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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주의를 국시로 삼은 세종대왕이래, 조선500년간 ‘반외세’ 투쟁기록은 찾기 힘들다.
병자호란 무렵의 ‘반청(反淸)기류’도 명나라에의 충성의무를 제도화한 숭명(崇明)체제의 반작용 정도였을 뿐, 금방 “청나라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는가. 본격적인 반외세 투쟁이라면 망국후 항일투쟁인데, 그 이전에 고종시절 이미 러시아-프랑스-일본 등과 싸워 연승을 거둔 청년 이승만의 역사기록은 아직도 무지의 어둠 속에 묻혀있다.◆23세 이승만 기자, 러시아와 싸워 2전 2승
▶제1차전=스탈린이 1943년 테헤란회담에서 루즈벨트에게 ‘부산 할양’을 요구한 것은 무려 45년만에 나온 ‘설욕의 요구’였다. 즉, 1898년 1월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가 고종 황제에게 부산 절영도(絶影島:영도)의 조차(措借)를 요구하여 밀약을 맺었는데, 그때 이것을 무효화시킨 인물이 23세 청년 이승만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명성황후(민비)를 무참히 살해한 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한 고종이 친러시아 정책을 따를 때 일이다. 배재학당 학생회 ‘협성회’의 회장이던 이승만은 1898년 1월1일자로 최초의 순한글 주간지 [협성회 회보]를 창간, 주필이 되었다.
3월에 고종 황제와 러시아의 밀약을 거침없이 폭로하는 대박을 터트린다.
즉,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 부산을 확보하고 일본의 대류진출을 막기위해 영동를 거점 삼으려는 것, 이를 탐지한 독립협회는 ‘국권수호’ 상소를 올렸고 이승만은 이를 신문 논설로 거센 저항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에 땅을 좀 빌려주었다고 해서 동맹제국을 다 같이 공평히 대하고자 한다면 삼천리 강산이 몇조각이나 남겠으며 동서양 70여국을 무엇으로 정답게 대접하리오....전국토를 다 줘도 빌려주는 것이라 괜찮단 말인가,..모두 위를 꾀어 물건을 탈취하자는 도적이라..“([협성회회보] 1898년3월19일자)
동시에 독립협회는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인기 연사 이승만이 시민들에게 호소한다. ”대한 1,200만 백성들은 내 나라 일이 내집안 일로 아시고 다 모여서 시비합시다“
결국 고종과 러시아는 부산 영도의 조차를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청년 언론인 23세 기자 이승만이 처음 펼친 반외세(反外勢) 투쟁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록이다.
▶제2차전=이어서 이승만은 4월9일자로 [매일신문]을 창간한다. 한국최초의 민간인 일간지였다. ”해야할 말이 산처럼 쌓여 주간지로는 안되겠다“며 역시 순한글로 찍는 일간지를 발간하고 잇따라 [제국신문]도 창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엔 사상최초의 민간 일간지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매일신문]에서 두 번째 ‘대특종’을 터트렸다.
이 기사 역시 러시아-프랑스가 비밀리에 고종과 맺은 대규모 비밀거래를 폭로한 것. 그것은 한국언론사상 최초의 ‘국제필화사건’으로 비화한다.내용은,◉러시아가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인근 토지를 전부 산다는 것, ◉프랑스가 평양 광산을 채굴하여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에 쓴다는 것 등이다. 즉각 외교문제로 번져 양국은 사장겸 주필-기자인 ”이승만을 처벌하라“고 고종와 외무(외교부)를 압박하였다. 외교부는 오히려 이승만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이승만은 또 논설을 쓴다.
”대신이 외국인이 아니고 외부가 외국관청이 아니거늘, 나라일을 외국과 몰래 논하면서 자기 백성을 모르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중략)...우리가 우리나라를 위하지 말고 외국을 돕는 신문을 만들란 말인가...“ ([매일신문]1898년 5월16~17일자)
이번에도 이승만은 대대적인 신문보도와 거리 집회로써 한러은행(韓露銀行) 설립을 포함하여 강대국 러시아의 뒷거래를 말끔히 백지화시키고 말았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그후 러일전쟁 패배로 일본에게 한국을 빼앗기기 전에 20대 한국청년 아승만에게 두 번이나 쓰라린 패배를 당하는 국가적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이때 이승만 주필은 서울에서 일인들이 발간하는 [한성신보]와도 지면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이승만의 반외세투쟁은 이처럼 구한말 20대 초반부터 시작되었고, 평생을 강대국들과의 전쟁에 바치게 된다.
