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남북한정당 연석회의를 개최한 평양 모란봉 극장. 1946년 2월 북한단독정권 출범후 지은 것인데 사진은 현재 모습.
    ▲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남북한정당 연석회의를 개최한 평양 모란봉 극장. 1946년 2월 북한단독정권 출범후 지은 것인데 사진은 현재 모습.

    1948년이 밝았다. 그해 815일은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이 탄생한 광복절!
    청년 이승만이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로부터 천신만고 반세기 독립운동이 맺은 찬란한 열매 대한민국이 우뚝 솟은 그날의 감격! 그날은 그러나 그냥 오지 않았다.
    그해 1월부터 스탈린의 건국저지공작이 연쇄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소련이 유엔결의안을 거부하고, 잇따라 김구가 평양으로 달려가 김일성과 미군철수-단정반대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그 사건들은 모두 스탈린의 오래된 한반도 정복 시나리오에서 나온 것이었다. 1992~3년 공개된 소련 극비문서들이 말한다.

     건국의 해 1948: 년초부터 폭탄두방 

    스탈린, 유엔한국위원단 입북(入)을 거부

    1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위원단)은 한국에 왔다. 열렬한 환영속에 입경한 유엔위원단 의장이자 인도대표 메논(K.P.S.Menon,1898~1982)이 북한 소련군사령관에게 입북을 신청하고 회신을 기다리던 121일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라디오 연설을 한다. 

    우리 위원단은 38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38선은 마땅히 철거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한국은 단일체이며 결코 분단되어서는 안 될 나라이다.
    나는 모든 한국사람이 가슴에 품고있는 염원을 반드시 반영시킬 각오이다.
    한국은 군사기지로 존재하지 말고 양대 세력간 황금다리가 되기 바란다.”

    이 연설에서 메논이 한국인의 통일염원을 강조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 14일 열린 환영대회의 50만인파가 부르짖은 통일함성에 감동하고, 그동안 접촉한 한국지도자들의 간절한 통일요청에 공감한 결과일 것이다. 거기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여류시인 모윤숙(毛允淑,1910~1990) )이 있었다.

     메논의 염원은 그러나 하루 만에 깨어지고 말았다.
    122일 소련외상대리 그로미코(Andrei A. Gromyko)가 유엔에 청천벽력감은 통고를 보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조선 입경을 거부함
    바로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공식 거부한 것이다.
    왜 거부했을까? 스탈린의 사전에 자유는 없다. 내땅을 누가 건드릴소냐!

    김구의 돌변...“단독정부도 통일정부라더니 단정 반대

    소련의 입북거부나흘후 126일 이번엔 김구의 폭탄이 터진다.
    이날 오후 5시 유엔위원단을 만나고 나온 김구는 놀라운 담화를 발표하였다.
    미소 양군이 철퇴하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안된다. 양국군이 철퇴한 후에 요인회담을 하여 선거준비를 한 후에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28일엔 장문의 의견서를 유엔위원단에 보냈다.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한다. 남북한인지도자회의 소집을 요구한다. ([서울신문] 1948129일자)

    이만하면 폭탄도 핵폭탄이다. 평소의 김구로부터 못 듣던 말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우익진영에 난리가 났다. “백범은 배신자이다
    왜냐하면, 김구는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면서 소련의 거부권을 다들 걱정하던 무렵에도 다음과 같이 주장했던 사람이다.

    소련의 보이콧으로 북한서 선거를 못하면 남한단독정부처럼 보일 것이지만, 법리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이지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 하는 것은 유감이다
    그리고 이승만과의 견해차를 묻는 기자회견에선 이승만 박사와 정치노선은 완전일치라 답하고 며칠후 이를 다시 확인하는 담화도 발표하였었다.

    이랬던 김구의 변신에 당황한 이승만의 독촉은 정중한 담화로 답한다.
    미소 양군이 먼저 철수하고 남북요인회담를 하자는 주장은 공산당의 선거 지연 주장이므로 우리 부총재 김구선생의 그러한 주장은 믿어지지 않는다. 공산당의 모략 아닌가.”
    한민당은 김구씨의 주장은 유엔총회에서 행한 소련대표의 주장과 꼭 일치된 것으로서 소련은 조선의 김구씨가 자기 대변인으로 생각할 것이라 규탄한다김구씨가 평소 주장하던 민족주의적 입장과 달리 결국 조선을 소련의 위성국화하려는 의도를 그대로 표현한 것 아닌가. 우리는 이제부터 김구씨를 조선민족의 지도자로는 보지 못할 것이고 크레믈린궁의 신자로 규정할 수 밖에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한민당은 한 달전 총탄에 쓰러진 한민당 중진 장덕수의 암살배후문제는 재판 중이라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일보]1948130일자)

    김일성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김구의 돌변이면에는 거물 간첩 성시백(成始伯,1905~1950)의 포섭공작이 결정적이라 한다. ([시티코프 일기], 박병엽 구술, 윤영구-정창현 옮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출판사, 2010). 성시백은 김일성이 직접 남파한 공작원이다.

