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북한 체제설계자 시티코프(왼쪽). 오른쪽사진은 모자 쓴 김일성과 박헌영.
    ▲ 북한 체제설계자 시티코프(왼쪽). 오른쪽사진은 모자 쓴 김일성과 박헌영.

    이승만 박사가 미국무부의 친소파들에 붙잡혀 귀국을 못하고 있는 사이, 한반도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가.
    한마디로 남북한은 해방 한 달 만에 공산당 세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소련군의 북한점령과 동시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남한을 장악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38선 동의순간부터 북한 단독정권 수립의 준비작업에 돌입한다.
    우선 해방 한달남짓에 단행한 ’‘분단고착전단계 조처들은 이러하다.

     스탈린의 북한단독정권 수립 준비

    대일 선전포고 즉시 북한 총진격 (8.9)

    북한 진입 전부터 김일성선발, 스탈린 면접 낙점 (9,2)

    미군의 남한 진주(9.8) 일주일후 38선 전면봉쇄 (9.15)

    김일성 입북(9.19)...소련고문관들 사전에 모두 입북

    북한에 단독정권 수립지령 (9.20) 

  • ▲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그 사무실로 사용한 서양식 건물, 인왕산 기슭 옥인동에 지은 윤덕영의 별장이다. 순종의 계비 윤비의 큰아버지 윤덕영은 한일병탄 조약에 따라 일본황실의 자작위를 받은 친일파였다.
    ▲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그 사무실로 사용한 서양식 건물, 인왕산 기슭 옥인동에 지은 윤덕영의 별장이다. 순종의 계비 윤비의 큰아버지 윤덕영은 한일병탄 조약에 따라 일본황실의 자작위를 받은 친일파였다.

    박헌영미군진주 전에 인민공화국’ 선포

    스탈린의 북한 장악에 발 맞춘 것일까. ‘조선의 레닌‘ 박헌영(朴憲永,1900~1956)은 96일 서울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서둘러 선포한다.

    멀리 1000㎞ 떨어진 오키나와를 출발한 미군이 인천에 도착하기 이틀 전이다.

    인민공화국 사무실은 인왕산 기슭 옥인동에 위치한 친일파 윤덕영(尹德榮)의 호화로운 별장여기서 이승만을 주석으로하는 정부각료를 허겁지겁 조립하여 명단을 발표하였고, 12일엔 경성(서울)운동장에서 인민공화국 출범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축하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었다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온 19일엔 박헌영이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까지 창간한다.

    이 모든 것은 전남 광주 벽돌공장에 숨어지내던 박헌영이 서울 정동의 소련총영사관 부영사 샤브신(Anatolii I. Shabshin)과 고 내통하고 해방즉시 상경하여 정세판단에 따라 먼저 선수를 친 것이 인공‘ 수립이었다. ,즉 스탈린보다 먼저미군 진주보다 먼저 남한의 선취권을 잡은 것이었다아니무엇보다 이승만 귀국 전에 남한 조직화에 나선 박헌영이다.

     이때 남한의 민족진영 우익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이러한 사태는 고지식한 우익진영이 나라를 좌익에게 고스란히 바친 결과라는 평가도 과언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일본의 항복 무렵 일본 총독이 당시 우익대표라 할만한 송진우(宋鎭禹,1887~1945)에게 치안을 맡아달라했지만 거절하였다. ”일본에 협력해선 안되고 충칭 임시정부가 돌아오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다하나만 알고 공산당과 국제정세를 몰랐던 우물안 개구리의 선택 아닌가당시 우파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다.

    그때 만약 이승만이 귀국해 있었다면생각할수록 미국의 무정책이 통탄스럽다.

    결국 마지막 일본총독 아베(阿部信行)는 여운형(呂運亨,1886~1947)에게 부탁했고 여운형은 즉석에서 나라를 맡았다거액의 비용까지 받았다고 한다이렇게 해서 여운형이 설립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박헌영이 치고 들어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남한전역에 건준’ 간판을 단 인민위원회를 광범하게 조직하면서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던 것이다. ‘건준은 107일 해체된다.

