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임정, 출범부터 좌우합작...총리에 공산주의자 이동휘레닌, 공작금 200만 루불 지급...이동휘, 고려공산당을 조직이승만 대통령을 일방적 '추방' 결의...김구, 주석에 취임공산체제로 개헌...3.1독립선언서 전문 삭제, 임정 법통 끊겨
  • ★3월1일 서울, 3월2일 모스크바★ 

    파고다 공원 독립만세 운동 다음날, 레닌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창설대회를 연다. 
    지금까지 싸우는 대한민국과 공산당의 숙명적 악연의 탄생!
    볼세비키 공산쿠데타(1917.10)에 성공한 레닌은 세계1차대전으로 붕괴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대신, 소련공산당이 지휘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로 세계 공산화 조직 ‘국제공산당’을 1919년 3월 발족 시켰다. 국가별 기구를 설치하여 각국 공산당은 레닌의 지시를 받는 지역당이 되었다. 극동지역엔 중국부, 일본부, 고려부를 두어 공산화 공작을 본격화한다.

  • ▲ 1920년 중국인으로 변장, 상하이 임정으로 밀항한 이승만 임정대통령.
    ▲ 1920년 중국인으로 변장, 상하이 임정으로 밀항한 이승만 임정대통령.
    ◆레닌, 200만 루불 제공...이동휘, 고려공산당 조직

    이미 1918년 이동휘는 연해주에서 레닌 혁명에 따르는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는데, 1919년 9월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출범할때 총리로 참여한다. 
    그러니까 임정은 첫 발부터 좌우합작 형태였던 셈이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 2인자 총리는 공산주의자, 
    따라서 임정은 좌우투쟁이 불가피하였고 갈수록 이승만 규탄이 거세게 일어난다. 이승만은 임정의 외교부격인 구미위원부를 설치, 독립운동 홍보에 주력하고 있을 때다.
    “대통령이 멀리서 저 혼자만 호의호식 하며 임정을 무시하고 있다”는 둥, 파벌들이 가세한 공세가 심해지자 이승만은 다음해 상하이로 향한다. 
    일본이 30만달러 현상금을 걸어놓은 몸이라 중국인으로 위장, 은밀히 소개받은 화물선에 숨었는데 시체 창고였다. 중국인 시체들과 태평양을 건넌 이승만은 12월 상하이에 도착한다. 
    “임정 체제를 소비에트 체제로 바꿔야 한다” 
    이동휘는 초장부터 이승만을 몰아세웠다.
    그때 소련 레닌은 이동휘에게 200만 루불을 직접 전달, 공산당 조직을 지령한다. 코민테른 고려부가 지도하는 고려공산당이 1921년 5월 결성되고,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주요인물은 이동휘, 김립, 박진순, 이한영 등이었다.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 부분 생략).
    이동휘는 김구에게도 입당을 권했지만 백범이 거절하였다고 한다(백범일지). 김구는 레닌의 공작금을 이동휘가 독식함에 따라 자금책 김립을 살해한다.
    소비에트 공산체제를 완강히 거부하는 이승만을 향하여 이동휘는 면전에서 욕설에 가까운 막말을 퍼붓는다. 국무회의가 열렸다하면 좌우대결 공방으로 날이 샌다. 
    열세에 몰린 이동휘는 “이런 친미 매국노와는 함께 일을 못하겠다”며 연해주로 가버린다. 
    베이징의 무장 투쟁파는 외교 독립론을 주창하는 이승만을 몇 차례 암살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넌더리가 난 이승만은 "나는 외교가 급하다"며 6개월만에 상하이를 떠나 하와이로 돌아갔다.

  • ▲ 1920년 중국인으로 변장, 상하이 임정으로 밀항한 이승만 임정대통령.
    ◆이승만 추방 결의...소비에트체제로 개헌...3.1정신 임정법통 끓어지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등장하였다. 
    그전해 이승만은 당시 세계최초의 반공논문 <공산당의 당부당>을 자신의 [태평양 잡지]에 발표, 공산주의 비판 글을 8회 연재한다.
    스탈린의 코민테른 고려부는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복시킨다. 임정 의회를 장악한 급진파를 앞세워 1925년 일방적으로 ‘이승만 대통령 추방’을 결의한 것이다. 조선과 미국에선 '반란'이라며 난리가 났다. 
    이승만은 "아이들 장난 같아서..." 껄껄 웃으며 단합을 강조하는 대국민성명을 발표한다.

    상하이 정치판에선 “안창호가 미국서 쿠데타를 지휘했다”며 분열되었고 의회는 좌파 독무대로 변하여 마침내 2년뒤 헌법을 소비에트체제로 바꾼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이때 대통령 없는 국무령 김구는 개헌안을 승인하고 이어서 소비에트체제의 ‘주석’ 자리에 취임하였다 (1927). 

    지금 임정의 3.1정신 운운하는 임정법통은 이렇게 8년만에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뒤집어진 임정의 헌법에는 임정 탄생의 ‘국가영혼’ 인 역사적 헌법 전문까지 삭제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전문(前文)은 다름 아닌 ‘3.1독립선언서’였다. 
    그 3.1운동 전문은 해방직전 1944년 5차개헌 때까지 살아나지 못했다.  주석 김구가 왜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