    뿐만 아니라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1894~1947)의 암살사건도 김구의 변신에 한몫 했다. 지난 연말 122일 집에서 식사하다가 경찰관 복장의 범인들 총에 쓰러진 장덕수는 김구의 한독당과 통합론이 일어났을 때 합당이 아니라 헌당(獻黨)“이라며 한사코 반대하였는데 그 길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송진우에 이어 한민당 수뇌의 잇딴 암살에 김구 배후설이 높아지고 실제로 증거를 확보한 미군정의 재판에 불려다니던 김구였다.
    특히 해방후 귀국한 뒤 임정봉대(임시정부집권)‘을 내걸었다가 실패한 쿠데타로 인하여 김구는 미군정의 눈엣가시가 되었던 참에 살인교사범으로 몰렸던 것이다.

    김구의 미군철수와 요인회담요구 출처=김구가 갑자기 내놓은 미군철수‘ ’요인회담‘ ‘한인지도자회의용어는 시티코프와 김일성의 제안을 성시백이 전달한 것이었다지난해 9월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자 소련대표 시티코프는 미국측에 제안한다.
    남북한 미소양국 군대가 동시에 철수하고 우리가 해결못한 문제는 남북한 한인들끼리 해결하도록 한인지도자회의를 개최하자
    이것은 물론 클렘린 스탈린의 지령이다. 이를 미국측에 제안한 시티코프는 즉시 김일성에게 지시하고 김일성은 11월부터 올해(1948) 1월까지 암호방송을 반복하였다. ([시티코프 일기])

    김구 김규식 등 우익 거물들을 포섭하여 남북 요인회담에 참가시켜라이 암호지령을 받은 성시백이 임정때의 친분을 무기로 왕년의 ‘2중 스파이실력을 십분 발휘했던 것이다. (박병엽, 앞의 책). 그러니까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전부터 성시백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다.

  • ▲ 여류시인 모윤숙과 유엔한국위원단 의장 메논.
    ▲ 여류시인 모윤숙과 유엔한국위원단 의장 메논.

    ■ 다급한 이승만 유엔 결의안을 살리자

     거물간첩 성시백이 분주할 무렵이승만은 다급하여 긴급상황 돌파구를 찾는다.
    소련의 입북거부로 유엔위원단이 우왕좌왕유엔이 결의해준 남북한총선을 통한 통일독립의 꿈이 사라지기 직전이다이때 유엔위원단이 남북한 총선 문제를 유엔 소총회에 가서최종결정을 받기로 했으며 의장 메논이 뉴욕으로 내일 떠나기로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모윤숙과 메논 달 구경

    이승만은 시간이 없다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간청한다.

    이봐윤숙이밤이 늦었지만 메논씨를 좀 데려와야겠어아주 중요한 일이야

    박사님도...지금 몇신데 여자가 그런 청을 할수 있어요“ 모윤숙은 거절한다.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하는 고비에 밤이고 아침이고가 있나전화좀 걸어봐제발 마지막 청이야“ 
    이승만의 너무도 간곡한 목소리에 모윤숙이 일어났다.

    며칠전 메논과의 대화를 떠올린 모윤숙은 메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도의 타지마할 얘기가 나왔을 때 메논이 달밤에 타지마할을 봐야 그 낭만을 맛볼 수 있다던 말모윤숙은 한국의 왕릉들도 달밤에 안내하겠다고 말했었다.

    달빛이 좋은데 금곡릉 산책 어떠세요?“

    메논은 뉴욕 다녀와서 가자고 거절했다모윤숙은 뉴욕 가시기 전에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며 졸랐다역시나 메논은 차를 몰고 나타났다유엔위원단 숙소 국제호텔 바로 옆집이다.
    동대문 쪽으로 가다가 추운데 인삼차 한잔 마시고 가지요“ 이화장 마당에 차를 세웠을 때 메논은 따라 내리면서 소리쳤다. “Naughty girl...“ ‘못된 여자란다.

    그때바지 저고리를 입은 이승만이 기다렸다는 듯 뛰어나와 메논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달구경 가자는 바람에 나왔지요여기가 목적지 아닙니다“ 겸연쩍게 웃는 메논은 이승만에게 끌려 인삼차 테이블에 앉았다.

    그 사이 프란체스카는 모윤숙을 주방으로 끌고 가서 한지(韓紙두루마리를 주었다.

    그것은 이승만 지지자 60여명의 명단붓글씨로 이름을 쓰고 날인한 것이다김구와 김규식은 이미 지지자 명단을 메논에게 전달하였는데 비서 이기붕이 깜빡 잊어버려 뒤늦게 비서 윤치영이 급조한 것이었다모윤숙은 이화장을 나온 메논에게 두루마리를 코트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이승만은 포기한 줄 알았는데...왜 미스 모에게 이런 일을 시킬까요?“
    중얼거리는 메논에게 모윤숙은 다짐을 두었다.
    그 모든 이유는 훗날 역사가 의장님께 알려 주겠지요만약 의장님이 이 서류로 성공시켜주신다면요...저는 의장님만 믿습니다온 국민이 이 서류에 쓰인 대로 이런 지도자를 지금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그때 메논이 손을 잡았다. (모윤숙 [회상의 창가에서중앙출판공사, 1968).