  • ▲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 이은 테헤란회담 참석자들. 스탈린, 루즈벨트.처칠(왼쪽부터).
    ▲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 이은 테헤란회담 참석자들. 스탈린, 루즈벨트.처칠(왼쪽부터).

    스탈린의 음모는 테헤란회담에서 시작

     이와같이 해방순간 남북한은 미국과 소련의 대한정책 차이에서 오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한반도를 오래전부터 다시 장악하려 준비한 스탈린의 음모와스탈린을 친구라 여겼던 루즈벨트 이래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무관심 무정책 탓이다.

    트루먼도 마찬가지스탈린의 동유럽 공산화에 대한 경계심 뿐극동 아시아에 대한 전략은 백지상태였다이승만 박사가 국무부와 백악관에 일본 물러가면 소련 내려온다며 임정 승인을 수없이 요청했지만 허사로 끝난 까닭이다. 

    신탁통치? NO! 스탈린 메모엔 후견

    러일전쟁때 일본에게 빼앗겼던 한반도를 수복하려는 스탈린의 야심은 1943년 11월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회담에서부터 구체화 된다.
    그는 카이로회담엔 가지 않았다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 자리에 왜 가나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테헤란에 오라고 했다카이로선언을 마친 루즈벨트가 병든 몸으로 달려왔다.
    스탈린이 묻지도 않는데 ‘4대국 신탁통치를 꺼낸다즉각 찬동한 스탈린은 비밀메모에 신탁통치 대신 후견이라고 적어놓았다왜 후견인가간단히 말하면신탁통치(Trusteeship)는 독립을 전제로 일정기간 자치능력을 키워주는 국제관리를 가리킨다이에 반해 후견(Protectorate)은 강대국의 보호체제즉 독립국 형식은 유지해 주되 정치 외교-군사권 등 실권은 보호국이 쥐는 것이다바로 스탈린의 전매특허 소련공산당이 지배하는 국제공산주의 식민체제그때 폴란등 등 동유럽에서 써먹고 있는 위성국만들기 각본이 후견이다.

  • ▲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 이은 테헤란회담 참석자들. 스탈린, 루즈벨트.처칠(왼쪽부터).

    스탈린의 시나리오! ‘극동 위성국 만들기’ 한달 작업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가 한반도에 미국은 주둔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스탈린은 쾌재를 불렀다당시엔 38선이 없던 때한반도를 통째로 삼킬 기회가 온 것이었다.

    포츠담회담 열흘뒤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하자 스탈린은 즉각 대일전에 참전앞장에서 본대로 한반도로 쇄도할 때 미국이 38선을 제안하자 잠시 밀당 끝에 수락한다이미 장악한 북한이 있고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대 해도 루즈벨트 말대로 곧 철수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따라서 북한부터 위성국만들기 작전에 총력을 투입한 것이었다.

    1) ‘가짜 김일성’ 만들기--스탈린의 면접 

    앞에서 소개한 화물정권을 구성하는 주요 메뉴는 물론 위성국 지도자이다.
    그동안 스탈린은 폴란드의 루불린(Lublin)처럼 소련에서 양성한 해당국 공산당원 가운데서 유능한 인물을 직접 면접하여 점찍곤 했다문제는 그에 해당하는 북한출신이 없다는 현실이다그리하여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제88여단의 한국인부대에서 일일히 물색하였다.
    스탈린이 직접 설립한 제88여단은 대일 참전용 게릴라부대로 한국인 104명의 빨치산을 포함시켰는데 그 부대지휘관이 중국공산군 빨치산 출신 김성주(金聖柱대위였다.

