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5년 11월23일 귀국한 김구 주석을 하지 사령관에게 소개한 이승만 박사(왼쪽).
    ▲ 1945년 11월23일 귀국한 김구 주석을 하지 사령관에게 소개한 이승만 박사(왼쪽).

    해방 이듬해 1946년은 백범 김구의 쿠데타와 함께 해가 밝았다.
    쿠데타라 함은 세모(歲暮) 1231임시정부가 미군정을 접수한다는 포고문을 2개나 공표하고 3.1운동 시위를 방불케하는 대규모 집회와 시가행진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1228일 모스크바 결정서가 나오자 충격받은 임정이 신탁통치 받을 바에야 우리 임시정부가 집권하면 된다는 단순논리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2의 독립운동'이라 했다.

    이때 김구를 설득하려다가 암살된 사람이 송진우(宋鎭禹,1890~1945)였다.

    격분한 하지 미군정사령관은 새해 첫날 11일 김구를 호출했다. 반도호텔 집무실에 나타난 김구에게 당장 과격시위 중지하라만약 나를 기만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호통을 쳤다. 권총을 빼들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김구는 자살하겠다고 응수했다 한다.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정용욱편 [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1)], 다락방,1994)

    미국의 입장에서 이것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이 서약을 파기한 예상 밖의 쿠데타였던 것이다. 하지는 사령관 목이 달아난 듯 길길이 분통을 터트렸다.

    김구의 입장에서는 내가 돌아왔으므로 정부가 돌아온 것이라고 귀국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임시정부의 집권은 당연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애국봉기였을 것이다.

    포고문 국자(國字) 1-2는 전국경찰력을 임시정부 지휘하에 두며, 반탁투쟁은 최후의 승리까지 계속한다고 했다. , 반탁투쟁을 아예 집권투쟁으로 전환시켰다는 말이다. 이른바 임정봉대론((臨政奉戴論)‘의 실천이다. 그러나 세계 최강국들이 그토록 만만한 존재들인가.

    다시 말하면, 김구는 자신을 임시정부와 동일시하였고, 미국측에 써준 서약서따위 귀국용일뿐, “미군을 내보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평자들은 말한다.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이 안이할뿐더러 38선분단상황을 극복할 전략적 사고력이 빈곤했다는 지적이다. 이와같은 김구의 집권집착 임정봉대론이 머지않아 스탈린의 먹이가 될 줄을 김구는 예상이나 했을까.

  • 정읍선언 이전에 돈암장선언‘ 있었다

     김구의 무모한 집권투쟁을 말렸던 이승만은 비명횡사한 송진우가 너무나 아까웠다그래도 가장 말이 통하는 국내 우익지도자였는데...애통한 이승만은 추모의 한시(漢詩)를 지어 슬픔을 달랜다
    송진우는 그날 밤 김구의 경교장(京橋莊)에 가서 미군정의 방침을 전해주고 궐기하려는 임정요인들을 설득하던 중매국노라 매도당하자 새벽에 귀가하여 잠자리에 들었을 무렵 사랑채에 뛰어든 괴한들의 총탄세례를 받았다.

    이승만은 김구가 암살배후라는 소문을 못 들은체 시국대책 마련에 몰입한다반탁투쟁과 함께 다가오는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협상에 대한 전략이 시급하다. 

    이승만미소공위 무력화 전략 마련...“한미일체 행동통일

    뭐든지 앞서가는 국제전략가 이승만 박사는 이미 미국대표단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두었다.
    결코 믿어선 안되는 미소공위를 무력화시켜야 하므로이승만은 새해초 기자회견부터 독촉의 위상부터 굳게 세우는 일에서 시작한다독촉이 통일정부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나는 내외국인에 대하여 대한민족의 통일을 실지로나 형식으로나 완성되었음을 선언한다

    남북민족세력을 규합한 독촉의 존재 자체로서 통일이 되었음을 인식하라는 주장이다.
     “
    한족정신(韓族精神)을 가진 한인들은 모두가 38선도 남북도 불문하고 정신적으로도 합동이고 사실적으로도 합동이다독촉중앙협이 전민족이 집중한 민족 대표기관이니 민족자주독립에 장애물은 다 용납지 못한다소련은 우리정부조직에 간여할 어떤 이유도 아무런 자격도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6.1.16.).

    이렇게 미소공위에 소련참여부터 원천 부정한 이승만은 정치적 협상을 앞에 두고 난감해 하는 고립무원의 순수한 군인‘ 하지 사령관을 돕기위해 발벗고 나섰다.

    나에게 양책(良策)이 있다” 이렇게 격려한 이승만은 그동안 갈고 닦은 지미친미용미(知美親美用美)의 병법을 구사한다미국독립운동시 설립헸단 비상국민회의를 본떠 독촉과 한몸인 독촉비상국민회를 조직한 뒤하지와 공론하여 국회와 같은 국민조직 민주의원(民主議院)을 발족시킨다명실공히 남한의 정부격 대표기관이다.
    이것은 이승만의 독촉-민주의원이 미군정과 혼연일체가 되어미소공위에서 벌어질게 뻔한 소련의 공산화협상 공작을 제압하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이때까지만 해도 하지는 이승만이 둘도 없는 정치적 의지처였다. 

    외부에 누설 말라자주정부 세워 북쪽을 청소해야겠다

    그날도 하지와 만나고 돈암장에 온 121이승만은 독촉 전체회의에서 미군정의 은밀한 방침을 전해주면서 자신의 굳은 결의를 토로하였다.

