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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체스판 얄타...전후 세계지도를 뜻대로 그리다
◆38선은 언제부터 어디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씨를 뿌리고 미국과 영국이 방관하자 씨를 삼킨 스탈린의 뱃속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그 두 달 뒤 4월 이승만이 ‘얄타밀약’을 폭로하면서 “미국이 소련에게 한반도를 팔아먹었다”고 주장했는데, 미국 정부는 얼마 후 부인하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그 다음해 10월24일 영국 외상 베빈(Ernest Bevin)이 런던 의회에서 이렇게 증언해 주었다.“일본 영토 가운데 천조열도(쿠릴열도)를 포함하는 일련의 열도를 소련에 양도할 건과, 한반도를 북위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이 공동점령할 것에 관한 소련과의 양해는 얄타회담에서 결정을 본 것이다, 모스크바 회담(1945.12)에서는 4대국에 의한 조선신탁통치기관의 설치를 결정한 것이었으나 불행히도 뜻과 같이 진척되지 않는 모양이며, 조선의 현 정세는 유럽의 일부 정세와 매우 흡사하다”([조선일보]1946년10월26일자).
이 증언에서 ‘유럽의 일부정세’란 종전후 스탈린이 본격화한 폴란드 등 동유럽의 공산화 작업을 가리킨다. 곧 소련이 남북한의 공산화도 추진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문제는 베번의 ‘38선 증언’에 물증이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얄타회담 3거두는 회담의 합의사항에 대한 공식발표를 일체 하지않았던 것이다.왜 발표를 안했는가. 그 답은 아래에 붙이는 <요약 문답>에서 알아보자.
이제 장막에 가려진 얄타(YALTA) 회담장으로 찾아갈 것인데, 무엇보다 소련대표 스탈린이 어떤 인간인지 먼저 알아야겠다. 그가 한국의 운명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얄타회담의 모든 시나리오를 직접 제작 감독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동유럽과 한반도까지 새로운 지도를 그린 얄타회담은 스탈린의 체스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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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닌과 스탈린(오른쪽).
레닌 “스탈린은 거칠고 위험하니 해임하라”◆레닌의 유서를 보았는가.
러시아 공산혁명가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이 생애 마지막 한달간 남긴 메모들을 ‘레닌의 유서’(Lenin’s Testament)라 부르는데, 그 가운데 핵심은 다음과 같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스탈린이 집권무기로 역이용하게 된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거칠고(too rude) 무례하다.
이 결함은 우리들 사이에는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서기장(General Secretary) 자리에는 너무 위험하다.
동지들은 스탈린을 이 자리에서 해임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스탈린을 해임하라”...놀라운 이런 유서가 왜 나왔는가. 요약하면 레닌이 1922년 제1서기장으로 임명한 스탈린(Joseph Stalin,1878~1953)이 인사권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며, 병든 레닌을 제쳐놓고 3인방체제를 구축하여 전횡을 부렸기 때문이다.
특히 스탈린의 고향 그루지아(조지아)의 통치를 두고 정면대결하면서 레닌의 ‘연방론’에 대하여 스탈린이 중앙집권적 복속(服屬), 즉 식민지화를 강행하면서 갈등은 심화된다.
‘충실한 사무원’으로 여겼던 스탈린이 이럴 줄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당 서기국은 글자 그대로 서기의 일, 행정적 ‘잡무나 처리하는 사무직’으로 인식되어 혁명 주역들이 무시하던 직위였던 터인지라 스탈린 권력의 급성장에 다들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틈을 역으로 활용한 스탈린은 1년만에 지방 공산당조직을 자기 사람들로 채워 권력기반을 구축했다. 전국대회를 열면 결과는 보나마나 스탈린의 승리가 되는 공산당으로 바꾼 것이다. 레닌은 그 사이 뇌졸중을 몇 번씩 일으켜 반신불수, 휴양지에서 언어능력도 잃은 환자였다. 뒤늦게 경고를 발했지만 시간도 조직도 벌써 스탈린에게 빼앗긴 후였음을 알고나 죽었을까.
“스탈린이 거칠고 무례하며 위험하다”는 경고는 레닌의 사망후 본격적인 진가를 드러낸다.