    묵한에 설치할 인민위원회의 지도자를 찾아라“ 요컨대 위성국 두목깜 찾기크렘린 궁의 지시에 따라 정치장교들의 작업이 진행될 때 책임자는 역시 스탈린의 심복 베리야(Lavrentiy Beriay Beria,1899~1953)였고북한공산화 총책 시티코프(Terenty Shtykov, 1907~1964)는 극동군 사령관 바실레프스키(Alexander M. Vasilevsky)를 지휘하여 김성주를 점찍은 인물 검색 보고서를 보냈는데여기서 김성주를 김일성(金日成)’으로 개명하면 더욱 효과만점이라는 의견까지 스탈린에게 올렸다한국에 잘 알려진 전설적인 항일투시의 이름을 빌어 카리스마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당시 김일성의 한자이름은 여러 가지 한자로 보도되곤 하였다. ‘김일성이 된 김성주는 하바로프스크에서 군용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한다스탈린 면접은 필수코스였다. (바실레프스키의 부관 코바렌코 증언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한울, 2008).

    스탈린 면접

    으리으리한 크렘린 궁에 들어선 김성주는 정치장교의 사전교육을 통해 무조건 충성을 외치기로 했다스탈린은 무려 4시간이나 면접을 했는데, ‘스탈린주의’ 강의도 했다러시아어를 전혀 못하고 중국말은 잘하는 김성주에게 스탈린의 설교가 일일이 통역되고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김성주는 말끝마다 충성을 외친다스탈린은 공산주의는 모르지만 말 잘 듣게 생긴’ 소련군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야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협력하여 과업을 수행하라
    스탈린의 합격과 함께 가짜 김일성은 이제 북한 공산화의 앞잡이로 다시 태어났다.

  • 2) 미군 진주 1주일후 소련군 ”38선 전면봉쇄

     미군의 발걸음은 느려도 너무 느리다하지 중장은 819일 맥아더로부터 남한주둔군사령관에 임명된다소련 스탈린이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를 극동군 제25군 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독일항복 직후 대일전 참전 2개월전 6월이었다.

    91일에야 미공군 B24 폭격기 한 대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하지사령관의 전단을 뿌리고 갔다. ”주민의 무분별한 행동은 절대 금지라는 포고문이다맥아더의 일반명령1’ 역시 군사용 명령이다이때 비로소 ‘38선 군사분할이 일반에 공표되었던 것이다해방을 하수고대하던 한국인들에게 해방이 분단?“ 치명적인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소련 사령관의 첫 포고문은 평양에 입성한 824일 발표되었는데 심리전의 표본이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조선인민이어 기억하라행복은 당신들 손안에 있다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붉은 군대는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모든 조건을 마련했다...“ 일제의 착취에서 해방시켰다는 해방군의 이미지를 심는 구절로 채워져 있다.

    이후 미군측 군사용 포고문들은 북한 소련군정이 비교 살포하여 주민심리를 흔들어 놓는 선전재료가 되었다.

    9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해있는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거행된 후하지 사령관은 9월 8일이 되어서야 인천에 상륙한다.
    96일 조선공산당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공표하고 이틀 지나서였다이때까지도 하지사령관에겐 본국에서도 맥아더 장군에게서도 정책적 지침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탈린, 38선 전면봉쇄 명령

    미국이 38선을 제안했을 때 소련군은 이미 38선 이남으로 진격중이었다육군선발대는 38선의 개성(開城)을 지나 서울로 향하고 있었고소련태평양함대 해병 상륙부대 함정들은 동해 중부 해안까지 내려왔다이들이 후퇴명령을 받은 것은 820일이다. (김국후앞의 책).

    이 닷새동안 스탈린은 미국과 남한 공동관리를 협상했던 것이다미국이 거부하자 어쩔수 없이 부산 상륙을 포기하고 38선을 수락해야 했다. (연재참조).

    그 대신 스탈린은 38선을 전면 봉쇄 명령을 내린다미군의 인천상륙 1주일 시난 915일경이다.
    극동군 사령관 바실레프스키와 제5군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M. Chistiakov) 명령으로 실시된 38선 봉쇄는 한반도 분단고착의 최초의 조치로 강력한 증거이다자유통행자유통상 경제교류까지 차단한 민족의 허리 절단남과 북의 국경선으로 만든 스탈린이다.