    이 말은 밖에 누설되어선 안된다군정측의 말은 소련측과 회의가 결렬되어선 안된다 하니....원컨대 여러분은 일어나서 자기의 정부를 자기가 조직한 후에 북쪽을 청소하지 않으면 안되겠다....우리의 통일은 우리가 직접 대북관계를 해결하겠다고 (내가했다.” ([비상국민대회대표회 회의록] 1946.1.21. [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13] 건국기문서)

    이날 돈암장의 비밀발언은 이승만의 준비된 결의와 양책의 정체를 보여준다미소공위가 결렬될 경우의 대비책으로 마련한 히든카드--‘우리 손으로 자주정부를 세워 북한의 소련과 공산당을 청소한다는 그것은다시 말하면 6월에 나올 정읍선언의 내용이 이미 1월 이전에 구상이 끝나 돈암장에서 먼저 밝혔다는 이야기다이 구상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 ▲ 미소공위 미국수석대표 하지 장군과 소련수석대표 시티코프(오른쪽).
    ▲ 미소공위 미국수석대표 하지 장군과 소련수석대표 시티코프(오른쪽).

    미소공동위 개막부터 파열음...소련 친소정부‘ 고집

    북한에 단독정권을 출범시켜 우위(優位)를 확보해놓은 스탈린은 시티코프 수석대표에게 미소공위에서 자신의 전략을 관철시키도록 명령한다사실 시티코프는 수석대표자격도 없는 사람이다스탈린 자신이 만든 규정대로라면 소련측 수석대표는 북한주둔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맡아야 맞는데 이를 제쳐놓고 연해주 정치 군사회의 책임자 시티코프에게 맡긴 것한반도 전체 위성국화 프로젝트는 그 전문가 시티코프에게 준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이런 잘못을 지적할 줄도 몰랐던 미국측 수석대표 하지였던 것이다. 

    개막연설이 폐막연설 같다” 미국소련 방침에 충격

    320일 오후 2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 1차 회의가 열렸다.
    시티코프는 개막연설에서 북한에 자치정부 기구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고 밝히고 앞으로 구성될 남북한임시정부가 소련을 공격하는 기지가 되어선 안된다고 못박았다이승만 같은 반소세력의 참여를 반대한다는 예고였다.

    이에 미군정측 대표 아널드(Archibald V. Arnold) 군정장관은 마치 폐막연설처럼 들렸다고 했다하지도 그가 한국의 소비에트화-식민지화를 추구하는 야심을 드러냈다고 개탄하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신탁통치용 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대상을 두고 양국이 처음부터 맞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소련은 반탁세력 전면 배제그리고 “2배분원칙을 밀어붙였다.
    남한측 협의대상 정당들의 배분률을 좌익정당 2, 우익정당 1’로 하자는 것이다.

    시티코프는 그 원칙에 따라 미리 확정한 각료명단까지 제시하며 강변한다
    이렇게 되면북한공산당 1, 남한 21, 합치면 전체 임시정부 각료는 공산측 3대 남한측 1이 되는 것한마디로 신탁통치도 공산정부이 맡아야 한다는 억설이 아닐 수 없다바로 동유럽 점령국가들을 차례로 위성국 만들고 있는 그 방식 그대로였다.

    순진하게도 정치적자유와 언론자유만 강조하는 미국측은 반격 카드도 본국훈령도 없다.

    생각다 못해 하지는 이승만을 동원한다그것이 이승만의 3남순행(三南巡行)이다.

    당시 미군정은 주기적으로 여론조사를 해왔는데 조사마다 대통령후보 1위는 이승만이 압도적이었다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인기를 보여주면 소련이 이승만 배제에서 양보를 얻어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스탈린의 전략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린애 장난 같았다.

     3남순행... ”이 참에 전국민에게 반공계몽 하자

    이승만은 그러나 생각이 다르다백악관도 미국무부도 기대할 수 없게 된 미소협상이지만 무엇이든지 주어진 기회마다 자기목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인이 이승만이다프란체스카도 동행한 그는 이번 기회에 남로당 인민위원회와 전평(全評:전국노동조합평의회), 전농(全農:농민노조), 부녀동맹과 청년동맹 등에 좌경화된 국민들을 일깨우자고 나섰다.

    지방 144개군에 독촉국민회가 조직되어있고 회원수도 106만 8천명이 넘는다이들이 주관한 연설회는 가는 곳마다 운집한 군중은 수만명이 보통이었다.

    국부(國父만세우리 대통령 오셨네!”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이승만은 반탁-찬탁을 떠나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외친다대구 10경주 6부산 공설운동장엔 개설이래 최대 20만이 넘는 인파가 나왔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등 보도)

    이승만은 공산당 비판 강연을 이어갔다.

    나는 공산주의와 극렬파들이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그들이 하는 짓은 인민의 복리가 아니라 통일을 지연시키고 자주독립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네들은 자본가 타도를 외치고 있지만자본과 노동과 토지가 발을 맞추지 않으면 우리나라 상업도 공업도 발전 못하고 민생도 발전할 수 없다

    동래에선 암살기도범이 잡히고 경호경찰은 갈수록 추가되어 수천명이 이동해야 했다.

    마산남해하동진주를 거치는데 인근 섬지방에서도 많은 배들이 동원되곤 한다전남 순천벌교보성장흥영암영산포에서 연달아 연설한 이승만은 목포에서 3만여명 군중집회가 끝났을 때 예상했던 뉴스에 접한다.

    미소 공동위원회 무기 연기‘ 56일의 일이다.