그 러시아를 무너트린 공산정권 스탈린까지 얼마나 억울했던지 40여년이 지난 뒤에도 기회가 오자 “러일전쟁 이전 상태로 수복‘을 외치며 한반도 부동항들을 ‘탈환’하겠다고 나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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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 시어도어 루즈벨트, 이승만, 프랭클린 루즈벨트. 2명의 루즈벨트는 '아저씨와 조카'뻘이다.
◆ 이승만과 2명의 루즈벨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세상을 떠났다. 1945년 얄타회담 폐막 두 달 되는 4월12일 향년 63세.
짧고 굵게 살았던 한 시대의 영웅—민주주의 모범국 미국에서 유일하게 대통령을 4선 연임한 신기록을 비롯하여 대공황을 돌파한 뉴딜정책, 노변정담으로 국민들을 사로잡은 카리스마의 죽음은 엄청난 추모바람을 일으켰다.이승만 역시 애도의 전보를 보냈지만 새로운 국면에 대응해야할 과제가 산더미였다.
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했던 스승 윌슨 대통령의 나약한 이상주의와 달리, 루즈벨트의 강력한 개혁주의 노선에 끌리기도 했던 이승만이다.
그러나 <두 명의 루즈벨트>가 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역사의 격랑에 또 다시 당할 수는 없다.
얄타회담의 진실은 무엇이고, 루즈벨트의 승계자 트루먼 대통령의 노선은 무엇인가?
다행히도 '한미협회'의 이사장으로 모신 해리스 목사가 트루먼과 가깝다. 미의회의 원목 해리스는 이승만이 멘토로 부르는 정계의 거물, 상원의장을 겸한 부통령 트루먼과의 네트워크가 이제 더욱 든든한 '백악관 줄'이 되었다.▶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미국26대 대통령)
청년 이승만이 한국민간인 최초로 미국대통령 T. 루즈벨트를 만난 것은 도미휴학 첫해 1905년 8월초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길 위기, 독립지원을 호소한 밀서를 내놓은 이승만에게 루즈벨트는 ”한국공사관의 직인을 받아오면 접수하겠다“고 말했다. 뛸 듯이 기뻐한 이승만은 워싱턴 주미공사관에 달려갔으나 김유정 공사는 한사코 거부했다. 이미 그는 일본에 포섭된 후였던 것이다.
낙망한 이승만이 자초지종을 알게된 것은 그로부터 19년후 1924년 미국대학교수가 폭로한 ‘태프트-가쓰라 밀약’ 내용을 보고나서였다. 즉, T.루즈벨트는 이승만을 접견하기 일주일전 7월27일 이미 육군장관 태프트를 일본에 보내 수상 가쓰라와 밀약을 맺은 뒤였다. 밀약 내용은 잘 알려진대로 ‘일본의 조선 지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양국이 양해한 것이다. 그 3개월후 일본은 고종황제를 겁박하여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조선 내정을 감독 대행한다.
당시 T. 루즈벨트의 한국관은 일본인과 같았다. 하버드 동창생 가네코 켄타로(金子堅太郞)가 먹여 주는대로 먹었다.”나는 조선이 일본땅이 되는 걸 빨리 보고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T.루즈벨트는 러일전쟁 전후처리 협상을 ”일본을 위해” 중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미국인 최초로 받았다.이승만은 루즈벨트에게 보기좋게 속아넘어갔음을 알자 격분하였다.
믿었던 기독교국가 미국마저 이럴 수 있다니...이를 악물었다. 그때부터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조선을 일본에 넘겨준 미국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미국은 배신자’란 키워드를 기회가 올 때마다 활용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 국제적 범죄자!“ 이승만의 용미(用美) 전술에 그것은 특효약이었다. 이승만 특유의 기독교적 외교 전략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그 특효약은 ‘카이로선언’을 만들어내고 대한민국 건국 외교와 한미동맹 체결에도 큰 효력을 발휘한다.▶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미국 32대 대통령)
두 명의 루즈벨트 관계는 한국식으로 12촌 아저씨와 조카뻘쯤 된다고 한다. F. 루즈벨트는 스페인전쟁과 하와이, 쿠바, 필리핀 등 지배권 확장에 용명을 날린 T. 루즈벨트를 정치적 롤모델로 삼았으며, 그 아저씨의 친조카딸 엘리너( Eleanor Roosevelt,1884~1962)와 결혼까지 한다. 결혼식에서 신부의 손을 잡고 들어가 조카에게 넘겨주는 장인역을 맡은 이도 T.루즈벨트, 그만큼 두명의 루즈벨트는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밀착된 관계였다.