레닌의 유언을 공표금지시킨 스탈린은 장례식 행사를 독점,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고, 레닌을 우상화하면서 “모두 레닌의 뜻”이란 거짓말로 자신의 조치들을 정당화함으로써 “나만이 후계자”란 이미지 조작에 성공한다. 동시에 연합전술로써 레닌이 총애한 트로츠키부터 국외로 추방하고,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 정적들을 차례로 숙청하였다. 드디어 3년만에 1인체제를 굳혔던 것이다.★스탈린의 우상화, 피의 대숙청...그리고 ‘화물열차 정권’ 수출
레닌을 우상화한 스탈린의 연극은 곧 자신의 개인숭배 우상화 작업의 시작이었다.
모든 우상화는 피를 부른다. 절대자의 과오나 실패를 대신할 희생양을 계속 요구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까지 소련 전역에서 벌어진 피의 대숙청은 좁게는 500만, 넓게는 2천만을 헤아린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때 중앙아시아등 주변국가들을 정복하면서 ‘피바다’는 국제화된다. 인류 ‘자유의 적’이란 점에서 레닌주의나 스탈린주의나 거기서 거기지만, 레닌이 무너뜨린 제국주의를 스탈린이 레닌의 이름으로 부활시켜 ‘스탈린 제국’을 건설, 자신의 숭배체제로 제국주의 공산세계를 구축했다는 말이다. 크렘린에 충성하는 식민주의 탄생이다.
레닌이 만든 혁명체제에는 권력교체 규칙이 없었다. 그러므로 레닌의 영구혁명론은 스탈린에게 혁명을 영구우상론으로 변질시켜주는 토양이었고 그 스탈린 체제는 소련만이 아니라 위성국들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즉, ”피를 먹어야 사는 공포체제’가 세계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 학계는 스탈린보다 더 완벽한 ‘피의 제국 성공사례’로 김일성을 꼽는다.
★‘화물열차 정권’(freight train export of regimes)이란 용어를 아는가.
소련이 점령지용 공산체제를 한세트로 만들어 군대와 함께 열차에 실어 보낸 정권을 칭한다. 모스크바에서 양성된 각국 공산당 지도부와 함께 국가명, 국기, 헌법, 제도 등 일체를 수출상품처럼 현지로 수송하여 토착민주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 말살하고 ‘스탈린 충성정권’을 무력으로 조립했다는 국제적 비판용어이다. 다시 말하면 ‘화물열차 정권’은 스탈린체제를 약소국들의 척박한 땅에 강제 이식하는 ‘표준모델‘이었던 것이다. 폴란드, 동독, 체코, 항가리, 루마니아 등 동유럽을 비롯, 극동 북한까지 소련제 상품에 국가이름만 바꿔 붙이면 신생위성국 완성이다. 소련이 소멸한 뒤 국제 무대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레닌은 자신만의 혁명을 지키려다 패배하고,
스탈린은 혁명을 배신, 우상화함으로써 승리했으며
김일성은 혁명을 신화로 바꾸어 영구화에 성공했다.”★레닌과 스탈린 이야기를 새삼 길게 소개한 것은 얄타회담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다.
전후 세계질서의 출발점’으로 불리는 그 회담을 개최장소 선정부터 회담 진행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좌지우지 휘둘렀던 주역이 스탈린 아니던가.
그의 두뇌는 계산도 빨랐다. 북극권 필란드는 군비가 너무 들어 포기하고, 비교적 저렴한 폴란드에 집중, 엘리트 2만2천여명을 사전제거한 ‘카틴 숲 학살’(Katyn Forest Massacre)로 침략비용을 절감했다는 스탈린의 잔혹사는 유명하다. 얄타회담 5년전 저지른 일이다,
그런 스탈린이 2차세계대전후 곳곳에 열리는 엄청난 ‘부동산 시장’에서 어떤 거래를 했던가. 그 상대자 루즈벨트는 회담 두 달 후 숨져 ‘공범책임’을 따질 시간마저 없었다. 요즘 그린랜드를 달라고 졸라대는 트럼프를 보면 약소국의 설움은 언제나 역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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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얄타회담의 3인, 영국 처칠, 미국 루즈벨트, 소련 스탈린(왼쪽부터).