    광주 서정(西町초등학교 교정밖까지 꽉찬 5만여명 앞에서 이승만은 소련을 공격했다.

    소련인들이 해결할 줄 알았더니 못하고미국대표들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이다...결국은 소련도 이롭지 못하고 불행으로 생각한다....우리는 전국민의 결심으로 공산당의 제안을 접수치 않기로 했고 우리 국토를 한치도 주지 않을 것이니 소련은 각성하라

    광주에서 급거 비행기편으로 상경한 이승만은 하지와 맥아더의 최측근 굿펠로(Preston Goodfellow) 등과 미소공위 무기연기 대책에 대하여 요담을 이어갔다.

  • ▲ 삼남지방 순회연설회에 모인 군중들에게 연설하고 떠나는 이승만 박사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앞줄 가운데 한복차림).ⓒ연세대 이승만연구원.
    ▲ 삼남지방 순회연설회에 모인 군중들에게 연설하고 떠나는 이승만 박사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앞줄 가운데 한복차림).ⓒ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정읍발언‘...독자적 남북통일독립 선언

    한달 가까이 급변한 정국 대책을 구상한 이승만 박사는 다시 새로운 길을 떠난다.
    왜 새로운 길인가일단 미소공위에 맡겨보았던 남북통일독립 협상이 무기연기됨으로써 기대를 완전히 접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기대한 적 없다혹시나 하지도 않았다소련도 미국도 예상한 대로였을 뿐이다.
    당초 기대하지 않았기에 진작부터 반대하지 않았던가.
    역설적으로 소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소련의 음모를 일부나마 그 정체를 알았고역시나 무대책 미국에 맡겨선 안된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일이다. 

    62일 아침 830분발 호남선 남행열차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비서 이기붕(李起鵬)만 데리고 정읍(井邑)에서 내렸다중단했던 남선순행(南鮮巡行=3남순헹)‘ 일정에 따른 것이다.

    이튿날 3일 오전 독촉국민회가 마련한 환영연설회국민앞에선 처음 공개하는 말들이 터져나온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야,

    삼팔(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여러분도 결심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야 지금까지 노력해왔으나

    이번에는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통일기관을 귀경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야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이것이 유명한 정읍발언’, 아니 정읍선언이다처음 보도한 [합동통신]이 요약한 기사 전문이다
    한마디로 줄이면 미국과 소련에 맡기지 말고 우리 힘으로 자주통일하자는 것이다.

    여기 [이승만 독토린연재에서 줄곧 보아왔듯이귀국순간부터 시작한 이승만의 통일독립 주장에서 크게 달라진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구태여 지적하자면 남방만이라도와 세계공론에 호소해야 한다는 구절 정도이다.
    당시 소련이 북한 단독정권을 위장했지만 이런저런 보도로 다 알려진 사실남한에서도 우리도 정부 빨리 세워야 북한에 먹히지 않는다는 주장들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던 때었다.

    다음날 전주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이 묻자 이승만도 대수롭지 않게 응답한다.
    내 생각을 말한 것이지만민중들이 남방만이라도 무슨 조직이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서울신문] 194666일자).

    특히 그해 3월부터 북한인민위원회가 진행한 토지개혁’ 소식에 남한전체가 충격을 받았다.
    언론들이 보도하고 탈북 피난민들이 전하는 소식에 정치권은 물론민중들이 더욱 남한도 정부를 세워 토지개혁등 민생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읍선언이 나오자 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익정당 단체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남조선 단독정권 음모” “반동거두” “파쇼” “분단의 원흉까지 시위는 물론좌익신문들이 온갖 중상모략적인 보도를 쏟아내었다북한단독정권 수립의 책임을 이승만에게 덮어씌우는 시티코프의 작전이다여기에 김구의 한독당이 단독정권 반대‘ 성명을 내어 가세한 것이 눈길을 끈다.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이승만의 주장을 옹호하였다공산당은 자주통일기관(독촉)을 탈퇴하여 소련연방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기때문이라며 자주통일정권 수립은 국민이 바란다고 했다.

    이승만은 전주 공설운동장에서도 정읍선언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하였고이리군산을 거쳐 중남북 공주청주진천경기도 장호원까지 강행군을 펼치며 소련 추방자주통일독립을 목이 쉬도록 부르짖었다.

    이렇게 끝낸 3남순행은 미군정의 여론조사에서 큰 효과를 입증하고 있다.
    정읍선언 직후 67~9일 실시한 조사결과정읍발언 긍정평가 58%, 부정평가 28%였고,”이승만이 한국의 최고지도자냐“ 질문엔 그렇다“ 69%가 나왔다.
    이 숫자는 그러나 이승만의 정읍선언이 미국정책과 배치되기 때문에 하지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70%이상도 과반수가 넘지않도록 줄인 결과였다고 한다.(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츨핀사. 2013)

  • ▲ 이승만 박사의 돈암장을 방문, 대화를 나누는 김구(오른쪽).
    ▲ 이승만 박사의 돈암장을 방문, 대화를 나누는 김구(오른쪽).

    민족통일 총본부’ 설치...”내가 죽자’ 하면 죽을 각오 있소?“ 

    1946년 629이승만은 마침내 민족통일총본부’(약칭 민통총본부결성을 발표한다.
    정읍 선언에서 밝혔던 통일을 위한 임시정부나 조직을 만들기 위한 전국조직체 통일추진단체이다이에 앞서 이승만은 610~11일 정동교회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2차전국대표대회를 열어 1,165명의 지방대표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는 절차를 거쳤다.

