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히지 않은 옥상, 막히지 않은 해시태그"그 건물 올라가기 쉬움", "○○역 19층" SNS 확산"진짜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외로움의 표현일지도"건축법상 2021년 이전 건물, 옥상 차단 의무 미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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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빌딩에서 투신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과 소방 당국에 구조에 나섰다. ⓒ뉴시스
[편집자주] 5월의 강남. 세 번째 구조 요청이 옥상에서 울렸다. 청소년은 고층 건물로 올라가고 그 장면은 해시태그로 공유된다. <해시태그된 죽음, 방치된 도시>는 이 비극을 구조의 문제로 본다. SNS를 통한 모방 심리는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도시가 방치한 위험의 또 다른 얼굴이다. 태그로 소비되는 투신 시도는 심리적 연쇄를 낳고, 청소년은 그 속에서 서로의 고통을 재현한다. 물리적 환경, 제도의 공백 그리고 '디지털 전염'을 함께 추적한다.최근 강남 한복판의 고층건물 옥상에서 10대 청소년의 투신 시도가 세 차례 연이어 발생했다. 모두 극적인 구조로 이어졌지만 해당 건물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이미 '성지'로 회자되고 있었다. "그 건물 올라가기 쉬워요" 이 문장은 온라인상에서 공유되며 위험을 키우고 있었다.해당 건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서울 강남경찰서가 파악한 '투신 고위험 건물'은 총 19곳. 그중 일부는 옥상 출입문이 여전히 잠기지 않고 있었다. 취재진이 직접 확인한 결과 이들 건물 중 다수는 경비 시스템이 미비하거나 출입 통제가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였다. 옥상 접근도 물리적으로 제한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다.◆ "여긴 올라가기 쉬워요" 한 달 새 세 차례, 반복된 신고와 구조27일 경찰과 소방 당국에 따르면 이달 들어서만 강남에서 청소년 투신 시도가 세 차례 있었다.지난 2일 역삼동의 19층 건물에서 10대 A양이 투신을 시도했다가 약 2시간 만에 구조됐다. 구조 당시 모습을 촬영한 영상은 SNS를 통해 퍼지며 화제가 됐다. A양의 경우 SNS를 통해 생중계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우려를 키웠다.유사한 소동은 지난 13일에도 잇따랐다. 역삼동의 15층 건물 옥상에서 10대 B군은 자신의 SNS에 우울감을 호소한 뒤 현장에서 '생중계를 하려 했지만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다'는 글을 올렸다. 경찰과 소방은 약 3시간의 대치 끝에 B군을 무사히 구조했다. 같은 날 청담동 고층건물에서도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위치는 온라인상에서 공유됐고 위기는 반복되고 있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거기 올라가기 쉬움", "○○역 근처 19층" 등의 문장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일부 게시글은 삭제됐지만 캡처 이미지와 위치 정보는 다른 이용자들에 의해 다시 퍼진다.실제로 2023년 4월 한 여중생이 SNS 생중계 중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관련 신고가 급증했다. 경찰에 따르면 사건 발생 직후 8일 간(4월 17~24일)의 자살 관련 112 신고 건수는 직전 8일보다 30.1% 증가했다. 며칠 뒤 한 온라인 커뮤니티 '우울증갤러리'에서 만난 10대 2명이 이를 모방하려다 구조되는 일도 있었다. -
- ▲ 13일 오후 3시께 서울 강남역 인근 15층 빌딩 옥상서 투신 소동을 벌인 10대 남성이 사건 발생 직전 본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투신 시도를 암시하는 게시물을 올렸다. ⓒ인스타그램 갈무리
◆ "알아달라는 마음" 그들은 거기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한 청소년 심리 상담사는 익명으로 전한 내담자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C군(17)은 지난해 가을 서울 시내 한 고층건물 옥상에 올랐다. 그는 스스로를 '불안한 상태였지만 진짜 죽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고 한다. 옥상 문이 쉽게 열려서, 그냥 아무도 없는 데까지 올라가 보고 싶어서 올라갔지만 '거기서 누가 한 명이라도 지금 어디냐고 물었으면 그냥 내려왔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고층건물 옥상은 물리적 공간이지만 심리적 공간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고립되고 외면당한 청소년들이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 전문가들은 청소년의 투신 시도를 단순한 충동이 아닌 도움 요청의 표현으로 바라본다.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고층에서의 시도는 의외로 '극단적 선택' 의도보다는 '호소'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며 "청소년은 힘든 상황에 처할 경우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일종의 '알아달라'는 식으로 이같은 행동을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그러면서 "자아가 형성 중인 청소년은 충동적인 행위를 많이 하는 연령대고 또래에 대해 예민한 시기라 동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강조했다. -
- ▲ 고층빌딩 자살예방 현장점검 모습 ⓒ강남구 제공
◆ "구조는 됐지만, 그 전에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게 문제"그러나 이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데에는 법적 공백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건축법상 2021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은 옥상 출입 차단 장치를 의무적으로 설치할 필요가 없다. 강남 지역 고층건물 중 상당수가 이 기준에 해당한다.그 결과 서울 중심의 고층건물 상당수는 청소년이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위험 지점이 되고 있다. 건물은 높지만 옥상 문은 열려 있고 그 위로 올라가는 사람을 막는 장치는 없다. 구조 경험이 있는 한 소방 관계자는 "대부분 말 없이 서 있었다"며 "구조에는 성공했지만 그 전에 그곳까지 갈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서울시나 강남구 등 지방자치단체는 고위험 건물에 대한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옥상 출입통제 장비를 설치하거나 일정 층수 이상 건물에 비상 알람·감지 센서·CCTV를 의무화하는 조례 제정을 검토할 수 있다.구조 이후 심리 응급 개입을 공공의료 체계와 연계하는 방안도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학교, 커뮤니티, 온라인 공간을 아우르는 사전 감정 지원망을 확대하고 AI 기반 위험 감지 시스템을 활용해 조기 개입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물리적 위험은 디지털 공간에서 더 빠르게 확산된다. SNS에서는 투신 위치 정보와 방법이 해시태그로 공유되고 삭제된 글도 캡처돼 재유포된다. 투신 관련 키워드를 검색하면 알고리즘이 유사 콘텐츠를 반복 추천해 모방 심리를 심화시킨다. 전문가들은 이를 '정서적 감염'이라 부르며 온라인 감정 확산이 현실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