     메논 연설 이승만은 남한에서 마력을 가진 이름이다

    당시 뉴욕 롱아일랜드 레이크 석세스(Lake Success)에 위치한 유엔에서 유엔소총회가 219일 열렸다개회 벽두에 연단에 오른 메논은 한국문제 전반을 보고하는 연설을 했다.
    메논은 소련의 입북거부로 난관에 빠진 위원단이 격론 끝에 유엔이 위임한 사항을 총회에 반납하는 선택은 만장일치로 폐기하였음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안 등 3개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현재 남한의 대표적인 우익 3개정당(독촉국민회한국민주당한국독립당)과 좌익4개정당(남조선로동당민주주의민족전선인민공화당근로인민당)을 설명하고, ”유엔에 의하여 한국의 국민정부로서 승인 될 정부를 즉시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정당은 2라고 밝혔다그 정당들은 이승만 박사가 영도하는 독촉국민회와 김성수가 영도하는 한국민주당이며 이들이 남한에서 여론의 대부분을 대표한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진다.
    즉시 총선을 주장하는 우익 2개정당은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그 재산이란 곧 이승만 박사의 성가이다이승만 박사의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의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그의 연륜과 학식과 사교적 매력과 윌슨 대통령과의 친분과 한국의 자유에 대한 평생의 일관된 옹호로 말미암아 판디트 자와하랄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가 인도의 국민적 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이미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이 박사는 돌연히 38선이 표징하는 좌우대립이 들이닥침으로써 극우로 알려져 왔다그러나 그는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옹호하거나 또는 고려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애국자이다.“ (Yoon Sook Mo, [Speeches of Dr. Menon] Mun Hwa Dang, 1948. [동아일보] 1948222일자).

     체코 공산화 충격...유엔소총회남한만의 선거 결의
    메논의 연설이 진행될 무렵동유럽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미국과 유럽에 충격을 주었다스탈린이 지시한 쿠데타였다연립정부에서 경찰력을 장악한 공산당 내무장관이 우파세력을 숙청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221일 정권을 전복시킨 것독일 패망후 귀국한 망명정부 인사들이 세운 체코 제3공화국은 사라지고 스탈린이 지도하는 공산정권이 들어선 것이었다반공주의자 외무장관 마사리크는 호화로운 궁정에 있는 관저3층에서 투신자살하였다.

    마셜 미국무장관은 성명을 발표, ”체코 정권은 인민이 승인한 것이 결코 아니오 공포 정권’“이라 비상을 걸었다.

    224일 다시 열린 유엔소총회에서 미국 대표가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중앙정부로 승인하자는 결의안을 제시하였고 26일 투표한 표결에서 절대다수 지지로 통과된다. (찬성 31반대2기권 11). 한국에서는 전국민이 환호하는 축하잔치가 벌어졌다.
    이것으로 이승만의 전쟁은 승리로 끝났을까. 아니다. 첩접산중이다.

  • ▲ 김일성을 만나러 38선을 넘는 김구. 아들 김신(오른쪽), 비서 선우진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 김일성을 만나러 38선을 넘는 김구. 아들 김신(오른쪽), 비서 선우진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3. 불타는 제주도...김구는 평양으로 달리다 

    이제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평양으로 갈 때가 되었다.

    제주도가 좌익의 폭력투쟁 불길에 휩싸여있던 4월 19일 김구는 경교장을 나선다.
    우익청년단체는 물론김구의 한독당 청년들도 선생님가지 마시오“ 격렬한 반대농성을 했다현관이 막히자 김구 일행은 뒷문으로 빠져나와 차를 타고 그날저녁 38선을 넘었다.
    김일성은 414일로 예정한 남북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란 긴 이름의 민족통일전선 연극의 개막날짜를 김구의 입북이 늦어져 몇 번이나 미루지않으면 안되었다.

    김구 빠지면 안된다=김일성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김구를 꼭 참석시켜야 한다고 시티코프도 레베데프도 재삼 다짐을 두었다스탈린이 만든 민족통일연극 각본에 주인공이 빠지면 안되기 때문이다.

    시티코프는 통일극’ 쇼의 총책임자회의 전반에 관한 의제(議題)들과 토론순서담당 발표자 와 사회자를 정하는 것은 물론김일성의 연설과 성명서 원고마지막 남북공동성명서까지 완성해놓았다스탈린의 결재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그뿐인가김구가 210일 발표한 유명한 성명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원고도 직접 챙겼다고 한다김구가 딴소리 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시티코프 일기및 레베데프 비망록))

    읍고(泣告)’란 눈물로 호소한다는 뜻인데 민족통일을 위해 38선을 베개 삼아 죽을 지언정...“ 운운 매우 감상적인 구절들이 심금을 울리는 글이었다평양 군정의 선전전문가의 작품이란 설도 있지만아무튼 이 심부름도 성시백이 맡았다.

    남한대표단 실무 총책은 성시백
    성시백은 신이 났다스탈린과 김일성이 명운을 건 남북연석회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남한의 거물 두 김씨(김구-김규식)을 비롯자신이 포섭한 주요인사들이 2백명도 넘게 평양에 간다대표단 인물 선발회의진행 자료 체크교통편숙소문제등 모든 실무의 총책임자다약 17일동안 김일성의 그림자 실세로 빠지는 자리가 없었다명실공히 남한의 북한대표로서 마지막날 대동강 쑥섬 어죽파티까지 요인회담 멤버들의 관리감시 임무를 다하였다.

  • ▲ 평양 남북정당연석회의에서 축사를 읽는 김구(1948.4.22).
    ▲ 평양 남북정당연석회의에서 축사를 읽는 김구(1948.4.22).

