.
    아들은 얄타-포츠담에서 확약받은 땅만주철도사할린 남부쿠릴열도는 당연히 점령작전을 짜야 하고일본군의 퇴로에 해당하는 대마도부산항제주도 역시 장악차단해야 한다고 적었다.(해군 국제법부장 니콜라이 보로코프 작성)
    특히 소련 외무부 극동국 문서는 한반도 신탁통치시 점령지로 부동항들에 집중하였다즉 인천진해부산제주항 등은 어느 경우라도 소련이 맡아야한다고 스탈린에 건의하였다.
    일본의 소련문제 전문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등 연구자들도 이런 자료들을 인용, 38선이 아니었다면 소련군의 남한점령 가능성은 높았다는 추정을 말하고 있다. (와다 하루키 [소련의 조선정책외 논문과 저서들).
    다시 말하면스탈린의 문자화된 명령서는 존재하지 않으나 구두결재 등의 가능성또는 현장 지휘관들의 충성경쟁에 따른 부산상륙 시도 등은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이야기다당시 일본 해군은 괴멸상태였고미군 주력은 멀리 오키나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베리야를 질책...원자탄 개발 총력전 돌입

    포츠담 회담 일주일째 되는 날트루먼이 스탈린에게 신무기를 은근히 자랑하던 724스탈린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에게 전화를 걸었다우리는 어찌 되었느냐한다 한다하는 원자폭탄 실험 결과는 무엇이냐?”
    “2주 전에 실험한다 했는데 계획했던 폭발 여부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습니다
    스탈린이 폭발했다지금껏 미국서 빼내온 정보들이 모두 거짓 아니냐베리야는 미국의 간첩들 손에 농락당하는 것이냐펄펄 뛰는 스탈린은 미국이 유럽과 소련을 지배하면 어쩔것이냐고 식식거렸다. “그렇게는 안돼...안돼...” 미국의 핵무기독점은 절대로 안된다고 소리쳤다. (안드레이 그로미코 [회고록문학사상사, 1989)
    스탈린의 특별지시로 베리야가 총지휘하는 특별위원회가 출범, ‘원자력 산업이라는 이름아애 어마어마한 총력전이 벌어진다우라늄 농축 기업들과 원자로원심분리기폭탄 제조 공장들이 단기간에 설립됐다우랄 산맥과 시베리아카자흐스탄 등 깊숙한 곳에 비밀 산업단지들이 나타났다그 도시들의 정체는 핵 관련자들만 아는 아톰 그라드’(핵도시), 그리고 4년후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에서 원자탄 폭발실험 성공!

    스탈린의 기다림은 끝났다남한에서 완전철수한 미군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마오쩌둥이 중국대륙을 장악한 다음해 6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침략전쟁을 개시한다.

  • ▲ 1946년 도쿄 미군사령부로 맥아더 장군을 방문한 일본왕 히로히토. 거구의 미국인 옆에 초등학생처럼 차렷자세로 서 있는 이 사진이 공개되자 일본인들은 '신 위의 신'을 만난 듯 맥아더 선풍이 일었다.
    ▲ 1946년 도쿄 미군사령부로 맥아더 장군을 방문한 일본왕 히로히토. 거구의 미국인 옆에 초등학생처럼 차렷자세로 서 있는 이 사진이 공개되자 일본인들은 '신 위의 신'을 만난 듯 맥아더 선풍이 일었다.

    10. 왜 패전국 일본을 분할 않고 한반도를 잘랐나? 

    해방 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런 질문이 이따금 터져나온다패전국은 일본인데 왜 미국과 연합국은 독일처럼 일본열도를 분할하지 않고 엉뚱한 한반도에 38선을 그어 한국을 분단시켰는가?”
    맞는 말이다아직도 분단의 고통에 시달리는 한국인으로서 생각할수록 원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또 한편으로 이런 질문은 미국에 분단의 원흉이라는 낙인을 찍어 반미감정을 유발하려는 반미세력의 가스라이팅이기도 하다진정 미국이 왜 그랬을까앞에서 보았지만 좀더 역사의 뒤안을 뒤져봐야 진실을 알 수 있다.