1. 스탈린의 독무대-YALTA‘중환자’ 루즈벨트를 유인한 ‘침략 설계자’
히틀러가 권총 자살하기 두 달 전 1945년 2월, 지금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연안의 크리미아 반도 휴양지 얄타에서 역사적 행사가 열렸다. 중병상태의 루즈벨트와 영국 처칠, 소련 스탈린 3인은 8일동안 회동한 후 독일 항복 요구와 전후처리에 합의했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때만 해도 일본에 대한 전후처리는 독일식 해법에 따른 분할통치로 대강만 합의하였고, 한반도문제는 공식 논의된 바 없었으며, 더구나 38선문제는 당시 발상도 안된 문제였다. 더구나 얄타회담 결과에 대한 공식발표가 없었으므로 회담 전체가 베일 속이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루즈벨트와 스탈린의 비밀회동과 그 내용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흥정’이었음이 뒷날 밝혀지고 만다. 이른바 ‘얄타 밀약’이 그것이다. 회담 석달 후 5월 이 밀약을 누구보다 먼저 입수하여 전세계에 폭로작전을 펼친 인물이 ‘외교의 귀신’ 이승만 박사였다. 이 부분 설명은 다음 장으로 미룬다. (인보길 [이승만은 살아있다] 뉴데일리 ‘라이브러리’ newdaily.co.kr, 2025).
1) 휠체어 루즈벨트 1만㎞ 강행군...스탈린의 ‘밥’
휠체어(wheel chair)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미국대통령 63세 루즈벨트, 1945년 1월20일 그는 연속 4기연임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큰 아들 제임스에게 유언장을 남기고 워싱턴을 떠났다. 그만큼 건강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로 악화되어 있었다.
1년2개월 전 카이로회담과 테헤란회담을 왕복하는 장거리 여행을 했던 루즈벨트는 또 다시 머나 먼 길을 떠나야했다. “반드시 친구로 만들어야 할 스탈린”이 회담장소로 얄타를 완강히 고집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을 논의할 겨를도 없다. 전쟁은 막바지다. (세르히 플로히 Serhii M. Plokhy 지음 [얄타:8일간의 외교전쟁] 허승철 번역, 역사비평사, 2010)
스탈린은 1943년 11월 테헤란에서 처음 루즈벨트를 만났을 때 “이 친구 오래 못 살겠군” 직감하였다고 한다. 카이로 회담후 곧바로 테헤란에 온 미국 대통령은 지쳐있었다. 카이로 선언에 두 말 없이 찬성한 스탈린은 루즈벨트가 대일전쟁 참전을 요청하며 전후 한반도 신탁통치 이야기를 꺼내자 화답하면서, 부동항 부산(釜山)의 할양(割讓)을 떠보았다. 확답은 못 받았지만 거부도 없었다. 이번 얄타 회담에서 결판내야 할 문제이다.
오랜 기간 혈관질환을 몇가지 앓고있는 루즈벨트를 추운 겨울 얄타까지 끌어들여 영토적 야심을 채우려는 스탈린의 완벽한 음모, 아무것도 모르는 루즈벨트는 육해공 1만㎞가 넘는 강행군을 감수하며 야수의 그물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2) 루즈벨트의 꿈 ‘유엔 창설’...“다른 건 모두 희생해도 좋다”
불과 29세에 뉴욕 주 상원의원이 된 루즈벨트는 39세때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피나는 재활훈련을 거쳐 뉴욕 주지사가 되었고 1932년 40세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하반신 마비가 왔다. 집념의 사나이 루즈벨트는 전무후무한 3선 대통령에 이어 4선에 올랐다. 그동안 루즈벨트는 휠체어에 탄 모습을 절대로 공개하지 않았고 대중 앞에 서있어야 할 행사엔 남모르게 부축을 받았다. 그러나 국제회담에선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독일 패망이 눈앞에 다가서자 전후저리로 준비한 루즈벨트의 핵심 의제는 ⓐ독일 영토문제와 국제제재 ⓑ소련의 대일참전 수락을 받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필생의 목표는 ⓷‘전후 평화로운 세계 만들기’ 즉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 창설이다. 그것은 윌슨 대통령이 실패한 국제연맹을 뛰어넘는 루즈벨트 정치철학의 실현이었으므로 “유엔만 창설된다면 다른 어느 것을 희생해도 좋다”고 말할 정도로 집착했다고 한다.