    트루먼이 일본군철수 관리용 한시적 군사분계선으로 제안했으므로일본군이 다 나가버린 지금에 와서 뒤늦게 들어온 미군이 ”38선은 의미가 없어졌다며 철회를 제안한다든지 간섭하러 들면 북한 후견’ 시나리오는 차질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처칠이 지적한 소련의 철의 장막이 한반도 허리에 공산화 체제장벽을 세운 것이었다사실은 이것도 한시적이다왜냐하면 5년후 스탈린은 38선을 깨고 6.25남침을 강행하지 않았던가.

  • ▲ 평양 공설운동장서 열린 '김일성' 데뷔 무대, 소련군정 간부들이 동석하여 그동안 훈련시킨 김일성의 언동을 주시하고 있다. 33세 김성주는 스탈린의 낙점을 받아 '김일성'으로 둔갑, 공산당정치인 교육을 받았다.
    ▲ 평양 공설운동장서 열린 '김일성' 데뷔 무대, 소련군정 간부들이 동석하여 그동안 훈련시킨 김일성의 언동을 주시하고 있다. 33세 김성주는 스탈린의 낙점을 받아 '김일성'으로 둔갑, 공산당정치인 교육을 받았다.

    3) 런던회의 부산진해제주도인천은 소련에 달라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또 하나의 비화가 있다스탈린의 한반도 장악 야심을 보여주는 국제적 증거물신탁통치를 빌미 삼은 노골적인 영토 요구 사건이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사흘 후, 9월 11일 런던에서 미국소련영국중구그프랑스 5개국 외상이사회(the Council of Foreignministers)가 열렸다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의 제의로 구성된 회의였다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외상 몰로토프로 하여금 일본의 분할점령 관리를 다시금 요구하게 하였다미국의 일본열도 독점에 대하여 불만이 강했던 스탈린은 일본열도 분활 점령의 욕심을 다시금 국제회의에 드러낸 것이었다.

    몰로토프가 연일 일본점령문제에 관한 토의를 요구했지만 미국이 응할 리 없었다.
    이때 내놓은 소련의 문서 일본의 과거 식민지 및 위임통치 지역문제에 관한 노트와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정부의 제안에 놀랄만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한반도는 미-소 양국군에 의한 점령을 2년쯤 거친 후에 미---중 4개국이 신탁통치를 실시해야한다고 제안했다그리고 핵심은 이것이다. ”신탁통치 협정에 부산진해인천제주도를 소련에게 분할하여 소련군사령부의 통제아래 둔다는 규정을 둬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유는 이 항구들이 소련함대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해야 하며만주의 중-소 공동관리로 되어있는 여순(旅順)항에 접근하는 항로를 확보하기 위함이라고 했다비밀노트에는 부동항들의 확보와 미국의 태평양지역 전략적 거점을 견제하는 목적이라고 써놓았다(James Byrnes, Speaking Frankly, FRUS 1945, vol 전현수 [소련군의 북한진주와 북한정책한국독립운동사연구 9)

    4개국 신탁통치 이전에 미-소 양국군이 2년쯤 점령해야 한다는 속내는 무엇인가북한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위성국기반을 먼저 다져놓겠다는 꼼수였다.
    참으로 탐욕스러운 한국땅 사랑이라 해야 할 것인가. 38선으로 막힌 남한의 항만들을 몽땅 달라는 요구토의에 들어가지도 못하자 한달 전에 부산상륙함정을 철수시키듯이 후퇴하고 말았다.

     4) ‘김일성 데뷔’ 무대...소련군정이 교육 연출

     스탈린의 지령을 실천하는 북한의 왕’ 시티코프는 당중앙(스탈린)이 김일성을 간택하자 평양의 소련군정에 역시 극비 지령을 내린다.
    그를 당분간 공개하지 말고 정치 사상훈련을 철저히 시켜라

     919일 원산항 도착, ”김성주입니다“ 스스로 소개
    1014일 평양 운동장, ”김일성입니다“ 소련장교가 소개 

    추석 전날 919고향을 떠난지 20여년 만에 김성주는 고국땅 원산항에 내렸다소련군복을 입은 그는 부두에서 안내담당 소련장교 2명에게 김성주입니다” 자신을 소개한다.
    스탈린이 결재한 이름 김일성은 당장 써서는 안된다소련군정이 마련한 비밀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쳐야만 김일성으로 공식 데뷔할 수 있기 때문이다.