이승만이 F.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처음 선물을 보낸 것은 1941년 8월 출간한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일본의 내막: 오늘의 도전]이다.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서구 세계가 일본의 허위선전에 휩쓸려 아시아문제에 몽매하므로, 일본의 한국합방 사기극, 만주병탄, 중국 침략정책 등을 소상하게 알려주기 위함.
둘째, 비교적 공정한 미-영의 공론을 일으켜 중국의 항일전을 후원하게 하며 한국의 자주독립에 호응하도록 유도하기 위함.
셋째, 한글로 쓰면 무시되나 영문서책은 영속적 참고가 되므로, 영어권 사람들이 읽고 잘못된 자국의 동양정책의 변경을 주장하게 함이라.이승만은 이 책을 루즈벨트 대통령 부부, 루즈벨트의 최측근 특별보좌관 홉킨스(Harry Hopkins), 육군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 국무장관 헐(Cordell Hull), 국무성 극동 전문가 혼벡(Stanley K. Hornbeck) 박사등을 비롯, 많은 지도층에게 보냈다.
이승만이 이 책을 영문으로 저술한 것은 영어권 국가들의 여론을 일으켜 미국이 일본을 빨리 쳐서 멸망시켜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국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 꿈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이야, 출간 4개월만에 일본이 미국을 기습하고 미국이 선전포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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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 박사가 1941년 8월 워싱턴에서 집필한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 표지(왼쪽), 오른쪽은 번역판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비봉출판사 발행 표지.
◆ ‘카이로 선언’을 끌어낸 ‘JAPAN INSIDE OUT’
오랜 세월 우리는 ‘카이로선언’에 ‘한국 독립 약속’ 조항이 독립된 문장으로 강조된 과정에 대하여 설왕설래 해왔다. 일부에선 임시정부 김구가 장제스 중국총통에게 부탁한 결과라고 주장해왔으나 현장 기록은 오히려 그 반대였음도 드러나 있다.
이것부터 말하자면, 그때 카이로에서 루즈벨트가 장제스를 단독초청 만찬을 하면서 중국의 희망사항을 상세히 들었는데, 이튿날 처칠과 오찬에서 루즈벨트는 이렇게 말했다.”장총통은 만주와 한반도의 재점령을 포함한 광범위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중국의 오래된 식민지 한반도를 다시 장악하려는 목적이 깔려있다는 것이었다. (FRUS, Conference at Cairo & Teheran, 1943. p334).
그러면 루즈벨트 대통령은 과연 이승만이 8월에 보낸 책 [JAPAN INSIDE OUT]을 읽었을까.
처음엔 안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이 있고서야 이승만의 책이 ”예언서”라 불릴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까 그 무렵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곧 미군 당국이 그 책을 대일전에 참전할 병사들의 교재로 채택하였기 때문이다.▶루즈벨트의 라디오 방송=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대일선전포고 두달 뒤 다음해 2월23일 루즈벨트가 조지워싱턴 탄생 123주년을 맞아 전국민에 방송한 기념연설의 한 대목이다.
거기서 루즈벨트는 대일전쟁상황을 국민에게 보고하면서 “일본에 의한 한국인의 노예상태”를 언급했던 것이다. 이 ‘한국인의 노예상태’란 어휘는 이승만의 책에서 강조된 용어였다.▶이승만의 감격=이 연설을 들은 이승만은 누구보다 반가웠다. 3.1절 36주년을 맞아 이승만은 워싱턴 라파예트 호텔(Lafayette Hotel) 미러룸(Mirror Room)에서 2월27일 대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y conference)를 열었는데, ‘한미협회’등 100여명의 VIP들은 모두 미국인 지도층이었고, 한국인은 이승만 박사 혼자뿐이었다. 한인대표 백여명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인맥을 갖추고 있는 이승만이 개회사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을 찬양한다. .“지난 월요일 저녁 라디오 연설에서 ‘한국국민에 대해 언급’하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그의 연설은 여러해동안 미국의 최고관리가 한국국민을 언급한 최초의 연설로서 무한히 고무적인 것입니다. The people of Korea! 이 한마디에 우리는 얼마나 감격했습니까?” 루즈벨트는 “한국인민의 노예상태(Enst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를 인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책에 쓴 주장이었기에 이승만은 더욱 감동한 것이었다. 출판 목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한가지 더 설명하여 분위기를 돋군다. 그것은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 엘리녀 여사가 한국본국의 이재민 돕기 모금운동에 나선 일이다. 이승만의 로비임은 물론이다.