3) “소련이 베를린을 독점하고 싶다”
스탈린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영토 회복은 물론, 레닌의 국제공산당 이상주의를 넘어서 소련 역사상 최대의 ‘스탈린 제국’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이미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을 점령하는 대로 공산화 작업에 착수하였고, 루즈벨트 생일 1월30일엔 독일 수도 베를린 70㎞에 교두보를 설치했다고 생색을 냈다.
노르망디 상륙후 독일로 진격하는 미-영 연합군은 소련군의 동부전선에 사뭇 기대하는 형국이 되었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감사 아닌 아첨까지 서슴치 않았다. 스탈린의 신뢰를 얻어놔야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유엔 참여를 성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동상이몽, 스탈린은 이때 가능하다면 베를린을 독점했으면 좋겠고 영토협상에 앞서 최대한 점령지를 넓혀야한다는 목표로 소련군을 독전하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루즈벨트를 장거리 여행으로 녹초를 만들어 ‘러시아 혹한의 전쟁폐허’ 얄타에서 뜻대로 요리하려고 작심했다. 이 목적을 위해 스탈린은 “비행기 여행을 못 한다”는 거짓 핑계를 대며, 루즈벨트와 처칠이 원하는 회담장소 ‘따뜻한 지중해’ 로마 등의 제의를 차버렸던 터이다.
★입벌린 루즈벨트의 멍한 눈==독일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얄타에서 성한 건물은 근교의 옛 왕궁들인지라 거기서 회담을 연다고 해서 달려온 처칠은 투덜거렸다. “우리가 10년 걸려 찾는다 해도 세상에서 얄타보다 더 나쁜 장소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썼다. (처칠 회고록 [The Second World War] 차병직 옮김, 까치, 2016)
처칠의 주치의와 소련 의사들은 루즈벨트에 대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대통령은 나이보다 너무 늙고 야위고 핼쑥해 보인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쳐다만 본다” (세르히 폴리히, 앞의 책).
루즈벨트 외동딸 애너는 아버지 건강을 챙기느라 처칠 수상의 중요한 면담조자 기피한다. 처칠도 딸 사라(Sarah Churchill)를 동반했고, 소련 주재 미국대사 해리만(Averell Harriman)도 딸 캐스린(Kathleen Harriman)이 따라와서 회담을 도왔다.
우크라이나 대사를 역임(2006~8)한 허승철(고려대)교수가 번역한 역사의 현장 증언록 [얄타의 딸들](The Daughters of Yalta) 캐설린 그레이스 카츠 지음, 책과함께, 2022)에 그 세 여성의 생생한 목격담과 체험이 가득 담겨있다.
★사면팔방 도청 감시
얄타의 3개 궁전은 리바디아 궁(미국), 보론초프 궁(영국), 유스포프 궁(소련)으로 3개국대표단 수백명이 나누어 머물렀는데, 이들 궁전들은 모두 소련 정보당국이 미리 도청장치를 빈틈없이 설치하고, 지향성 마이크로폰(directional microphone)까지 동원하여 먼 거리 대화까지 녹음했다. 넓은 궁정과 도로마다 소련 경비병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출입 검사와 비밀탐색을 벌였다. 이 국제첩보작전의 총책임자는 악명 높은 비밀경찰 두목(내무장관) 베리야(Lavrentiy Beria,1899~1953), 현장 총책은 그의 외아들 전기공 세르고(Sergo Beria)에게 맡겼다. 세르고를 불러 직접 지령한 사람은 스탈린이다. 그는 테헤란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얄타에서도 회담 전에 이미 미국과 영국의 계획들을 속속들이 보고받았다. 미국과 영국 선발대는 도청장치를 탐색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4) 유엔 투표권 ‘1국1표’ 원칙 깨고 소련에 3표 주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했던가, 유언장을 써놓고 온 루즈벨트의 관심은 오로지 두 가지뿐, 유엔 창설과 소련의 대일전 참정이다. 미군부는 소련의 참전을 대통령에게 졸랐다.