    922일 평양으로 이동한 김성주는 일단 평안남도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위장임명‘ 된다그의 일정 스케줄 일체는 소련군정이 맡았고 비밀교육이 시작된 것이었다. 

    김성주의 가정교사로 지명된 정치사령부 메클레르(Gregory Mekler) 중좌는 그가 겪은 고초를 1992년 김국후([평양의 소련군정저자)의 인터뷰에서 털어놓는다.

    그가 북한지도자로 낙점 받고 입북한 줄은 까맣게 몰랐죠그저 시티코프의 지시대로 그를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사상교육과 정치훈련‘ 시키는데 집중했지만 애로가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공산주의를 모르는 공산군 빨치산책은커녕 산적처럼 쏘다닌 김성주를 교육시킨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러시아어를 모르고 중국어만 잘해 중국인 같은 한국인인데 한국말도 천박한 용어뿐인지라 무엇을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막막했다고 한다.
    정해진 스켸줄에 따라 조만식이주하 등 요인들에 소개하고 지방시찰을 시켰다시급한 것은 연설법 훈련이었다고 한다시티코프는 날마다 꼼꼼하게 점검하고 코치하였다.

    가짜다” 군중 소란...빵빵빵 소련군 공포 쏘다

    이윽고 김일성이 대중 앞에 공식 데뷔하는 날평양 공설운동장엔 5만여명 군중이 몰렸다.
    단상엔 태극기와 연합국기들이 꽂히고 레닌과 스탈린의 대형초상화가 뒷면을 덮은 앞에 조만식이 먼저 열변을 토했다
    이어 김성주가 마이크 앞으로 나아갔다.

    소련군정장관 로마넹코(Romanenko)가 항일투자 김일성을 소개하며 박수를 유도했다.
    그러자 군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너무 젊다...김일성 장군은 백발이 성성해야는데 새파란 30대 같아...진짜야가짜야?...가짜다!“

    수군거리던 군중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커진다.
     ”
    빵 빵 빵“ 당황한 소련군이 공포를 발사했다장내가 조용해진 뒤에야 김일성이 연설한다.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준 붉은 군대에 감사한다...자유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대동단결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자조선독립만세스탈린 대원수 만세!“

    이 연설문은 소련정치장교가 러시아어로 쓰고 고려인이 번역한 것을 김일성이 여러번 연습한 것이었다이 날 행사 자체가 발상부터 끝까지 소련군정이 기획연출한 작품임은 물론이다. (메클레르 및 레베데프 인터뷰김국후앞의 책).

  • ▲ 전현수의 [쉬띄꼬프 일기] 표지ⓒ국사편찬위.
    ▲ 전현수의 [쉬띄꼬프 일기] 표지ⓒ국사편찬위.

    5) 스탈린의 비밀지령 북한 정권 수립하라

     김일성이 난생처음 평양 운동장에서 데뷔 연설을 한 다음날 9월 20일자로 스탈린의 비밀지령이 내려왔다시티코프와 치스차코프에게 군사용 암호문으로 송신된 그 유명한 ‘9.20 극비지령은 아래와 같은 7개항을 전달하고 있다시티코프는 이 지령에 따라 북한체제를 설계한다.

    ‘9.20지령’ 7개항 원문 번역문

    (1) 북조선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이 정부는 일 본 제국주의와 그 협력자들에 반대하는 모든 민주적 정당과 사회단체의 광범한 연합에 기 초하여 조직되어야 한다소비에트(의회및 소비에트 정권 기관은 설치하지 말 것.

    (2) 새로운 행정기관은 인민위원회를 기초로 조직한다이 기관들은 지방행정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소련군 사령부와 긴밀히 협력 활동해야 한다.