    이날 한 시간도 넘는 이승만의 연설은 총재추대 문제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다.

    여러분의 원()이라면 내가 피하지도 않겠고통일의 긴요함을 느끼는 만치내가 마정방종(摩頂放踵:온몸을 바쳐 남을 위해 희생함)할지라도 모든 단체와 협의해서 통일을 이루도록 힘써 볼 터이지만나는 명의만 가지고 일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내가 허락할 수 없다여러분이 내 지휘를 받아서 내가 죽자하면 다 같이 한 구덩이에 들어가서 같이 죽을 각오가 되어있소?“
    그러자 장내는 1천여명이 로 답하는 열광적 박수가 폭발한다.

    그런 사람은 어디 손을 들어 보시오
    참석자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보였다.

    한 손을 드는 것을 보니 절반쯤 각오가 드는 모양이야.“
    이 말에 웃음이 터지고 대표들은 두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옳지전심전력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겠단 말이지
    장내는 박수와 환호소리에 터져나갈 듯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다.

    통일을 속히 이루려면 통괄하는 총본부를 설치전민족이 동일한 보조를 취해야만 할 터이지이를 위하야 사지(死地)라도 피하지 않고 복종할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알고자 하오
    참석자들은 다시 일제히 두 손을 들어 마구 흔들었다.

    이승만은 통일을 방해하는 자들을 단호히 척결할 맹약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소련과 공산당이다.

    대회는 ‘3천만의 총의로 통일정권 수립을 촉진할 것을 결의함’ 등 3개항의 결의문과 미소공위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였다.([대한독립촉성국민대표대회 회의록]1946.6.11, [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14] 연세대한국학연구소,1998)

    이어 일주일후 종로YMCA 강당에서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전국대표자대회를 열고, ”나는 여자의 힘이 남자의 힘보다 크다고 생각한다며 이승만은 남녀단합과 여성 평등과 민주주의 강의를 이어갔다그리고 3남순회 때 못 간 개성을 방문하여 반공연설회를 열었다.

    이렇게 전국 순방을 끝낸 이승만은 전국민의 총의를 모아 남북통일정부 추진을 위하여 629일 민통총본부를 창설하고 민족통일선언을 발표한 것이었다이 민통총본부는 이승만이 귀국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비상국민회의민주의원에 이어 만든 네 번째 민족통합 조직체이다이번엔 공산당 등 좌익이 일체 배제된 것이 특징이다.

     미국 이승만-김구를 은퇴시켜라

     1차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된 뒤 5월 24일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William R.Langdon)이 번스(James F.Byrnes)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미국의 남한 점령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한반도 전체에 걸쳐 불가리아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에서 실시했던 것과 거의 다름없는 통일전선 정책을 강요하려 시도해왔다는 것이 이제 명백해졌다고 말하고, ”만약 그런 정책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소련의 한반도 지배를 촉진시킬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6일 미국무부와 전쟁부-해군부가 확정하여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대한정책(Policy for Korea)’은 시티코프의 요구(반탁세력 배제)에 순응하는 것이어서 충격적이다.
    그 새로운 정책은 미군정에 한국인 참여를 확대하라는 소위 '한국인화(Koreanization)정책'으로서핵심은 미국정책에 배치되는 반탁인물은 참여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만일 한국의 정치적 논쟁에서 태풍의 눈이 되어 온 몇몇 인사들이 일시적으로 정치무대에서 은퇴한다면 미국과 소련 당국사이의 합의도 크게 촉진될 것이라며 그들은 일본의 항복이후 귀국한 망명그룹이라고 콕 집어 지시하였다. “그들이 참여하면 미국목표 달성에 큰 방해라고 되풀이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이승만과 김구를 자발적으로 은퇴시키라는 명령이다.

    말할 것도 없이이것은 미국이 소련의 장단에 맞춰 하루 속히 신탁통치용 정부를 만들어주고 남한에서 명예롭게 철군하겠다는 트루먼 정부방침을 확인해준 것이다.
    대다수가 자유민인 한국인의 운명따위 안중에도 없었던가일찌기 이승만이 지적한 바미국이 또 한번 한반도를 소련에 팔아넘기는 배신 행위에 다름아니다.
    명에 살고 명에 죽는’ 군사령관 하지그날부터 이승만은 그에게 미국의 장애물이 된다.
    그가 이승만과 앙숙이 된 것은 인간적으로가 아니라 상부의 명령 수행탓이었다.

    직무완수를 위해 하지는 이승만의 모든 언동을 감시하고 통신우편을 도청-검열하며숙소 돈암장에서 쫓아내었고허름한 빈집에 든 72세 노인을 사실상 연금상태로 만들어놓았다이 틈을 노린 남로당원 경찰관 5명이 경비를 핑계로 암살을 기도하다 잡히기도 하였다. (윤석오 경무대 사계’ [남기고싶은 이야기들]) 

    미국의 좌우합작...이승만 유엔 외교’ 결심

     이승만-김구를 은퇴시키라는 미국무부가 주도한 남한의 좌우합작(左右合作)은 하지 군정사령관이 실무를 맡았다여러 가지 수배를 끝낸 하지의 고문 버치(Leonard M. Bertsch) 중위 집에서 626일 본격회합을 시작한다중도우파 대표로 김규식(金奎植,1881~1950), 중도좌파 대표는 여운형(呂運亨,1886~1947)이다.