    ◆ 환대받은 김구 ’5분 축사‘...옛 약혼녀가 호텔 수발 

    1948년 4월은 평양과 모스크바에서 동시에 한반도 분단고착’ 드라마를 공연한 달이다평양에선 김구-김규식-김일성 3김이 주연이고클렘린궁에선 스탈린이 감독한다.
    분단고착이라 한 것은이때 같은 시간대에 모스크바 스탈린이 1년간 임시로 위장했던 북한임시정권(임시인민의원회)를 아예 세계에 공개할 공식국가로 데뷔시킬 준비를 끝내기 때문이다그 국가데뷔도 남한 단독정권이 등장한 이후라야 분단 주범이란 욕을 피할수 있으므로 스탈린은 때를 기다린다. 

    우리민족끼리 통일문제 해결하겠다“ 던 김구는 열흘동안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회의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민족통일론을 의제에도 올리지 못했다아니관심조차 없는 듯주석단에 앉았다가 ‘5분 축사를 한 것이 전부였다.

    백범이 17일동안 북한에서 했던 일은 연고지 방문평양 냉면대동강 어죽 등 토속음식 맛보는 일 등이다가장 눈길은 끈 일은 두 가지였는데옛 약혼자 안신호의 호텔 수발그리고 김일성과의 단독 밀담이다.

    김구가 평양의 호텔에 들던 날뜻밖에도 무척이나 반가운 여인을 만났다.
    과연 시티코프의 작전은 치밀했다김구가 28세 총각시절 약혼했다가 결혼을 못한 안신호(安信浩, 1884~1963)를 수배하여 72세 김구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의 여동생 안신호는 목사였던 남편과 사별하고 진남포에서 살고 있는 64세 과부였다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상수리 특별호텔에서 김구의 모든 수발을 들었다고 한다이 공로로 안신호는 북한의 국회의원까지 출세하게 된다. (선우진 지음최기영 엮음 [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푸른역사, 2008).

  • ▲ 김일성이 김구를 회의장으로 안내하는 모습.
    ▲ 김일성이 김구를 회의장으로 안내하는 모습.

    ★ 김구-김일성, 2시간 밀담...‘통일 협상은 없었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요인회담을 방북의 최대 사명처럼 내세웠던 김구가 정작 김일성과 단독회동한 결과를 보면 그의 방북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아리송해진다.
    왜냐하면 53일 장시간 김일성과 만났음에도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보다 통일과 무관한 것들 뿐이기 때문이다북한의 비밀주의야 그렇다 치고 김구는 이 문제에 침묵 일관이다.

    레베데프의 기록에는 김구의 발언 요지가 송전(送電)과 송수(送水)문제조만식 석방그리고 남한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불평 등이었다고 써놓았다.

    또한김일성이 여러차례 김구의 신변을 염려하자 남쪽에서 활동이 힘들면 북에 올테니까 과수원이나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고싶다고 김구가 말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김구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상징하는 관인(官印)을 꺼내 놓으며 장군님께 바치겠다고 말한 일이다김일성이 사양했다는데 당시 김구의 본심을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한다(박병엽 구술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그리고 여운형]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선인출판사, 2010) 외 다수.)

    김구가 자신의 한독당 청년들까지 말리는 모든 반대를 뿌리치고 평양행을 강행한 본심이란 무엇일까본인의 말을 들어보자.

    남조선에서 총선거로 세우는 정부나 북조선에서 세우는 정부나 단독정부임에 틀림없다...조상이 같고 피부가 같고 언어와 피가 같은 우리민족끼리 마주 앉아서 이야기나 하여보자는 것이 진의이며흉금을 털어놓고 담판을 해보아서 안되면 차라리 38선을 베개 삼아 자살이라도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중략),,,지난번 김석황문제에 아무 관계없는 나를 증인으로 출석시킨 것과 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려한 것을 볼 때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자유신문] 1948217일자).
    ,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장덕수 사건으로 인한 위협을 피하고자 한다는 토로였다. 단지 그것만일까.

    통일정부 대통령=이런 이유들 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유로 성시백의 선물을 꼽는 연구자들이 대부분이다.
     
    임정의 파리 특파원을 지낸 서영해(徐嶺海,1902~?)를 내세워 김구에게 미끼를 던진 성시백이 직접 김구를 찾아가 포섭했다는 것성시백의 선물이란 이것이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세울 통일정부에 주석각하를 대통령으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 회고록이나 증언에서 나도는 이 말이 당시 김구의 형편상 가장 유력한 정황증거로 내려오고 있다더구나 김구자신이 임정봉대론자로서 집권욕이 강했던 점을 스탈린이 콕 찝어 '큰 미끼'로 유혹함으로써 평양행을 성공시켰다는 지적들이다.

  • ▲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남북정당연석회의, 주석단에 나란히 앉아있는 김일성 홍명희 김구가 보인다. 태극기에 놀라지 마시라. 이때 북한은 스탈린의 승인을 얻은 인공기를 만들어 놓았으나 남한흡수를 위한 심리전 차원에서 태극기를 계속 사용한다.
    ▲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남북정당연석회의, 주석단에 나란히 앉아있는 김일성 홍명희 김구가 보인다. 태극기에 놀라지 마시라. 이때 북한은 스탈린의 승인을 얻은 인공기를 만들어 놓았으나 남한흡수를 위한 심리전 차원에서 태극기를 계속 사용한다.