“일본에 최후의 심판이 다가옵니다. 자유는 결코 죽지않습니다. 보십시오! 자유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인간의 자유와 승리의 해안으로!”
3월1일까지 계속된 자유대회는 미국방송이 전국에 중계하였다.
▶해리 홉킨스의 기억력=이보다 더 결정적인 문구는 ‘카이로 선언문’에 나온다.
다음해 1943년 11월22~26일 카이로에서 열린 루즈벨트, 처칠, 장제스 회담, 스탈린은 건강을 핑계로 빠졌지만 중국 장제스 참석에 반발한 것이었다. 회담 3일째 24일 루즈벨트 숙소에서 카이로선언문 초안이 작성된다.작성자는 루즈벨트의 ‘그림자’로 불리는 해리 홉킨스, 기억력이 정확하기로 정평이 나서 총애받는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그는 준비한 메모도 없이 기억력만으로 초안을 구술하고 코넬리우스(Albert Cornelius) 준위가 타이핑했다. 한국독립관련 독립조항은 이러하다.
「We are mindful of the treacherous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by Japan, and are determined that that country,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after the downfall of Japan, shall become a free and independent country」
「우리는 일본에 의한 한국인민의 배신적 노예화에 유의하여, 일본의 패망후 가능한한 가장 빠른 시기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 되게 할 것을 결의하였다」카이로선언 전문을 보면 다른 지역은 그냥 'other territories'로 표기하면서 유독 Koea의 독립문제만 별도로 독립시켜놓았다.
왜 그랬을까. 홉킨스가 작성한 초안을 루즈벨트 대통령도 동의한다. 두 사람 모두 ‘JAPAN INSIDE OUT’을 읽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기억력 좋은 홉킨스 두뇌에 각인된 이승만의 주장 ‘treacherous enslavement’를 그대로 인용안 것이 그 증거이다. 이 '배신적 노예화'란 문구에는 이승만이 일본믜 배신만이 아니라 미국의 배신까지도 함축한 것이었다.더구나 이 책이 판매된지 4개월만에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터지자, 이승만은 '예언자'가 되고 저서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때 일본과 전쟁하는 미국 정부는 이 책을 군사교육용으로 배포하였으니 대통령과 군부가 열독자였음을 증언하는 조치 아니겠는가. 그리고 2년후 카이로회담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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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년 11월27일 카이로에서 '카이로 선언'을 결정 발표한 3국 수뇌들과 수행원들. 앞줄 왼쪽부터 중국 장제스,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문제의 문구 ‘in due course’가 등장한 과정◀
위에서 본바와 같이 홉킨스의 초안에는 ‘at the earliset possible moment’로 적시한 독립시기 표현이 왜 ‘in due course’로 둔갑하게 되었는가.
‘가능한한 가장 빠른 시기’를 ‘적당한 과정을 거쳐’ 또는 ‘적당한 시기’로 수정되었다.◉제1 수정자 루즈벨트=해리 홉킨스가 초안을 제출하자 이를 검토한 루즈벨트가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구절만 연필로 주욱 그었다. 그리고는 ’at the proper moment’라고 써넣었다. '가능한한 빠른 시기'를 ‘적절한 시기’로 바꾼 것이다. 왜 그랬을까? 루즈벨트 머릿속에는 그의 구상에 따라 ‘신탁통치’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홉킨스가 루즈벨트 수정안을 중국 장제스에게 제출하자 그는 “미국안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영국, 한국의 독립문제 문서화 반대..."아예 전문 삭제하자"***
◉최종 수정안 처칠=영국은 당초부터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문서화를 반대하고 나섰다.
말할 것도 없이 인도와 동남아 등 영국식민지들의 독립운동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영국 외차관 캐도건(Alexander Cadogan)이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일본통치로부터 이탈시킨다”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영국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아예 한국 독립관련 조항을 전문 삭제하자”고 나왔다. 합의는 회담 폐막전날에도 제자리걸음이다.
이때 노벨문학상의 문장가를 자처하는 처칠이 나선다. 그가 손질한 수정안은 이렇다.「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결국 3국은 처칠 수정안에 최종 합의한다. 이승만이 강조한 ‘배신적(treacherous)’가 빠지고 독립시기는 안개속으로 사라졌다.