    이와 병행하여 하지는 좌우합작정부를 뒷받침할 입법의원을 민선의원 45관선의원 45명으로 정하고 민선의원 선거를 실시한다바로 한국인화’ 정책의 실천에 나선 것이다.
    결과는 하지의 뜻과 달리 이승만 등 우파가 승리했다이에 김규식과 여운형이 반발했다. ”좌우합작위원회가 후보들을 다시 추천하여 재선거해야한다고 했다이에 하지는 임명의원 45명중 다수를 좌익세력으로 채웠다좌우합작 성공을 위해서다.

    여기에 이승만이 격분한다. ”좌익 입법의원 설립을 포기하라
    하지는 이승만이 권력잡도록 놔누지 않겠다고 맞섰다.

    결국 이승만은 방미를 결심한다김구와 상의하자 김구는 다시 임정봉대론(임정집권론)’을 주장하였다. ”안된다멀리 보라며 이승만은 또 말렸다다시 그랬다가는 미군정과 한국인의 대결이 되어미국의 힘을 활용하려는 이승만의 용미론(用美카드가 날아가기 때문이다.

    김구는 형님의 방미가 실패하면 그때 혁명을 하겠다고 고집하였다그러면서 형님에 대한 저의 충성심은 남산의 소나무가 다 말라죽어도 변치않을 것이라 했다.
    다음해 김구가 변심했을때 이승만이 말한다. ”남산 소나무가 다 죽어버린 모양이야.“

  • 이승만의 유엔 외교 

    한국통일독립을 세계 Agenda로 세우다 

    이승만은 유엔외교 결심을 굳혔다미군정도 무망이고 김구도 김규식도 더 말릴 수 없다.
    올리버의 말에 의하면 이승만은 북한에서 소련을 몰아낼 방책은 미국이 전생하는 것 뿐이다라고 증얼거렸지만마음대로 될 일인가.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미국정부가 끝내 자유통일독립을 외면한다면이 문제를 유엔에 호소하는 길만 남았다.
    정읍선언에서는 남방만의 임시조직을 만들어 국제공론에 호소하자고 했지만 미국이 소련협력에 올인하는 마당에 전후순서를 따질 의미도 사라졌다가자유엔으로!

    얄타회담 직후 유엔창설 때부터 유엔에 가입하려고 뛰고 뛰었던 이승만에게 유엔 활용은 곧미국 활용이다그러기 위해서 한국문제를 세계무대 중심에 우뚝 세워야만 가능하다. 

    첫째한국통일독립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오세계평화를 좌우할 세계의 아젠다(Ggenda)’인 것이다왜냐하면 한반도를 두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2개 최강국이 대결하는 이것은 새로운 정치전쟁곧 전후세계의 이념전쟁이기 때문이다이념전쟁이라면 자신있는 이승만이다이념전쟁에서 승리한 건국이라야 아무도 쉽게 넘보지 못할 것이다.

    둘째, 38선을 그은 미국이 38선 폐지를 요구해도 소련은 38선을 봉쇄한채 거부하고 있다트루먼과 스탈린의 마음을 돌려 제압할 힘은인류평화와 정의를 내세운 유엔의 도덕적 파워 뿐 아닌가이것이 국제공론에 호소하려는 이승만의 계산이다.

    셋째만약 유엔이 한국의 통일독립문제를 지지해준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다그 자체로서 신생국의 국가정통성과 국민정체성이 국제공인을 받아 확보되기 때문이다.

    넷째만약유엔의 도움으로 통일독립건국이 성공한다면이것은 만만세다유엔이 세워주는 나라라면 유엔 회원국이 될 것이며 신생국의 안전보장도 그만큼 튼튼해진다.

    다섯째그러므로 미소공위에서 버려진 통일독립 문제를 이번 유엔총회의 정식의제로 내세워 세계가 토론하고 찬성해 준다면우리나라 남북통일 건국은 전세계인의 지지를 받는 일석5(一石五鳥)! 한민족사에 처음 쓰는 역사적 기념물이다. 

    유엔무대 드라마 5 

    #서막 / ’미국 가기전에 다 끝내다

    1023일 개막한 유엔총회에 임영신을 우선 파견한 이승만은 서울에서 유엔외교를 시작한다.
    유엔총회의장 스파크유엔사무충장 트리그브 리중국대표단장 웰링턴 구필리핀대표단장 로물로뉴욕교구 스펠만 추기경그리고 누구보다 한국에 호의적인 엘리너 루즈벨트(작고한 루즈벨트대통령 부인미국대표단장 등에게 유엔이 한국정부수립을 지지해주고 승인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하는 전보를 몇차례 보냈다동시에 맥아더와 미정부 관료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유엔 50여개 회원국 대표들을 공략하는 홍보자료를 직접 만들어 임벽직 구미위원부와 임영신에게 계속 전달하였다자신의 특기 문서외교와 원격외교를 쉬지 않았다.

    이때 이승만은 도쿄의 동지 맥아더 극동군사령관과 가장 중요한 유엔전략의 결정적 방안을 논의합의약속한다이 약속이 유엔외교를 성공시켰다내용설명은 아래로 미룬다. 

    #1막 / ’정읍선언을 트루먼에게 제출 

    유엔총회의 막바지 124일 이승만은 군용기에 올라 태평양를 날아간다.
    우리 남북한 통일독립문제를 유엔총회에 제줄하겠다.”
    이 출발 담화에 전국이 끓어올랐다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환송대회외교활동비 모금운동까지답답하던 한국인들은 마치 이승만이 금방 통일을 가져올 것처럼 들떠있다.