    남북공동성명서 김구의 서명

     김일성은 남북회의 벽두에 자칭 4대원칙을 내걸었다.
    유엔위원단 추방과 유엔결의 무효화단선단정 반대 미소 양군 동시철퇴 자주적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이다자주적 선거란 유엔감시 총선을 반대하는 말이다.

    열흘도 넘는 긴 회의를 마친 남북대표들은 430일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서명 발표한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김구의 서명이 매우 놀랍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다.

    왜냐하면김규식을 포함한 두 거물 독립운동가의 일생을 재평가해야 할 정도로 치명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이다한마디로 김일성의 주도권에 철저히 이용당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성명서 4개항을 요지로 살펴보자.

    성명문 1) 미군 철수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로부터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은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은 지난해 미소동위가 좌절되자 소련대표 시티코프가 미국측에 제의한 그대로다.
    양국군 동시철수가 함정이다북한과 접경한 소련군 철수와 태평양으로 나가야하는 미군철수를 동열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결정적 불평등이다소련은 좁은 두만강만 건너면 북한이기 때문이다.

    특히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로부터 한반도에 미군 주둔계획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부터 한반도 장악이 쉽게 풀리리라 예상했지만 이승만이란 반소주의자가 큰 장애물이었는데, 그래서 미군정에 반감이 큰 김구를 동원하여 미군철수에 동조시킨 것이었다.

    성명문 2) ”내전 발생 없다

    남북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는 우리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내전이 발생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당시 공산세력을 제외한 우익진영은 거의 내전(內戰)을 염려하던 때이다소련이 사주하는 남로당의 무차별 폭력투쟁 때문이었다김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이 내전 없다는 장담은 시티코프가 특별히 김일성에게 명령한 조항이었다. ([시티코프 일기])
    미국을 안심시켜 미군철수를 촉진시키고 남한을 방심시려는 얄팍한 계산이다첩보망을 통해 미국정부의 한반도정책즉 미군철수 스케줄을 체크하며 때를 기다리는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이미 1946년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북한 무장하라“ 지시하고 측근들에게 북한의 군사력 강화를 위한 모든 원조를 지령하고 있다.

    미국철수가 곧 내전의 초대장임을 김구는 몰랐던가이승만과 너무 다르다.
    이승만은 태평양전쟁 초부터 미국정부에 일본이 패전하여 한반도에서 물러가면 소련이 내려온다금방 공산화되어 미국이 피를 흘리게 될지 모른다.“ 누누이 경고하며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했다.

    성명문 3) ”이승만 배제“ 합의

    외국군 철수후 하기(下記제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 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총선거로 민주정부 수립...“

    여기서 하기란 아래에 기록된 정당들을 말한다즉 공동성명에 서명한 정당-단체들 만으로 새로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말이다거기 서명한 남측 정당-단체들은 56북조선노동당(김일성남조선노동당(박헌영), 한국독립당(김구), 민족자주연맹(김규식), ·근로인민당북조선농민동맹 등이다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이승만(독립촉성회), 김성수(한국민주당등 우익정당을 통일정부에서 배제한 것곧 공산당과 협력세력만이 새정부를 만들겠다는 남북좌익동맹체’ 결성이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대표 시티코프가 주장하던 반탁세력을 배제한 친소정부 수립” 그 방안 복사판이다그때 배제하려던 반탁세력 김구-김규식을 포섭해 합류시킨 점이 다르다이것이 평양연석회의 포인트드디어 김구-김규식 세력과 남북한 좌익단체 연합체가 건국을 주도하게 되었다소련이 주장하던 이승만 배제를 이제 김구와 김규식이 대리인들로 앞장서서 이승만의 건국을 저지하면 되는 것이다.

    성명문 4) 남조선 선거 반대

    천만명 이상을 망라한 남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들이 남조선 선거를 반대한다...”

    ◉ 거짓말이다. 5.10총선 결과 전국 투표율은 평균 90%를 넘고 유효투표율이 무려 96.4%였다그만큼 독립건국에 목말랐던 총선거미국무장관 마셜도 성명을 발표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선거 저지와 방해활동에도 90% 넘는 유권자들이 투표한 것은 그들 스스로의 정부를 구성하려는 결의 보여주는 증거이다.” 스탈린과 김구의 단선반대는 완패다.

  • ▲ 김구와 김규식. 대한민국 건구후 유엔의 국가승인을 막고자 '반대 사절단'을 만들어 김규식을 단장으로 정했다. 그러나 김규식이 변심하여 좌절된다.
    ▲ 김구와 김규식. 대한민국 건구후 유엔의 국가승인을 막고자 '반대 사절단'을 만들어 김규식을 단장으로 정했다. 그러나 김규식이 변심하여 좌절된다.

    두 김씨 귀환 회견 동족상잔 없다“ 장담 

    55일 저녁 서울에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이 이튿날 공동명의로 남북회담 결과를 발표하는 성명을 내놓았다이 성명서 역시 평양에서 미리 작성하여 북측의 검토을 거친 것이었다. 다음은 발표내용 요지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단독정부)은 절대 수립하지 않는다고 확언하였다.
    공동성명서는 외국간섭만 없으면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어떤 정세하에서도 동족상잔은 아니할 것을 확인하였다.
    우리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조할수 있음을 체험으로 증명하였다.
    북조선 당국자는 송전(送電)을 재개하고 송수(送水)도 개방키로 다짐하였다.
    조만식 선생의 석방과 남쪽 송환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조선일보] 194857일자)

    이 성명서의 문제점을 간단히 짚어보자. 북조선당국자‘란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정권을 지칭한 것이다.