유엔 창설에 대하여 스탈린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반대하였는데 이는 협상카드였다. 목적은 소비에트 연방의 16개 공화국을 모두 독립국으로 대우하여 투표권16표를 얻어내는 것이다. 루즈벨트는 난감하다. 스탈린은 “병자를 짜증나게 하면 이긴다”며 시간을 끄는 몽니를 부린다. 소련외상 몰로토프와 루즈벨트 측근 홉킨스 등의 실무회담에 넘겼지만 결론은 루즈벨트 몫이다. 마침내 루즈벨트는 우크라이나 1표와 벨라루스 1표를 더 주기로 결정한다. ‘1국1표’ 원칙을 깨버리고 특별히 소련에만 3표를 선물로 준 것이다.
반대하던 목소리도 쑥 들어갔다.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의 발소리에 미국도 영국도 2차대전의 결말을 스탈린에게 맡긴 듯, 음흉한 독재자에 항변할 용기는 벌써 사라졌다.
5) 미-영, 폴란드 포기...새 국경도 스탈린이 그리다
1939년 독일침공 이래 반나치 투쟁을 벌이던 폴란드는 스탈린이 침공하자 소련에 기대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쓴다. 즉, 골치 아픈 폴란드의 반란군을 독일군이 진압하도록 방관하고, 독일군이 물러가자 남아있는 폴란드 지식계층 2만2천여명을 집단 학살한다. 1940년 카틴 숲의 학살(Katyn Forest Massacre)이다. 동시에 공산당 루불린(Lublin) 정권을 세웠다. 폴란드 자유민주세력은 파리에서 망명정권을 선언하고 런던으로 쫓겨간다.
얄타에서 영국 처칠은 “폴란드 때문에 참전했다”면서 런던망명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한다.
스탈린은 완강하다. 소련이 폴란드를 해방시켰고 루불린정권은 해방정권이므로 인민의 지지가 높으니 다른 정권은 필요 없다고 버틴다. 처칠은 폴란드 문제에 정치생명을 걸고 있었다.
루즈벨트가 중재안을 낸다. 기존 정권은 제외하고 ‘새로운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자는 것, 바로 해방후 한국에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방식 그 선례였다.
대결의 승리는 스탈린의 배짱이다. 처칠의 흥분한 웅변도 루즈벨트의 맥빠진 중재도 허탕이요, 독일과 폴란드의 새로운 국경 오데르-나이세 강 연결선도 스탈린이 직접 그렸다고 한다.
6) 소련 간첩 알저 히스, 유엔 창설 초대사무총장 되다
스탈린을 ‘친구’로 만들려는 루즈벨트가 얄타회담에 앨저 히스(Alger Hiss, 1904~1996)를 데려간 것은 당연하다. “변호사 중의 변호사”라며 루즈벨트는 국무부 고위관리(특별정무국 부국장) 하버드 출신 젊은 변호사 앨저 히스를 총애, 그에게 유엔 창설 작업을 맡겼다. 히스는 유엔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창안한다. 얄타에서는 특히 소련의 유엔참여를 위해 스탈린을 ‘유혹’하는 임무를 맡은 히스는 미국의 대소전략이 담긴 ‘블랙북’(Black Book)의 관리자, 과연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떠맡긴 루즈벨트 아닌가.
히스는 10년전부터 소련 간첩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 방첩부가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 일환으로 암호를 해독한 소련 비밀문서에 ’얄타의 알레스‘가 나타났다. 알저 히스의 간첩명이다. 소련 스파이망에서 10년이나 일했고 소련의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얄타회담 후 모스크바로 날아가 외무차관 비신스키의 감사표창을 받은 것까지 속속 드러났다.
워싱턴에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번번이 가로막은 소련간첩이 얄타에 가서 ’유엔병‘ 걸린 루즈벨트를 움직여 그 많은 ’선물‘들을 스탈린에게 제공한 것이었다. 유엔 투표권 3표를 소련에 준 것도 앨저 히스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자연스럽다.
스탈린이 유엔참여에 동의하자 루즈벨트는 즉석에서 히스를 유엔 초대 사무총장으로 지명했다. 미국 언론들은 ’평화시대의 젊은 세계 지도자‘라며 대서특필하였다.
7) 스탈린, 부동항 ’부산 할양‘을 떠보다
’유엔의 꿈‘을 일차 달성한 루즈벨트는 스탈린이 대일참전 이슈에 막판까지 묵묵부답이자 궁에서 개인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읽은 스탈린은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이다. 거기엔 테헤란 회담 때부터 요구했던 대일참전의 대가, 일본 홋카이도 위의 남부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한 소련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복음이 쓰여있지 않은가.