    이승만은 도쿄에 기착맥아더와 오랜 밀담을 가진다.
    위에서 말한 유엔외교 전략즉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에 관한 대책의 재확인이다.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미국정가의 중심에 자리한 칼튼(Cartton) 호텔에 들었다한미협회의 미국인 VIP 이사진들과 임영신으로 전략본부를 차리고백악관국무부의회유엔을 상대로 캠페인에 돌입한다.

    미국무부의 태클=이승만을 은튀시키라고 지시했던 미국무부는 그가 다시 워싱천에 나타나 유엔총회에 참석하려하자 성명을 발표한다. “이승만은 유엔총회에 참석할 공식 자격이 없다.” 당연한 반응이다독립운동기간 임시정부를 승인해달락고 성화를 부리던 고집장이 노인이 다시 워싱턴에 나타나 이번엔 세우지도 않은 정부를 지원해달라니 발목을 꽉 잡은 것이다트루먼 대통령을 반드시 만나려던 이승만은 초장부터 국무부 친소파의 태클에 걸려버렸다.

    영문판 정읍선언‘ 배포=이승만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한국문제 해결책(A Solution for Korean Problem)’ 6개항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첫째남북한이 총선거를 실시하여 재통일할 때까지 활동할 남한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미소간 합의에 구애됨이 없이 유엔에 이관하여 가입해야 하고-소 양국과 점령해소 협상권을 갖도록 허용할 것즉 북한에서 소련을 내보내는 협상을 제시하는 6개항이다특히 추가된 것 중에 남북한에서 미소 양국군이 철수한 후에도 미국보안군(security troops)’은 남한에 계속 주둔시키라는 조항이 눈길을 끈다이 6개항이 다름아닌 정읍선언을 영문으로 번역하며 구체화한 내용이다.
    이 문서는 마셜 국무장관과 패터슨 전쟁부장관에게도 물론 보냈다.

    미국민 설득 여론전=트루먼 면담이 불가능해지자 이승만은 홍보 페인에 더욱 집중한다평생 신문-잡지로 독립운동을 펼친 언론인 이승만은 여론전의 달인이다수십년 엮어놓은 미국 언론계 중진들은 독립운동의 동지들한미협회 이사 윌리암스(INS통신 발행인편집인출신)는 물론뉴욕타임즈(NYT)발행인 설즈버거(Arthur Sulzberger)가 실어준 이승만 기사만도 수천건을 헤아린다이번에도 미국의 중립적 태도가 우리문제 해결을 붙잡고있다며 써준 주장을 보도해 주었다이승만은 보란 듯이 여러 신문들과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정부와 미국민들을 설득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 ▲ 라디오 방송연설하는 트루먼 미국대통령.
    ▲ 라디오 방송연설하는 트루먼 미국대통령.

    #2막 / ’트루먼 독트린‘ 선언

     새해 1947년이 밝자 희소식이 나왔다맥아더의 웨스트포인트 육사 2년 선배이며 세계2차대전을 함께 치른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이 120일 국무장관에 임명된 것이승만은 즉시 면담을 요청했다마셜은 중국의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주선하다가 좌절되어 귀국했다미국은 중국에서 실패한 좌우합작을 한국에서도 반복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보다 더 큰 뉴스는 3월 12일에 터졌다트루먼의 미국회 연설에서였다.

    소련의 위협을 받는 그리스와 터키에 4억달러 경제-군사원조 제공을 승인해달라

    이것이 뒷날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으로 불리는  미국의 첫 반공노선 공표였다.

    환호하는 이승만은 이튿날 트루먼에게 역사적 연설 대환영” 편지를 보낸다.

    공산주의에 대한 각하의 용감한 입장에서 주한미군당국에 좌우합작을 포기하도록 지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한국은 그리스와 같은 전략적 위치이며 미군지역에 과도적 독립정부를 즉시 수립해야만 한국이 소련 공산주의를 막는 방파제가 될 수 있고 남북한의 통일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승만은 뛸 듯이 기쁘다. 313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다음날 국무부 회의에서 마셜 장관이 소련의 비협조적 태도를 비난하면서 남한에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추진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유영익앞의 책)

    그뿐인가전쟁부 장관 패티슨(Robert P. Patterson)도 한국문제 해결책을 읽었다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반응을 보내왔다.

    NYT에 폭탄성명 발표=“드디어 미국이 변하고 있구나” 흥분한 이승만은 NYT에 놀랄만한 성명서를 게재한다백악관과 미정부를 강타한 폭탄발언이다.

    남한의 독립은 곧 기정사실화 될 것이다새로운 프로그램의 기본요소들이 사실상 합의되었다목적은 소련의 북한철수를 이행시키고 한반도 전체 통일독립이 완성될 때까지 한미양국 협력을 강화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6개항을 열거하였다그것은 한국문제 해결책의 요약으로서 미정부의 변화에 용기를 얻은 이승만이 자신의 요구를 기정사실화 시키는 작전이었다.

    놀란 미국무차관대리 애치슨은 전면부인하는 성명을 내고 이승만의 비행기 예약을 취소시켰다.
     이승만은 이번에도 맥아더가 주선해준 군용기로 48 귀국길에 오른다.

    먼저 맥아더에게 방미 결과를 전했다.
     ”이승만의 첫 마디는 맥아더가 약속을 이행해준데 대한 감사였을 것이다“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청미디어, 2019).