신앙깊은 애민사업가 해리 홉킨스가 한국민의 입장에서 ‘독립시기’ 초안을 잡았다면, 루즈벨트와 처칠은 자신의 편견이나 인종차별 및 자국의 국가이기주의에 따른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번에도 한국측엔 한마디 상의도 없는 패권주의 그것이다.한국의 운명에 모호성과 불투명성을 덮어씌워 민족적 비극을 초래한 처칠은 6.25때도 앞장서 일방적 휴전을 강요하고 중공 편을 들었으며, 반공포로 석방 때는 “이승만 제거”를 외친 인물이다.
◆세계를 움직인 책...‘냉전시대’ 도래를 예언
‘카이로선언’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친 책 [JAPAN INSIDE OUT]은 [독립정신]과 함께 이승만이 집필한 2대 명저의 하나이다.
평생 ‘말과 글’로 독립운동과 국가통치를 수행한 ‘학자 대통령‘ 이승만만큼 저술을 많이 한 지도자도 세계적으로 드물 것이다. 단행본만 5권, 직접발간한 신문잡지와 일기 및 서한집등 수십만건의 문서와 자료를 남겼다.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소장)
[독립정신]은 29세때 한성감옥에서 몰래 순한글로 쓴 국민계몽서, 사상서, 대한민국 건국 설계도다. 그는 이책에 쓴대로 독립운동을 하고 자기가 그려놓은 그림에 딱 맞는 나라를 세웠다.
66세때 내놓은 영문서 [일본의 내막: JAPAN INSIDE OUT]은 세계를 움직인 도화선이다.전15장으로 구성된 요점은, ⚫일본의 신권주의 & 군국주의 & 팽창주의 실체 폭로, ⚫일본의 미국 공격을 경고, ⚫미국의 한국 배신 폭로, ⚫소련 공산주의를 처음 전체주의로 규정, ⚫동서 냉전시대의 도래를 예언한다. 그리고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한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두 책 모두 정치사상가 이승만의 이념 철학 신앙과 역사관, 국가관 세계관이 불꽃 튄다.♥한마디로 이 책은 필연적으로 다가 올 ’미-일 전쟁‘에 대하여 무감각한 미국을 각성시켜 침략주의 일본을 멸망시킴으로서 한국독립을 비롯한 자유세계의 평화를 지키라는 탄원서이기도 하다. 여기 [JAPAN INSIDE OUT]에서 몇 문장만 골라 읽어보자.
⚫산불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지연시키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산불을 저절로 꺼지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태평양을 일본의 ’뒤뜰’이라고 말한다.
미국은 아직도 한국인들에게 “그것은 우리일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불가피한 미-일전쟁은 기독교와 신토(神道)라는 선과 악의 아마겟돈(Amageddon:요한게시록)이 될 것이다.
⚫일본이 세계정복을 꿈꿀 수 있게 된 것은 미국이 1882년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파기함으로써 한국이 주권을 상실하면서였다. 조약상 조선을 위해 행사해야앴던 ‘거중조정(good office)’의무를 저버린 미국은 약탈자 일본을 위해 사용했다. 이것이 중일전쟁의 기원이요, 세계 2차대전의 기원이다.
⚫일본이 항상 말하는 ‘우호적관계’란 일본이 계속 뺨을 때리더라도 미국이 연신 다른쪽 뺨을 내밀어야만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얼마나 더 오래 자신들을 공격할 무기를 일본에 공급하려는가? 지금 머리를 잘 쓴다면 나중에 무기를 쓰지 않아도 되리라.
⚫파나마 운하는 미해군을 두 대양에 연결하는 대동맥이다. 중남미의 많은 일본인들이 비상시에 트로이의 목마 구실을 할지 모른다.
⚫모든 종류의 전쟁을 거부하는 투쟁적 반전론자들이나 맹목적 평화주의자들은 제5열(fifth colunmist:간첩)처럼 위험하고 파괴적이다.⚫소련은 히틀러의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 국가이다. 소련, 일본, 나치스, 파시스트들이 서반구를 제외한 거의 전세계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으므로 미국 민주주의는 ‘전제주의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한 개의 섬‘과 같다. 그들의 선전술에 미국이 리더십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의 위기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대결이다. 전체주의 비적(匪賊)들이 미국을 절대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고서 나머지 세계를 비적국가들끼리 나눠먹도록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미국의 큰 실책이다.