    김일성이 단정수립을 않겠다고 확인이미 2년전 북한단독정권은 출범했다.
    남북공동성명서는 시티코프가 스탈린의 결재를 받아 미리 작성해놓은 것이다.
    동독상잔 않겠다는 보장은 시티코프가 특히 강조한 것으로서이는 무력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스탈린의 특별지시였다.
    우리민족끼리는 민족통일전선의 전술용어협조가 확인된 것은 단독정부반대” 한가지 뿐,나머지는 두 김씨의 희망사항들이다.
    송전-송수 약속은 두 김씨가 장담한지 열흘 만에 물거품이 되었다. 5.10선거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북한이 전기도 끊고 연백저수지 수문도 닫아 버렸던 것이다.
    조만식 선생은 벌써 용도폐기‘ 처분되어 감옥에 버려져 있었다. 

    특기할 점은 어디에도 두김씨가 그동안 감상적인 미사려구(美辭麗句)로 주장하던 민족통일‘ 논의를 했다거나 그 결과가 무엇이라는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는 사실이다스탈린이 미리 결재한 남북공동성명서에 두 김씨의 발언을 추가할 틈은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스탈린의 한반도공산화정책에 서명하고 박수를 쳐주고 왔다고 자백한 셈이었다.

    이처럼 평양연석회의가 완전 실패하였음에도 두 김씨는 실패한 줄 몰랐다.
    특히 김구는 평양으로 떠나기 전 유엔위원단 의장 메논과 수석대표 리우위완(劉馭萬)의 우려에 대하여 남북협상이 실패한다면 5.10총선에 반대않겠다고 약속했었다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계속 총선을 반대하였고 건국 직후엔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도 막기위해 사절단까지 보내려 했다.

  • ▲ 한복입은 김구와 군복 입은 스탈린.
    ▲ 한복입은 김구와 군복 입은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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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이 김구를 이용하는 결정적 장면

    스탈린이 진작부터 김구를 이용해온 결정적 증거를 보여주는 명장면이 있다.

    작년말 스탈린은 김구가 평양회의에 참가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그 김구를 시티코프등 하수인들이 평양에서 잘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코치감독하는 스탈린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이제 남은 것은 김일성 꼭두각시 위성국을 공식독립시키는 작업을 정리하는 일이다.
    그것은 남한이 5.10선거로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후에 북한단독정부를 공식화하는 스케줄이다미리 공개하면 분단책임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평양에 통일극‘ 벌여놓고 분단의 쇠말뚝‘ 박다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달려가 모란봉 극장에서 소련의 장단에 맞춰 슬픈 춤사위”(김규식의 표현)을 연기하고 있을 때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선 스탈린이 또 하나의 중대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그 작품은 북한정권의 신장개업을 위한 북한 헌법의 제정이다.
    북한헌법의 제정 과정도 김일성의 김구 포섭과정과 때와 궤를 같이한다. 

    북한 인민회의는 1947년 11월 북한헌법 제정 작업을 정식 개시한다그때 김일성은 자신이 남파한 성시백에게 김구 포섭을 암호방송으로 지령하던 무렵이다.
    1948년 2월 초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규정한 1936년판 소련 헌법을 모델로 임시헌법’ 초안을 경정스탈린의 승인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청지국으로 보낸다.
    그 2월 초는 서울의 유엔위원단이 남한단독선거안을 유엔소총회에 보내자남로당을 중심으로 남한정역에서 대규모 폭동 ‘2.7구국투쟁을 벌인 날이다이것도 시티코프가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 거액을 지원한 투쟁임은 물론이다이 투쟁에 관계없이 유엔소총회가 남한단선을 결의하자 ‘3.1투쟁을 벌였고그 투쟁이 곧 제주4.3투쟁으로 이어진 폭동이다.
    422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북한헌법 초안의 전면 재검토를 끝낸다달라진 것은 주권을 규정한 제2조와 신앙의 자유를 규정한 제14조를 수정 정리한 뒤당중앙 스탈린에게 올렸다.
    4월 24일 스탈린은 주권조항을 직접 손질하면서 임시헌법의 임시란 말을 삭제하였다. ([시티코프 일기]

    이 무렵 평양에선 김구가 우리는 단결하자는 5분짜리 축사를 하였고(22), 
    23일엔 김원봉의 사회로 남조선 단독선거를 파탄내자는 결정서를 만장일치로 채캑한다.
    24
    일은 토요일엔 회의진행결과에 만족한 시티코프가 회의를 중단하고 보고싶은 것을 보여주라군대도 보여주라며 남측대표단에 선심을 썼다. 