     A. 미국의 일본열도 분할점령 계획 

    1945년 2월 패전 독일의 4대국 분할점령을 결정한 얄타회담 3대국은 일본도 패망시 독일에 준하는 분할통치를 실시하자는 대강에 합의했다한반도 분단문제는 공식거론조차 없었다.

    히틀러 자살로 끝난 독일패전에 이어 미국은 일본패망시 전후처리를 위해 포츠담회담을 개최하는데그에 앞서 합동참모본부 산하 합동전쟁계획위원회(JWPC)는 일본을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등 4개국이 분할 통치하는 지도를 제시했다요지는 다음과 같다.

    미국=도쿄를 포함한 관동지역을 중심으로 혼슈(本州중부지역 통치.
    소련=혼슈 동북지방과 홋카이도 점령 통치.
    중국(장개석 정부)=시코쿠(四國점령가장 작은 지역이다.
    영국=히로시마 등 일본 서남지역과 큐슈(九州일원 차지.

    이런 내용은 일본학자 이오키베 마코토(五百旗頭眞)의 [일본점령정책]1985, 중앙공론사등과 군사전문가 하나다 토모유키(花田智之)의 논문들에서 확인된다.
    한반도에 대한 처리원측은 얄타에서도 합의했던 3~4대국 신탁통치로 굳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분할안은 포츠담선언 이후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함께 폐기되었고그 대신에 한반도 38선 남북분할이란 새로운 구도가 등장한다일본 분할 원안대로 실시했다면그리고 한반도 4대국 신탁통치 실시후 반환되었다면, 80년간의 남북분단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엔 가정법(If)이 없다실증주의 역사학의 태두 랑케(Leopold Ranke)의 지적처럼 역사는 팩트의 동물일뿐거기 가정법은 불필요한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영 등 연합국이 일본분할점령을 포기하기까지엔 당시 급변하는 역사적 사실(fact)’들이 새롭게 겹치면서 역사 주체들의 판단을 뒤엎은 내막은 지금도 한국이 참고할만만 가치가 있다무엇보다 패전국 일본인들의 천황제 수호’ 투쟁이 그것이다.

     B. 패전 일본의 마지막 몸부림...“천황제 수호 

    군국 일본의 전쟁지도부가 무조건 항복하라는 포츠담 선언을 받느냐 마느냐받는다면 어떤 조건을 붙이느냐우왕좌왕 중에 원자탄 두방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벼랑 끝에 몰린 일본은 포츠담회담 직전에 스위스에서 미국 정보기관과 비밀협상을 벌였다초점은 천황제의 존속을 보장해주면 항복하겠다는 것이에 대해 미국측은 항복하면 천황제를 그대로 두겠다고 했다지난 2002년 스위스 바젤대학 도서관에서 공개된 당시 문서를 보면약 한달동안 무조건 항복이 먼저“ ”천황제 보존이 먼저” 식의 줄다리기 대화록이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중단된다. (일본 교토통신, 2002, 2,2일자)

    마침내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선전포고를 하자이튿날 8월 10일 일본 전쟁지휘부는 천황 앞의 어전회의를 긴급소집한다.
    "1억의 국민이 모조리 쓰러진다해도 우리는 대의에 살아야합니다소련은 배신(조약파기)의 나라미국은 비인도(원폭)의 나라이런 적들에게 천황제 보장 없이 황실을 맡기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4가지 조건(천황제 유지일본 주권 보장일본 자체 무장해제일본에 의한 전범재판)이 수용된다면 포츠담 선언 수락에 찬성합니다."
    결사항전을 강행해왔던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대장의 마지막 절규였다.
    이같은 일본의 조건을 본 미국은 천황의 지위는 연합군사령부의 관리 하에 둔다'고 애매한 원론적 답변을 보낸다.
    이에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총리는 항복이 지연될 경우 일본이 독일처럼 분단될 것이 뻔하므로, 814일 어전회의에서 미국의 답변을 수용했고천황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
    과격파 장교들은 천황이 연합군의 포로가 된다며 그날 밤 쿠데타를 일으킨다이튿날 15일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자 고레치카 대장은 할복 자살하고쿠데타에 실패한 장교들은 집단 자살하였다.