하지만 스탈린은 또 딴청이다. 이런 선물은 확보되었으니 특별 보서스를 받아내야 때문이다.
일본에 선전포고한다면 일본땅 만주국과 한반도로 쳐들어가 점령하게 될 터인데. 만주엔 청일전쟁때 차지했던 요동반도 대련, 여순이 있고, 러일전쟁 때까지 건설한 남만주 철도가 있다. 게다가 한반도는 고종의 아관파천이래 10년간 품속에 안았다가 일본에 빼앗긴 황금알 같은 땅, 부동항 부산을 갖고싶다는 제안까지 이미 테헤란에서 루즈벨트에게 건네둔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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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년 11월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스탈린과 루즈벨트 회담, 이 자리에서 루즈벨트가 한국신탁통치 문제를 꺼내자 동의한 스탈린은 한반도의 부동항 부산의 할양요구를 제기하였다.
2. 얄타밀약: 한반도 흥정에 몇분?
▶스탈린-루즈벨트 밀담 30분◀
2월8일 오후 3시30분, 중요한 이슈일수록 루즈벨트와 단둘이 사적인 담판으로 해결하는 스탈린은 이날도 외상 몰로토프만 데리고 리바디아 궁전의 루즈벨트 방으로 숨듯이 들어섰다. 이미 모든 걸 다 주고 다 갖기로 작심한 남녀처럼, 두 사람은 의미있는 웃음의 인사를 나누며 마주 앉았다.
★대일전 참전 선물: 사할린-쿠릴열도-만주철도...그리고 또?
“우리가 대일본 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정치적 조건은 무엇인가요?”
스탈린은 단도직입적이다.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가 종전 후에 소련에 양도되는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탈린이 참전을 결심했나보다...루즈벨트는 이미 편지로 알려준 내용을 확인해준다.
그러나 스탈린은 못 들은 사람처럼 전혀 다른 표정으로 루즈벨트를 정시한다.
“요동반도의 대련, 여순항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한 만주철도를 소련이 관할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외몽고의 현상 유지도 지지해 주시오.”
루즈벨트는 사전에 해리만의 자문을 구했던 말 ‘장제스’를 꺼낸다.
“그것은 중국과 협의해야 할 문제인데...장세스와 논의할 기회가 없었다”고 얼버무렸다.
스탈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는 재빨리 분위기를 역전시켰다.
“소련과 일본은 지금 불가침조약국이오. 이런 상태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참전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내가 말한 조건이 충족되면 국민들도 이해할 텐데...안 되겠네요”
협박이다. 루즈벨트는 당황했다. 고질인 혈압과 열이 오르고 참기 힘든 짜증이 난다.
“중국과 이야기하면 세계가 다 알게 될 텐데...” 그는 ‘비밀거래’를 암시하는 말을 던진다.
그렇게 흥정은 성립되었다.
3개국만의 서면 결의로 확정하자는 스탈린의 말에 루즈벨트가 끄덕였던 것이다. 마침내 소련의 참전이 결정된 순간이다.
참전일자 결정은 다른 날로 미룬다. 독일 항복 후 소련군이 극동으로 이동하려면 3개월쯤 걸리니 그때 출병하기로 하자고 스탈린이 맘대로 정했다.
★루즈벨트 “한반도엔 보호령도 미군 주둔 계획도 없다‘
한국의 산탁통치 문제를 루즈벨트가 먼저 꺼냈다.
“필리핀은 신탁통치 40년 만에 독립시켰는데 한국은 20~30년은 해야겠지요?”
“아닙니다. 기간은 짧을수록 좋지요.” 스탈린은 신탁통치 따위 안중에도 없다.
테헤란 회담에서도 한국의 독립준비기간 ‘신탁통치’(trusteeship)에 동의하면서도 스탈린 자신은 뜻이 전혀 다른 ‘후견’(tutelage)이라고 적어 놓았다. 소련이 후견인이 되어 위성국을 만드는 기간은 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수십 년 써먹은 스탈린의 전매특허 수법이다.