⚫전체주의와 싸우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에게 약속도 하지말고 그들의 약속을 믿지도 않는 것이다. 미국은 저들을 세계의 공적(公敵)으로 다뤄야 한다. 미국을 행동하게 하자. 그것도 지금 당장 행동을 취하도록!
⚫일본은 ‘일본의 바다’로 자임하는 태평양과 시베리아 베링해, 또는 미국 서해안으로 다가오고 있다. 어느쪽을 택하든 전쟁의 위험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특유의 국제적통찰력이 그려내는 세계는 두가지 전쟁에 대한 현실고발과 미래 경고장이다. 하나는 일본의 미국 공격이고, 또 하나는 민주주의 진영과 전체주의 진영이 벌이는 이념전쟁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소련 공산주의체제를 히틀러 나치즘과 동질성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승만은 다른 글에서 소련공산주의와 히틀러의 나치를 합쳐 'Communazi'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최악의 전체주의 실체를 공개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당시 루즈벨트가 소련의 스탈린을 ‘연합국 친구’로 삼아 대일전에 챀전시키려할 때 나온 이승만이 문제제기는 얼마나 빨리 시대를 앞선 선지적(先知的) 통찰인가. 바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전후세계의 ‘냉전시대’를 예견한 역사적 통찰력의 산물이다. ◆’얄타 밀약‘ 폭로작전...한국문제를 세계화하다
루즈벨트가 서거한지 두 주일 후,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로 달려간다. 4월25일 루즈벨트의 마지막 작품 국제연합(유엔)의 창설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초대 사무총장은 루즈벨트가 얄타에서 지명한 앨저 히스, 소련 간첩이 주도하는 유엔탄생 행사엔 50개국이 초청되었다.
★“미국이 임정 승인 안하면 한반도에 소련 공산국가 들어선다”
이승만은 유엔 창설총회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단 9명을 구성, 스태티니어스 미국무장관에게 회의 참가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국무부가 ‘미승인단체’라며 거절하자 이승만은 “아르헨티나, 시리아, 레바논도 부적격인데 초청받은 사실”을 들어 거듭 한국참여를 촉구했다. 한국자료를 잔뜩 만들어 미국무부에 보내고 유엔 회원국들과 언론에 배포하였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카이로 한국독립‘ 선언에 ‘in due course’란 구절을 넣은 것은 미국이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여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 아래 두기위해 한국독립을 늦추려 한 것 아니냐. 지금 중국과 시베리아의 한인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에 공산당정부를 세우려 준비하고 있다. 미국이 이를 방치하면 한반도는 일본이 물러간 뒤 소련 제국주의가 지배한다. 미국이 더 큰 곤경을 당하지 않으려거든 속히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한국이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막을 수 있도록 유엔 회원국으로 반드시 참여시켜 달라“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신화속의 인물])
이승만은 ”루즈벨트의 무작정 대소유화정책은 소련의 제국주의 행동양식을 묵인하는 것“이라고 맹비난하면서, 러일전쟁 때 ‘일본의 멍에’를 한국에 지워준 미국이 이번엔 ‘소련의 멍에’를 지워주는 배신행위를 반복해선 안 된다고 미국의 각성을 거듭거듭 촉구하였다.
이승만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미국무부만이 아니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였다. 평안도 서북파와 한길수 등은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유엔에 파견할 별도의 ‘민중대표단’을 구성하였고, 이승만 임정대표단이 참가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우리가 해외한인대표“라며 선전활동을 벌이는 것이었다. (신한민보, 1945.5.17.)
허수아비 국무장관을 제쳐놓고 유엔 창설을 총지휘하는 앨저 히스는 뒤늦은 답장에서 끝까지 소련의 이익을 대변한다. ”한국의 어떤 대표도 정부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은 유엔에 한국이 참여할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 말은 ‘해외한인대표’를 자처하는 재미한족엽합위원회를 두고 조롱하는 최종 통보였다. 이승만이 전부터 [세계상황](World Affairs,1943년6월호)에서 지적한 바, ”미국무부가 다른 망명정부와 달리 유독 한국임시정부만을 승인하지 않는 이유가 소련의 이익을 지키려는 정책“이란 말 그대로 앨저 히스는 끝까지 소련사람처럼 단호했다.