     C. ”일본은 원자탄보다 소련이 무서워 항복했다 

    일본은 히로시마 원자탄 폭격을 맞고도 왜 즉시 항복을 안했는가사흘을 기다린 미국이 추가로 나가사키 원폭을 감행했는데도 일본 전쟁지도부가 닷새나 더 미적거린 것은 미스터리라며 논쟁이 일었다그에 대한 해답을 일본학자 하세가와 쓰요시(長谷川毅)가 이렇게 내놓았다.

    일본은 미국 원자탄보다 소련 공산당의 침공이 두려워 항복했다

    기존의 원폭 항복설을 깡그리 뒤집은 것즉 소련과 싸워 지면 천황제가 없어지고 공산화되어 일본국체 자체가 사라질 위험 때문에일본지도부는 소련의 참전 앞에 굴복했다는 말이다.

    (Hasegawa Tsuyoshi [Racing the Enemy: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 2006. 하세가와 쓰요시 [종전의 설계자들한승동 번역메디치미디어, 2019).

    어느 나라에 항복해야 좋은가독일이 분활되는 것을 목격한 일본은 전후 국토분할이 무엇보다 무서웠다소련군이 본토에 진격하면 절대 안되는 이유였다공산국 소련이 아니라 자유민주국 미국으로부터 천황제 보장을 받아 항복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이닷새동안 토론한 일본정부의 결론이었다히로히토 역시 공산당 공포에 떨면서 황통을 지키기 위해 미국을 선택했다고 말한다특히 천황의 무죄론을 누르고 그가 실질적인 전쟁 지휘자이며 항복 책임자임을 주장하였다고 한다이렇듯 하세가와의 천황변호를 위한 새로운 접근법은소련의 야심과 한반도 분단에 이르기까지 일본 보수진영의 주장을 재해석해 줌으로써 세계에 널리 보급된다.

    이에 힘을 얻은 일본보수는 하세가와설에도 반발하는 척, ”천황은 상징적 존재로 완전무죄모든 전쟁책임은 순전히 군부의 것으로 돌려 처벌도 도조 히데키(東条英機등 최소한으로 국한시켰다동시에 일본 특유의 피해자 코스프레’ 연출을 통해 일본인들은 세계최초의 원폭 피해자로 분식하여 미국의 비인도성을 겨냥, ‘평화 세일즈에 열을 올려왔던 전후 역사가 저간의 내막을 설명해준다.

      일본 여성들맥아더에 편지 당신 아이 낳고싶다
    임금을 천황이라 부르며 800만 신()들을 주재하는 신중의 신으로 떠받들기 2000일본 국민에게 천황은 세계를 지배하는 하늘의 맏아들이다이들의 신권사상은 세상에 무엇보다 강하게 뭉쳐져서 아무리 강한 나라도 천황 앞에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로 알았으며 그러기에 천황군은 머지않아 미국까지 정복할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이 이승만이다. (이승만 지음 [JAPAN INSIDE OUT])
    그 천황이 점령군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 허리를 굽히고 나란히 선 모습이 보도되자 국민들은 기가 팍 죽었다거구의 아버지와 어린 아들 같은 신체적 대비가 일으킨 경악과 인종적 열등감게다가 다음달 9월 천황이 인간선언을 반포하지 않는가.
    맥아더는 신이다!” 왜소한 천황신을 압도하는 거구의 골리앗은 신중의 신을 굴복시킨 천상 최고의 신이어야 한다신권숭배 일인들은 귀축(鬼畜)이라 멸시 저주하던 백인 장군을 드디어 일본을 구한 구제주라는 찬양까지 비약한다강자에게 굴복하는 전국시대 사무라이 전통, “1억 이 쓰러져도 천황만은 살려달라고 남녀노소 1익인구가 엎드려 애걸복걸이다.
    점령통치 5년간 일본의 지배자 맥아더는 숭배와 사랑의 대상우익세력은 일본의 공산화를 막아달라며 소련의 일본진주를 극력반대하였고급기야 여성들의 열광적 편지공세는 오늘날 아이돌 광팬도 저리가라였다바로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사연들이 그것이다. (John W. Dower [Embracing Defeat] 1999, 최은석 옮김 [패배를 껴안고민음사, 2009)

    여성들 뿐이랴...옛부터 빨갱이로 불린 좌파 언론 [아사히], 최고령 [마이니치신문도 맥아더를 관대한 지도자의 자비심’ 운운 찬양 사설을 이어갔다오로지 천황제 일본 국체를 사수(死守)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은 신민들의 광기 그대로였던 것이다.