    (3) 일본 제국주의 협력자반동세력민족반역자들을 행정과 청치생활에서 제거해야 한다.

    (4) 토지문제 해결을 준비한다일본인과 친일분자의 토지는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 지개혁을 실시할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북한주민들에게 붉은 군대는 영토 야심이 없고 북 한인들의 모든 사유재산은 소련군사령부가 맡아 보호한다고 설명해야 한다.

    (5)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농민조합청년단체 등 민주적 대중조 직을 발전시켜야 한다.

    (6) 정치활동은 반일 민주주의 세력의 통일전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지도해야한다.

    (7) 북한 민간행정의 지시는 연해주 군관구 군사회의가 수행해야한다소련군사령부(평양)는 위의 과업 수행을 지도하며 민주주의적 정권 수립을 돕는 모든 세력을 지원해야 한다.

    (와다 하루키 [분단의 기원동경대학, 1990. [레베데프 비망록]과 증언김국후앞의 책)

     주요 멧시지

    스탈린의 지령 7개항의 함의는 대락 이러하다.
    A. 북한에 단독정권을 조속히 수립하라.
    B. 처음부터 소련식 소비에트 정권 말고 북한 인물들을 내세우라.
    C. 친일파와 반동=반공세력을 제거하라반소반공세력은 모두 친일파로 숙청.
    D. 토지개혁을 위한 조건즉 북한 사유재산을 소련 군정이 국유화하라.
    E. 반일세력의 통일전선 강화즉 항일투쟁 민족진영 인사들을 포섭하라.
    F. 북한 행정 지시는 시티코프(연해주 군사회의)가 전담한다. 

    스탈린의 지령은 북한단독정권 수립과 그 공산체제 설계 지침이다.

     단독정권 수립 지령중 소비에트 기관을 설치말라는 것은 코민테른 통일전선이후 스탈린이 구사해온 단계적 공산화 방식으로서그 시간에도 폴란드체코항가리 등지에서 완료되었거나 진행 중에 있었다.

    이와같은 모든 지령 수행의 총책은 시티코프였다실제로 북한 체제구성김일성의 정치감독토지개혁 총괄남북한 정치세력 관리남한 제주4.3등 박헌영의 폭둥 지원 감독김구 포섭과 남북협상의 기획 연출, 6.25남침준비와 전쟁지휘 등등 한반도 분단-적화통일의 파괴활동에 총력을 기울인 두목이다.

    북한의 모든 일 가운데 시티코프의 결재 없이 이루어진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것은 북한정권 창출의 실무주역인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 소장의 증언이다. 

    특히 부르주아 계급을 앞세우려는 시티코프 자신이 조만식(曺晩植,1883~1950)을 포섭하려 집중했다
    김일성을 데리고 다니며 조만식을 여러차례 만나 설득했지만 헛걸음이었다대화를 끝내고 나올 때마다 김일성은 죽여버리자고 우겼다결국 조만식은 연금되고 투옥되었다가 6.25전야에 총살당한다. (전현수 [쉬띠꼬프 일기]가 말하는 북한정권의 성립과정역사비평사,1995. 레베데프 증언김국후앞의 책)

    ’9.20지령문‘ 1993년에야 공개되다.

    소련 해체후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이 소련 아닌 러시아를 공식방문한다러시아 대통령 옐친(Boris Yeltsin, 1931~2007)은 1992~3년에 공개한 소련의 비밀문서들 가운데 해방후부터 6.25무렵까지 한국관련문서들을 김영삼에게 선물하였다.
    스탈린의 ’9.20지령문은 가장 늦게 1993년에야 전문이 공개되었다.
    그것은 한반도 분단의 설계도였기에그만큼 분단의 원흉이 되기 싫었던 까닭이다.

    한국에 온 극비문서들특히 스탈린의 ’9.20지령문에 대한 연구들이 있지만스탈린을 분단의 원흉으로 단정한 경우는 드문 것 같다연구자들도 좌익의 세뇌 이승만=분단의 원흉‘ 프레임에 중독된 탓일 것이다.