    야행성 스탈린철야회의서 북한정권 공식데뷔 준비완료

    424일은 북한정권에게 기념할 만한 날이다스탈린이 그날 밤 직접 주재한 회의에서 북한정권의 세계무대 공식데뷔 채비를 갖춰준 날이기 때문이다헌법에서 국명국기수도 평양 등이 확정된다.
    2
    년전 1946년 2월 8일 출범했던 임시인민위원회에서 임시란 가면을 떼어버리고 당당히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으로서즉 소련 위성국으로 출발하는 소비에트 체제를 완비하였던 것이다. 일찌기 남로당 박헌영이 갈망했던 일이다.
    이것이 사실상 분단의 쇠말뚝을 박은 결정적 행위였다
    이제 남한의 단독정권 출범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분단책임을 미국와 이승만에게 돌리기 위해서다

    유명한 야행성 습관대로 스탈린은 그날 밤 자정부터 위성국 북조선체제를 전면 검토최종 승안을 마친 시각은 아침 8시였다.
    나치 독재자 히틀러와 똑 닮은 스탈린의 밤샘회의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체제유지을 위한 공포정치수단이다실제로 1930년대 대숙청기간 밤중에 사라진 심복들이 수두룩하다.

    남북한 동시총선거 지령=그날 밤 스탈린은 수도를 평양으로 하되한반도전체의 정통성을 갖추기 위해 남북한 동시선거를 해야한다고 지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생긴 해프닝이 바로 도토리 도장소동이다
    예컨대 제주4.3사건의 주모자 김달삼이 유령유권자들을 만들기 위해 온갖 가짜도장을 조작하여 숫자를 꿰맞춘 사건이다.

    김일성은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10일 후 1948년 8월 25일 흑백투표’ 선거를 실시북한측 대의원(국회의원) 212명을 선출하면서 남한측 대의원 360명이 8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황해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선출되었다고 발표했다이 해주에 모인 남측대표자들 1,080명이 가짜 지하선거로 동원된 거수기들이었다.

  • ▲ 김구의 옛 약혼녀 안시호(왼쪽), 오른쪽은 김구가 청년시절 중노릇하던 영천암을 찾아간 모습(오른쪽). 이 암자는 치하포에서 살인강도후 감옥살이중 탈옥한  김구가 잠시 은신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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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의 옛 약혼녀 안시호(왼쪽), 오른쪽은 김구가 청년시절 중노릇하던 영천암을 찾아간 모습(오른쪽). 이 암자는 치하포에서 살인강도후 감옥살이중 탈옥한 김구가 잠시 은신하던 곳이다. '

     김구, ‘북한헌법제정’ 견학 기피?

     하늘 아래 비밀은 없다러시아가 공개한 소련극비문서들이 증언한다.
    북한측은 428일 평양연석회의에 참가한 남한측 대표단에게 견학을 안내하였다장소는 북한인민회의장즉 북한국회 청사에 들어가 방청하라는 것, 200명이 들어갔다.
    이 견학 역시 시티코프의 연출다름아닌 스탈린이 최종승인한 헌법을 북한이 최종채택하는 헌법제정 현장을 남측대표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행사였다.

    회의진행을 보던 남한대표단은 북한헌법 축조심의를 보자 크게 놀랐다고 한다.
    북한인민의회는 남측에 보란듯이 헌법조항을 일일이 축조심의하는 과정을 거쳐서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심의하되 수정해선 안되는 스탈린 헌법을 가지고 연극을 상연한 것이다. 

    김구는 그날 견학에 불참했다. “북한의 분단작업에 협조했다는 비난을 의식해 몸을 피한 것이라고 한다이것은 레베데프가 비망록에 적어놓은 말이다.
    이런 북한의 단독정권 헌법제정 현장을 직접 목도하고서도 남한 대표들은 줄지어 서서 북한측이 마련한 단정반대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서울로 귀환했다는 이야기이다.

    북한헌법 조목조목은 물론스탈린이 직접 수정했다는 인공기 도안에 이르기까지 심의와 채택이 이어질 때마다 북한의원들과 방청객들이 모두 기립하여 열광하였다. 200여명 남한대표단도 열렬히 환호와 박수를 쳤다고 한다. ”이 헌법이 통일헌법이라고 누군가 말하자 장내가 떠나갈 듯 박수가 쏟아진다. 맞다. 스탈린의 계획이 '조선통일헌법'이다. 미군이 철수하면 남북한 위성국에 적용할 헌법이니까.

    그러므로 이 헌법제정 쇼가 바로 스탈린이 꾸민 통일 쇼의 명장면이 되었다.
    마침내 430일 공동성명 발표와 함께 막을 내린 남북연석회의 나날은 크렘린궁의 북한헌법제정과 함께 스탈린이 육로 1600를 연결 동시상영한 사기 드라마로 막을 내린다.
    스탈린은 보드카의 맛이 좋아졌다. ‘우리민족끼리’ 통일극은 대성공김구 덕분이다.

  • ▲ 김일성이 대동강 쑥섬에 세운 '통일선전비, 뒷면에 김구 김규식 등 남측 대표단 요인들의 이름을 새겼다. 회의폐막후 김일성은 남북지도자회의 요인15명을 쑥섬으로 데려가 '공동성명'의 미군철수-남한선거반대 등 합의를 재확인, 축배를 들었다.
    ▲ 김일성이 대동강 쑥섬에 세운 '통일선전비, 뒷면에 김구 김규식 등 남측 대표단 요인들의 이름을 새겼다. 회의폐막후 김일성은 남북지도자회의 요인15명을 쑥섬으로 데려가 '공동성명'의 미군철수-남한선거반대 등 합의를 재확인, 축배를 들었다.