★ 루즈벨트-스탈린의 ‘비밀협약‘ 폭로...미국도 영국도 발칵
하나님이 보내셨을까...출구 없는 이승만 앞에 뜻밖의 ’귀한 손님‘이 나타났다. 이승만의 유엔외교 캠프 모리스 호텔(Maurice Hotel)에 찾아 온 그는 워싱턴의 한미협회 이사 윌리엄스(Jay Jerome Williams)가 이승만에게 홍보전문가로 추천한 에밀 고브로(E'mile Henri Gauvreau), 이미 뉴욕의 저명한 기자였다. 특기사항은 ’소련 공산당을 위해 암약하다가 전향‘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깜짝 놀랐다. 고브로가 얄타회담에 관한 ’비밀 정보‘라며 알려주는 내용--“얄타에서 루즈벨트-처칠-스탈린이 한국을 일본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련의 영향 아래 두며, 미국과 영국은 한국에 대해서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기로 했다”며 자신이 직접 취채한 것이라고 했다. 즉각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승만은 무릎을 쳤다. 오랜 기간 우려해 왔던 ’스탈린과 미국의 ‘한국 흥정 음모‘ 예상과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브로를 소개해준 미국언론인 윌리엄스는 허스트(Hearst) 계열 통신사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에서 평생 일한 발행인이고, 고브로는 허스트 계열 [뉴욕 데일리 미러]에서 여러 해 활동했으므로 두 사람은 이미 신뢰하는 사이, 더구나 공산당을 떠난 고브로가 한국독립운동단체 간부 윌리엄스에게 한국 독립의 위기를 알려주고 윌리엄스가 그것을 한국 지도자 이승만에게 알려주어 3인이 즉각 비상대책에 돌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 전역 언론에 제공...미 의회와 트루먼 대통령에 편지
이승만은 칼을 뽑았다.
우선 미국 최대의 신문네트워크를 자랑하는 보수계 언론재벌 허스트(William R. Hearst)에게 ’얄타의 밀약‘을 알려주는 편지를 쓴다.“한국이 비밀흥정의 희생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귀하는 아시겠지요. 이런 국제적 노예무역의 비밀이 탄로난 이상, 세계의 지도자들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팔고 있다는 것을 미국 국민들에게 인식시킬 사람은 귀하와 같은 언론 지도자입니다. 만일 미국 국민이 이일을 지금 중단시키지 못한다면 그 자녀들은 다음 15년 안에 제3차 세계대전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5월 8일부터 [시카고 트리뷴 The Chicago Tribune],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The San Francisco Examiner], [로스앤젤에스 이그재미너 The Los Angeles Examiner] 등 대형 언론사들은 일제히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허스트계 신문들은 가뜩이나 얄타회담 내막이 공표되지않아 조바심치던 중에 이승만의 폭로내용을 받자 전국에 대대적으로 뿌렸다.
미국과 유엔이 뒤집어지고 영국과 소련까지 발칵, 이승만의 폭로작전은 대박을 터트렸다.
동시에 이승만은 친분 있는 미국 상하원 지도자들과 백악관 트루먼 대통령에게 장문의 친서를 지급으로 보냈다. 상원의원 조지(Walter F.George), 브루스터(Owen Brewester), 하원의원 호프만(Clare E. Hoffman)에게 얄타밀약을 알려주고 “한국이 소련의 지배아래 넘어가지 않도록 개입해 줄 것”을 촉구하고 유엔 가입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하느님과 미국인의 정의의 이름으로 3천만 기독교 한국국민이 러시아인들에게 팔려가는 이 위급한 순간에 의회지도자인 당신이 그들을 구원하는 무엇인가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승만은 5월15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렇게 썼다.
“카이로선언에 위배되는 얄타의 밀약이 최근에 밝혀져 대통령께서 크게 놀라셨을 줄 압니다. 나도 매우 놀랐습니다. 각하는 미국의 비밀외교로 한국이 희생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사실을 떠올리실 줄 믿습니다. 1905년 한국을 일본에 팔아버린 비밀협정은 20년 동안이나 비밀에 부쳤지요. 다행히 얄타 밀약은 이번 유엔 회의 중에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각하가 이 상황에 개입하시기를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각하의 직접 개입만이 과거 미국이 저지른 잘못(태프트-가쓰라밀약)을 바로잡고 3천만의 한국인이 또 다시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하루 속히 승인해주시면 우리 힘으로 소련의 침략을 막아낼 힘이 생길것이며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결정적 도움이 될 것입니다...”마침내 회답이 돌아왔다.
미 국무장관 대리 그루(Joseph Grew)가 극동국장 대리 록하트(Frank P. Lockhart)이름으로 이승만에게 ’사실무근‘이란 답장을 보내고 이어 6월8일 “얄타에서 어떠한 비밀협정도 맺지 않았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부인한 것이다.