  • ▲ 1946년 2월8일 조선임시인민위원회 발족, 즉 북한단독정권 출범식이 열린 평양 대회장에 걸린 현수막들. '인민위원회는 우리에 정부이다'라는 구호가 눈길을 끈다.
    ▲ 1946년 2월8일 조선임시인민위원회 발족, 즉 북한단독정권 출범식이 열린 평양 대회장에 걸린 현수막들. '인민위원회는 우리에 정부이다'라는 구호가 눈길을 끈다.

    6) 해방 6개월 만에 단독정권‘ 출범

     북한 총독‘ 시티코프는 당중앙(스탈린)의 명령을 지체없이 밀어붙인다일본학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가 규정했듯이 북한체제설계자였던 시티코프는 즉시 공산당체제부터 정비한다.

    북한공산당 설립=서울의 박헌영을 소련군38선경비사령부로 불러 108일 김일성과 담판을 벌이게 하고, 10일 김일성을 북조선분국을 설립한다이날을 지금도 북한로동당 창건일로 기념하는 까닭이다그 대회 2주일후 반발하던 박헌영도 굴복당의 지위는 서울과 평양이 뒤바뀐다다음해 9월 박헌영이 미군의 불법화에 쫓겨 도망칠 때관속에 시체로 누워 상여로 산속을 헤매다 38선을 넘은 것도 역시 시티코프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태아적정부(Embryonic Government)’ 5도행정국‘ 설치=시티코프는 소련군정령관 치스차코프와 정치사상 담당 레베데프를 시켜 중앙집권조직을 1119일 조직완료이북5도 행정국이 그것이다한달 걸려 조직한 10개국()은 곧 출범할 단독정권의 모태였다.

    지방 인민위원 선출 흑백선거=11월부터 북한전역 면---도 총선거가 실시된다민주국가의 자유-비밀투표가 아니다단일 후보를 내놓고 검은 투표함과 하얀 투표함에 찬반을 표하는 -반투표흑백투표이다주민들의 성향을 판별한 공개투표였던 것이다누가 반대할 것인가그렇게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단독정권 출범준비가 끝났다. 

    스탈린 명령 수행...국유화 토지개혁친일파 숙청

    마침내 1946년 2월 8일 북한만의 단독정권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한다.

    이것은 좌익이 분단의 원흉이라 낙인찍은 이승만 박사의  정읍선언보다 1년 4개월 앞선 것이다.

    스탈린이 직접 설계한 위성국  단독정권의 수립! 8.15해방 6개월만에스탈린 지령 6개월만에 한반도 북쪽에 소련 위성국이 나타났고김일성은 스탈린의 낙점 6개월만에 그의 하수인이 되었다. (부위원장 김두봉서기장엔 김일성의 외당숙할아버지 강양욱).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임시는 미국이 무서워 단독정권을 숨기려는 스탈린의 위장 악세서리였다이 두 글자는 1948년 유엔이 남한의 단독선거를 실시하려 하자 스탈린이 직접 삭제해버린다이런 때를 기다렸던 스탈린더 이상 임시로 포장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단독정권은 시티코프의 지휘에 따라 스탈린의 지령을 본격 실시하다.
    토지개혁 일본인과 지주들의 토지 몰수 모든 사유재산 국유화 친일파-반동분자 숙청 등이 그것이다.

    토지개혁은 무상몰수-무상분배소유권은 없고 농사만 짓는 정부의 농노(農奴)가 되었고농산물은 공산당 소유로 배급만 먹고 살아야 했다
    무엇이든 명령에 반발하면 반동-친일파로 처형되었다. 

    -소 공동위원회 개최=스탈린은 단독정권 출범 직전 미-소 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을 개최한다서울 덕수궁에서 116일부터 26일까지 열린 회담에서 의제 조정부터 결렬된다그러자 스탈린은 320일부터 본회담을 갖자고 제의미국이 동의한다이제부터 스탈린은 남한을 흡수하는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다왜 남한흡수협상인가다음 장에서 보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