    ◆ 이승만 2의 독립전쟁‘ 출발

    이승만의 정읍선언은 결실을 맺었는가아니다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때 정읍선언에서 말했잖은가, “남한만이라도 과도정부를 세워 북한의 소련을 철퇴시키기 위해 국제공론에 호소하자. 2년간 진통 끝에 이제야 겨우 과도정부세우는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남한단독선거가 분단고착으로 되지 않을까아니다유엔 자유세계의 공론의 힘으로 소련을 추방하면 된다이승만은 이미 1933년 제네바에서 국제연맹의 공론을 일으켜 일본을 국제연맹으로부터 자진탈퇴하게 만든 경험과 자신감이 있다현재 국제정세는 그때보다 몇 배 좋아져서 승산이 눈앞에 보인다미국 트루먼 독트린을 비롯하여 자유세계가 소련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하고 뭉치며동유럽의 공산화 도미노현상이 유럽의 단결을 강화시키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후에도 이승만은 과도정부는 독립정부가 아니다남북한 통일정부래야 독립이 완성된다고 버릇처럼 말했다이제 그 통일독립을 위하여 이승만은 과도정부를 탄생시킬 5.10총선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독립전쟁에 나서는 것이었다. 

    김구가 김일성을 만난 소감

    김일성을 직접 만나 들어보니 소련의 주구(走狗:앞잡이)는 아닌 것 같다

    이것은 김구가 평양에서 김일성과 단독면담을 마친 뒤 측근들에게 토로한 소감이다.
     
    김구의 측근들을 일찌감치 동지로 만든 성시백이 김일성에게 보낸 보고서에 나오는 말이다. (박병엽앞의 책). 살인강도라도 정작 만나보면 착하기만 한 것이 인생지사 아니랴.

    스탈린과 담판해야지” 이승만의 한탄

    갈 테면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과 담판을 해야지김일성 뒤에 소련이 있는 줄 모르고...
    백번 만나봐야 무슨 소용 있다고...북한서 큰 선전꺼리나 될 것을...
    이것은 이승만이 김구의 북한행을 말리다가 안 듣자 한탄한 말이라고 한다. (경무대 비서 윤석오의 증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중앙일보사, 1977).

    답답한 이승만은 이런 담화도 발표했다.

    남북회담은 시간연장으로 공산화하자는 계획에 불과한 것은세계에서 소련정책을 아는 사람은 다 간파하고 있는데 한국지도자 중에서 홀로 이것을 모르고 요인회담을 주장한다면 대세에 몽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이것은 소련 목적을 성원하는 이외에 아무 희망도 없는 일을 가지고 국사에 방해만 되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면 우리는 낙심할 뿐이다.,.” ([동아일보] ‘남북협상은 소련목적에 추종’ 194842일자)
    대세에 몽매한 지도자’ 이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국민이 풀어야 할 급선무다. 

    그래도 남는 수수께끼: 김구의 북한군무장 목격담 

    5.10총선이 끝나고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선거를 앞둔 무렵의 일이다.
    1948년 711일 오전 11유엔한국위원단 중국대표 리우위완(劉馭萬공사가 경교장 김구를 방문한 시간 넘게 문답을 나눴다방북한 김구를 설득하여 새 독립정부에 참여시키라는 장제스의 지시를 받아 방문한 것이다장제스는 자신이 도와준 김구 임정주석이 대통령 돼야 친중정부가 되기 때문이다리우어완은 김구와의 대화내용을 영문으로 요약장제스에 보고하고 당시 한국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에게도 전했다이화장에 보존된 이 문서를 읽다 보면 다음 대목에서 놀라게 된다. 

    김구가 대화 도중에 이런 발언을 한다.

    내가 남북한지도자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소....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그 기간 남한이 어떤 노력을 다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설만한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소련은 비난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북한군)을 남진(南進)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충격적  발언이다남북공동성명을 채택한 다음날 51일은 메이데이평양역 광장에서 대규모 행사를 참관한 대표단은 상상이상의 군사페레이드를 보고 크게 놀란다시티코프가 군대를 보여주라고 지시한 이유였을 것이다김구의 목격담도 그가 얼마나 감탄했는지 말해준다.

    스탈린이 1946년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지시하였다. "북한을 무장하라" 그 무장이 2년새 모두를 놀라게 할만큼 진척되고 있는 현장을 김구의 남측대표단이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문제는북한군의 남진까지 언급한 김구가 엄청난 문제에 대하여 그후 공개적으로는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이다왜 그랬을까?

    우리 국민은 여전히 혼란스럽다온갖 고초에도 임시정부를 지켜낸 김구 주석에 대한 역사적 평가 때문이다해방후 김구의 좌회전 '실수에 눈감고 무작정 우상화해서도 안될 일이지만그의 허점만을 과장하여 독립운동 실적까지 폄하해서도 안될 것이란 주장은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세월이 흘러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김구는 북한군의 강력한 무장태세를 보고 와서 무슨 이유로 입을 다물었을까?
    정말 소련이 북한군을 남진시켜 남한에도 인민공화국을 세워 북한과 '통일'시켜줄 것으로 예상했던가
    김구 스스로 진술한 그 구절의 구체성에 의문이 짙어진다
    자신의 표현인가혹시 평양에서 들은 말은 아닐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