  • D. 미국이 천황제 존속을 선택한 이유 

    과연 맥아더나 미국정부의 천황제 존속 결심이 일본인들의 추파공세에 넘어간 결과일까.
    물론 아니다군사전략의 영웅 맥아더는 새 시대의 새 질서를 구축해야하는 미국의 손익부터 면밀히 따진다전후 세계는 자유민주-공산독재 양대세력의 대결이 불가피한 냉전시대임은 절친 이승만한테 배워서 알고 있다미국이 자유진영을 이끌어야 할 글로벌 리더로 올라서려면 이제 아시아-태평양시대의 전략지도를 다시 그려야한다.

    첫째천황제를 페지하면 일본에 내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그 경우 미군 병력이 80~100만이 필요하게 될 것인데이는 전혀 불필요한 낭비다.
    둘째소련의 국제공산주의가 침투하면 일본의 공산화 의험성이 크다.
    셋째따라서 열도의 4강국 분활통치는 비현실적미국의 단독통치가 불가피하다.
    넷째동시에 일본열도를 반공기지로 구축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미국 보루로 만들자.
    이 보고서를 검토한 미합참은 물론트루먼 대통령도 흔쾌히 결재하였다. (하세가와 쓰요시앞의 책)
    일본열도 분활점령계획 취소그대신 한반도 38선 설정북한은 소련 관리” 그날로 트루먼이 3대국에 날린 통지문에 스탈린이 또 반발하며 엉큼한 속내를 보인다앞에서 소개한 ‘2명의 사령관이 한반도 공동관리그리고 홋카이도에 대한 야심이다.홋카이도 절반이라도 나눠 갖자” 스탈린의 간청 2개를 트루먼이 단칼에 자르자 스탈린은 쑥 들어갔다일본 열도의 분할대신 한반도만 허리가 잘렸던 것이다. 

    38선 탄생--요약문답 

    질문A: 미국이 38선을 그었으므로 분단의 원흉’ 아닌가?

    미국은 38선을 그었으나 분단까지 생각도 못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이 확인해준다.
    미국이 38선을 설정한 목적은 한반도로 쇄도하는 소련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왜냐하면 종전후 한반도는 소련을 포함한 4개 연합국들이 신탁통치하기로 카이로회담테헤란회담-얄타회담-포츠담회담에서 2년간 네 차례나 합의하고 있었으며소련이 한반 도를 단독점령하면 국제협약 파기는 물론극동까지 동유럽처럼 상실하기 때문이다.

    질문B: 만약 미국이 소련군의 남진을 막지 않았다면그때 한반도는 통일되었을 것이다.

    물론이다소련군은 부산제주까지 장악할 계획이었으므로 당연히 소련지배하의 통일 독립이 이루어졌을 것이며 분단의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일본식민지시대 항일투쟁을 벌 인 독립운동가들 중에 공산세력의 목표가 바로 그것이었다즉 한반도에서 일본이 물러 가면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 되는 것그랬다면 한반도엔 대한민국 건국도 없었을 테 고오늘 날 남한도 북한과 똑같은 김일성 왕조체제 지배아래 살고 있으리란 점이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해방후 소련의 지휘에 따라 북한단독정권 수립에 참여한 좌익 독립 운동가들은 6.25침략 패배후 김일성이 패전책임을 씌워 남김없이 청소했다는 사실이다민간인들도 예외가 없었음은 물론이다자칭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이 슬프다.

    질문C여하튼 미국은 분단의 원인제공자’ 아닌가.

    미국은 물론 38선에 동의한 소련도 공범이래야 맞는다그때 소련이 반대했다면 38선 은 그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소련의 빠른 동의에 미국도 놀랐다고 한다.

    질문D: 그러면 분단을 고착시킨 진짜 분단의 원흉은 누구인가남한 단독정권을 세운 미 국과 친미 꼭두각시’ 이승만이 맞지 않나?

    단독정권이라면 소련이 북한에 먼저 세웠다그것도 해방 6개월 만에남한보다 2년 개월이나 빨랐다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좀 더 상세한 답변은 다음 장부터 읽어보기 바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