    그렇다그것은 방미전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신신당부한 일즉 한국문제 유엔이관’ 방안을 적극 돕겠노라고 다짐한 맥아더가 약속을 잊지 않았으며맥아더의 선배 마셜이 국무장관이 되자 다음 날로 이승만의 제안을 전달해 준 결과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또 기도를 올린다.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될 리가 없어...하나님 감사합니다!“

     #3막 맥아더 유엔 이관‘ 앞장

     맥아더가 마셜에게 보낸 문서는 이승만의 제안에 자기의견을 덧붙인 것이었다.

    1) 모든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 2) 한국문제 해결방안을 만들기위해 제3의 국가들로 위원회 구성, 3) 모스크바 결정서의 명확한 의미를 확인하기 위한 미---중 4개국회담 소집., 4) 하나의 독립국가를 세운다는 전제하에 모든 장애를 해결하기 위해 미-소 최고위급회담 개최 등으로서, ‘한국문제 유엔 이관에 따른 부수적 보완책까지 건의하고 있다. (미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마셜 장관에게 올린 메모랜덤, 1947127. FRUS 1947. vol.).

    마셜조건부 찬성=중국의 국공합작에서 쓴맛을 본 마셜은 한반도 좌우합작에서 또 패배하면 무슨 망신이랴맥아더의 제안을 받자 그는 한국문제에 대한 부간특별위원회(The Special

    Interdepartmental Commitee on Korea)를 설치갖가지 시뮬레이션 분석을 맡긴다.

    결론은 소련이 미국의 요구조건들을 거부할 경우 유엔이관 긍정검토로 정리되었다휴회된 미소공위를 한번 더 열어보고나서 미국이 빠져나올 명분을 소련책임으로 만들자는 뜻이다.
    여기에 전쟁부 장관 패터슨이 역시 찬성을 표하고 나왔다. 44일 애치슨 국무차관대리에 보낸 문서에서 남한의 미군을 조속히 우아하게 철수하는 방법으로서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거나 독립정부를 수립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을 전한 것이다
    패터슨은 어디까지나 미군 철수가 우선이다. 2차대전후 미국은 국방예산 축소와 해외주둔병력감축에 매달릴 때였다.

     #4막 /이승만 미국은 도망치지 말라 

    521일 재개된 제2차 미소공위에서 소련 시티코프는 뜻밖에도 유연한 자세로 나왔다.
    남한의 협의대상 정당 및 사회단체 범위를 대폭 확장하여 반탁했더라도 일단 가입후 찬성하면 과거불문이라며 인물선정을 위한 제3분과위까지 신설하고 미국도 동조하였다.

    반탁 우익진영에 난리가 났다지금 참여하지 않으면 새 정부의 권력 배분때 제외될 것이기 때문이다김성수장덕수김준연 등 한민당 간부들은 미소공위 적극 참여로 돌아섰다이승만이 강력히 보류를 주장하자한민당은 들어가서 반탁하겠다며 하지에게 우르르 몰려간다.

    왜놈들 같아도 저렇지는 않을 것을쯧쯧“ 극히 실망한 이승만은 이때의 일로 한민당을 불신하고 건국 후에도 입각 요구를 외면하게 되었다고 한다.(윤석오 증언앞의 책)

    김구의 한독당도 극심한 논란 끝에 파벌별로 각자 참가한다당은 두쪼각이 나버렸다.
    권력 앞에서 이념노선 따위 안 보이는 한국정치인들그때나 지금이나 좌우 모두 마찬가지다.

    소련 작전에 말린 정치선전=5월에 재개된 미소공위는 무려 4개월이 넘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소련이 미국을 지치게 하려는 듯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나왔기 때문이다.
    방대한 명부작성을 둘러싸고 특정 인물들과 15개 단체를 제외하자고 우긴다.
    남한 대표 수백명을 북한에 데려가 북한 대표들과 상견례’ 회의까지 강행.
    미군정이 불법화한 공산분자들을 검거하자 소련측이 비난하며 회의 보이콧 위협.
    결국 양측의 정치선전장으로 변한 공동위는 원점으로 돌아가 격돌한다.

     한국문제 유엔에 이관=마침내 미국은 4개국(---)회의에 붙이자고 제안한다. ‘모스크바 결정서는 정치적자유와 언론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재확인하자는 것이다소련은 반탁세력은 민주세력이 아니다라며 거부하였다.

    끝내 소련과의 합의가 불가능함을 확인한 미국은 결단을 내렸다.

    미국무부는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이관하겠다고 소련에 통고하였다이승만의 제안을 미국이 수락한 순간이다유엔 제1정치위원회는 921일 한국문제의 의제 채택 여부를 투표에 붙였다결과는 12통과소련과 폴란드가 반대했다.

    시티코프동시 철군 제안=한국문제가 유엔문제로 바뀌자 다급해진 시티코프가 남북한주둔 양국 군대를 동시에 철수하자고 제안한다. ”만일 미국대표가 1948년까지 미국군대를 완전히 철수시키는데 동의한다면 소련군은 미국과 동시에 조선에서 철수할 수 있다는 것을 성명한다.“ 시티코프도 회의 실패를 자인한 것이다소련은 이 미군철수가 사실상 미소공위 협상의 최종적인 목표였음을 제입으로 실토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승만 소련군만 나가라=이승만은 즉각 반격한다. ”우리는 그 철군제안의 의도를 잘 안다소련이 약소한 우방(한국)을 하등의 이유도 자격도 없이 점유함은 국제적 폭력이다일본이 항복하자 참전하였으므로 소련은 한국 해방에 한 치의 기여도 없는 것이다따라서 철수는 소련군만이 해야 한다.