그해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김일성정권 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데에 불과 6개월도 채 안걸렸던 과정이 그것을 설명해준다.
“그러면 한국은 앞으로 미국의 보호령이 되는 겁니까?” 스탈린이 다구친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단박에 부정하는 루즈벨트는 그때 스탈린이 한반도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구상하고 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보호령은 아니라 해도 미국 군대는 한국 내에 주둔시키겠지요.” 스탈린은 집요했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각적이고 분명한 대답에 스탈린은 또 한번 놀랐다고 뒷날 회고한다..
‘좋아. 아주 좋아’ 스탈린은 진지한 얼굴과 달리 뱃속에선 웃음이 끓어오른다.
‘그렇다면, 일본 영토 중에 열도는 미국, 한반도는 소련?...좋았어,..’
이날 루즈벨트-스탈린의 비밀회담은 소련의 참전 흥정에서 마지막 ‘한국 거래’가 끝나기까지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얄타]의 저자 플로히는 그날 배석자 몰로토프, 해리만, 두 통역자들의 대답이 일치된 ‘30분’이었다고 써놓았다. 그 30분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는 몇 분이 걸렸을까? 절반 15분쯤?
- ◆YALTA 요약 문답◆
▶질문A: 얄타회담 3거두는 왜 회담결과에 대한 공식발표를 피했는가?
◈답: 독일 항복요구 등 원칙적 공동성명만 내고, 그 밖의 합의들은 공개할수 없는 내용임.
첫째 전쟁중의 외교와 군사 비밀들을 적국들이 알면 치명적임.
둘째 동맹국들과 국내에 미칠 영향이 심대한 문제들, 한반도 신탁통치, 각국 전후처리 방안, 폴란드의 소련 우선권 인정, 일본영토 할양 등 모두 극비이자 가변적임..
셋째 한국, 중국 등 당사국 불참 속의 일방적 결정에 대한 도의적 책임.
넷째 합의 내용이 국제법상 조약-협정이 아니므로 공개할 의무는 없음.
따라서 공식문서가 없는 탓으로 수많은 의혹과 주장들이 아전인수격으로 ‘얄타’를 이용, 책임전가의 대상이 되어 두고두고 정치적 제물로 전락함. 한국에서 말하면 한마디로 “도둑이 제발 저렸던 탓‘이라 하겠다.▶질문B: 이승만의 주장 “미국이 소련에게 한반도를 팔아먹었는가?”
◈답: 구두양해만 있을 뿐 문서 계약은 없다고 본다. 포괄적인 구상만 주고 받았다.
단, 스탈린이 질문한 ‘보호령’과 ‘미군주둔’에 대해 루즈벨트는 분명히 부인했다.
따라서 스탈린으로 하여금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음.
이 대화가 미-소의 한반도 흥정이므로 이승만의 주장은 정확함.
▶질문C: 한반도 분할점령, 즉 38선에 대한 논의나 합의 기록은?
◈답: 아직까지 ‘38선 분단’에 관한 문서나 구두합의 기록도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위에 서 본 영국외상의 의회 증언 역시 한반도 분규에 대한 ‘영국 면책’ 발언으로 추정.
▶질문D: 그렇다면 스탈린은 대일전 참전당시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려 의도했는가?
◈답: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 루즈벨트의 명백한 답변을 듣자 스탈린은 미국의 한반도 영 유문제에 대한 계획이 없음을 확인, 그때부터 ‘한반도 수복‘ 계획을 추진한 증거들 이 남아있다. 당시 스탈린이 “극동에서의 소련의 이해관계는 러일전쟁 이전 상태로 회 복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참전과 동시에 한반도로 총진격명령을 내렸다.
▶질문E; 얄타회담 내용은 언제 밝혀졌나?
◈답: 8월이후 태평양전쟁 말기 나타난 ’현실적 행동‘이 증명함. 예컨대 소련군의 만주-한반 도 진격, 동유럽 각국 공산정권 수립, 38선 분할, 일본 도서 할양 등. 또한 1946년 미국 의회 청문회와 내부문서-증언으로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얄타의 배신(Yalta Betrayal)’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본격 공개는 1951~53년 미국무부가 발간한 문서 FRUS(Foreign Relaions of the United States) 시리즈 및 얄타의 부속합의문(소련의 참전 조건) 공개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