영국 의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처칠은 의원들의 질문에 ”약간의 일반적인 이해가 성립되었지만 비밀협약은 아무 것도 체결되지 않았다“ 답하고 6월7일 공식성명을 발표하였다.소련의 5월24일자 공산당 기관지는 ’밀약‘을 부인하며 ”정신 나간 사람의 황당한 주장’이라 반박하였다. 스탈린 정부 차원의 논평은 없었다.★“사실이 아니라면 3개국이 ‘공식 부인 공동성명’을 발표하라“
이승만은 유엔 창립총회가 끝나고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폭로전을 벌이는데도 얄타회담 3개국은 진상을 발표하지도 않는다. 이런 판에 포츠담회담까지 열리고 보니 만70세 백전노장 이승만도 한국의 운명에 대한 긴박한 노심초사는 폭발 직전이다.이승만은 포츠담회담(7.17 개막)에 참석중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7월18일 특별전보를 친다.
“여기 증거가 있는 밀약설이 진정 사실이 아니라면, 포츠담에 모인 3개국 정상들이 한국에 관한 비밀협약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라.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당신들의 주장을 믿지 못하겠다. #소련 정부는 불길하게도 아직 침묵을 지킨다. 소련 대사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답이 없다. #처칠 총리는 얄타의 많은 논의사항을 밝힐 수 없다고 한다. 그는 그 속에 한국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 포츠담회담에서도 세 수뇌가 한국의 정치적 주권과 영토적 통합에 악영향을 주는 어떤 비밀협약이나 합의도 거부할 것을 보장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해야 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주면 종전후 귀국 1년이내 총선거를 실시하여 연합국과 같은 민주국을 설립하겠다.”바로 이것이다. 이승만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스탈린의 입에서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무슨 말인들 신뢰성 여부와는 별개로 스탈린 본인이 국제사회를 향하여 ‘공식 부인’하는 단한마디라도 나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이승만이었다. 러시아는 구한말부터 지금까지 한반도를 탐내는 천적! 이번 전후처리에서 무슨 꼼수로든 다시 점령하려 덤빌 것이다.
또 다시 이승만은 사면초가, 미국만이 아니라 한인동포단체도 밀약폭로를 비난한다.
이승만의 오랜 동지 국제정치학자 정한경(鄭翰景,1890 ~ 1985)이 걱정되어 질문한다.“박사님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너무 큰 일을 저지르셨습니다. 실제로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 결과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잔잔한 표정의 이승만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소. 정박사 말대로 나는 증거가 없소. 그것은 오직 나의 관찰에 따른 신념일 따름이오. 한국을 위하여 내가 틀렸기를 바라오. 만일 비밀협약이 없다면 그 결과에 대하여 나는 기꺼이 모든 책임을 지려 하오. 그러나 사실이든 거짓이든 지금 우리나라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것을 지금 터뜨릴 필요가 있는 것이오. 내가 바라는 것은 얄타 협정에 서명한 국가 수뇌들이 그 밀약을 공식적으로 부인해달라는 것이오. 그것보다 더 나를 기쁘게 할 일은 없소.” (정한경 지음 [이승만: 예언자-정치가](Syngman Rhee: Prophet and Statesman), 한미협회, 1946)
그렇다. 당시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거래서 속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 그 역사적 갈림길에서 그 진상을 밝히는 것이 초미의 생명줄 임을 투시한 사람이 이승만 박사뿐이었다.
강대국들 앞에 먹이의 하나로 던져진 한반도를 도마의 칼날에서 구해내야한다. 동시에 한 수 더 나아가 한국인의 생사문제를 세계의 핵심 아젠다로로 업그레이드 시켜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미리 깨닫고 행동에 나선 것은 탁월한 국제 전략가만이 할 수 있는 일! 강대국들 심장에 폭탄을 던져 검은 속셈을 만천하에 터트려보겠다는 전략적 아이디어로 돌진한다는 것은 아무나 못 하는 일이다.‘한국문제의 세계화’--이승만의 폭로전은 일단 최소한의 성공은 거두었다.
루즈벨트-스탈린-처칠의 직접성명은 아니더라도 3국 정부측의 ‘밀약부재’ 답변은 얻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다. ‘문서’는 없어도 구두합의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러기에 이승만은 포츠담회담에서 ‘3국수뇌의 공동성명’을 끝까지 요구하는 것이다. 포츠담으로 가보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