    북한에는 이미 한인정권이 들어서 있다미국은 한국분단의 책임을 일부는 져야하므로우리가 남북한의 혼란을 정돈할 때까지는 빠져나감이 불가하며 빠져나갈 수도 없다.“

    미국이 38선을 그엇으므로 북한청소가 끝날 때까지 도망치지 말고 책임지라는 말이다.

  • ▲ 이승만의 유엔외교에 앞장서 유엔회원국들을 설득한 임영신과 임병직.
    ▲ 이승만의 유엔외교에 앞장서 유엔회원국들을 설득한 임영신과 임병직.

    #5막 유엔총회한국결의안 통과

     해방후 2년 넘게 진흙탕에서 딩굴던 한반도 독립문제 해결의 문이 이제 빼꼼히 열렸다.
    스탈린의 음모에 의한 미-소공동위가 완전파탄 나고국제전략가 이승만 특유의 용미론이 유엔 외교로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임영신이 기뻐 통곡한 유엔총회부터 가보자. 

    뉴욕의 가을 끝자락 1114일 유엔총회는 찬성 43반대 0기권 6표로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 6개항을 채택하였다기권국은 소련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유고슬라비아백러시아우크라이나.

    1) 선거에 의한 한국대표들이 한국문제를 심의하는데 참여하도록 초청돼야한다한국(남북한)대표들이 한국민에 의해 실제로 공정하게 선출되는 것(남북한총선거를 감시할 수 있는 여행권등 모든 권한을 가지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TCOK)을 설치한다.

    2) 한국국회(남북한통일국회)를 구성하여 한국중앙정부(Naional Government of Korea)를 수립할 대표들을 선출하는 선거가 늦어도 1948년 331일 이전에 실시되어야 한다.

    3) 선거후 가능한 빨리 국회를 소집중앙정부를 수립하고위원단에 통보할 것.

    4) 중앙정부는 위원단과 협의하여 자체의 국방군을 설립하고 이에 편인되지 않는 군사단체 및 준군사단체를 해산시키며남북한의 군사령부와 민간기관으로부터 정부의 기능을 인수하고가능한한 빨리, 90일 이내 점령군을 완전히 철수시키도록 점령국과 조정한다.

    5) 위원단은 상황의 진전에 따라 유엔총회의 임시위원회(소총회)와 협의할 수 있다.

    6) 회원국들은 위원단이 책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원조와 편의를 제공해야한다.

    이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다음의 9개국으로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이들 가운데 인도 대표가 끼어 단장을 맡게 되는 사실이 한국에게 얼마나 역사적 행운이었던지는 뒤에서 잠깐 보기로 하자. 

    ★ 안절부절 이승만, “조기총선” SOS...?

    이때 이승만 박사는 유엔결의안에 환호하기 보다는 새로운 걱정에 밤잠을 못 이룬다.
    남한엔 남한을 대변할 대표기관이 없기 때문이다이승만이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세워 소련에 대응해야 할텐데고군분투한 과도입법의원 총선거 법안이 아직도 온갖 핑계로 묶여있었다좌우합작에 올인한 하지는 물론중상모략 방해하는 정파들이 문제였다.

    이승만은 날이 밝자마자 부르짖는다.

    서북파(평안도)의 지방열(지역감정싸움도 음험하고 친미파 이승만은 믿지말라는 측도 왜 그러는지 다 알고있다지금 긴급한 것은 유엔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민의에 의해 선출한 국회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유엔에 남한의 민의를 대변할 민선기관이 반드시 필요하다.
    북쪽엔 이미 인민위원회라는 정권이 서있고 남방엔 아무것도 없으니유엔위원단이 오면 북쪽기관이 한국전체의 대표기관인줄 알고 그쪽에 의존할까 두렵다한시 바삐 총선거를 실시하여 우리 국회를 구성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동아일보] 1947년 1119일자)

    쉽게 말하자면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이다천신만고 끝에 정읍선언을 유엔에 이관시켜서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으나남한은 속수무책 아닌가동유럽에서처럼 소련이 북쪽정권을 이용하여 유엔위원단을 기만한다면 가짜선거에 의한 공산화가 닥칠지도 모른다. “폴란드를 보라시간이 없다.”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

    만사에 빈틈없는 이승만이 발을 동동 구를 때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또 어디로 방향을 뒤틀어 굴러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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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읍선언=이승만 독트린인가? 

    A. 자주독립정신의 일관된 원칙을 관철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했기 때문이다.

    B. 국제공론(유엔)을 이용하여 소련을 물리치고 자유민주기지를 세웠기 때문이다.

    C. 지금도 북한을 청소하고 자주자유통일을 이뤄야하는 국가명제이기 때문이다.

     정읍선언 요약문답

    A: 정읍선언을 주창한 이승만은 과연 분단의 원흉인가?

    아니다앞에서 보았듯이 분단의 원흉은 스탈린이다.

    B: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조직하자는 주장이 결국 남한 단독정부로 결착괴었으니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 아닌가.?

    아니다소련이 북한의 총선거를 거부한 탓이므로 분단의 원흉은 스탈린이다C: 소련이 유엔감시단의 입북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에 자유선거를 실시하면 그동안 구축한 소비에트 체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스탈 린은 북한 위성국을 결코 내놓을 인간이 아니다.

    D: 미소공위에서 소련이 주장한대로 미국이 응했다면 통일독립이 되었을 텐데...

    그것은 동유럽같은 공산국가 통일이다통일만 되면 공산체제도 좋다는 것인가그런 입 장이라면 우리도 현재 북한같은 수령1인독재 전체주의 체제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