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을 거부하는 미국을 잡아 굴복시킨 '외교의 신'17일간 세계는 서울 경무대 이승만의 입만 쳐다보다"미국의 '자동개입' 없는 조약은 휴지"...정면 대결"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끝내 목적 쟁취
  • ▲ 로버트슨 미대통령 특사와 이승만 대통령, 한미동맹 협상 시작하는 악수.
    ▲ 로버트슨 미대통령 특사와 이승만 대통령, 한미동맹 협상 시작하는 악수.
    ●이승만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합의항목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결재 문서’로 가져오라”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한미동맹을 협상하면서 미국 대통령 특사에게 조목조목 요구한 말이다.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부다페스트 각서’가 화제에 올랐다. 소련 연방 해체 때 우크라이나 지역 핵무기를 모두 소련에 반환하면 유엔이 우크라이나 안보를 지켜준다는 요지의 문서다. 이때 소련 편을 든 것이 미국과 영국이다. 강자는 강자편이다.

    “강대국은 믿어선 안된다. 미국은 한민족을 번번이 배신하였다”며 미국과 싸운 독립혁명가 이승만 대통령, 휴전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협상할 때 그 진수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미국대통령 특사 로버트슨과 1대1 협상 17일간, 한반도서 전쟁하던 세계는 손을 놓고 경무대만 바라보았다. 약소국 대통령이 글로벌 헤게모니를 한 손에 쥔 결정적 국제 리더십, 며칠전 반공포로 석방의 전술이 가져온 결과다.
  • ▲ 경복궁을 산책하면서 협상하는 이승만 대통령, 덜레스. 로버트슨.
    ▲ 경복궁을 산책하면서 협상하는 이승만 대통령, 덜레스. 로버트슨.
    ◆다윗과 골리앗의 줄다리기

    이승만은 요구한다. “휴전협정과 한미동맹은 무관하다. 미국이 내말

    안들어 전쟁났으니 한미동맹 선결이 미국 의무이다.”

    미국은 반대한다. “휴전에 동의부터 하라. 미국은 1대1 군사동맹은 맺지 않는다.”

    이승만의 협상은 협상이 아니라 대한민국 생존과 번영을 담보할 영구평화체제 구축이 목표다.

    로버트슨은 날마다 진땀을 빼야했다.

    이승만은 늘 역사강의부터 대화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아느냐. 루즈벨트 대통령은 우리민족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한반도를 일본에 내주었다. 이것이 첫째 배신이요. 38선을 그을 때도 일언반구 없이 멋대로 소련과 합의한 것이 두번째 배신이요. 이번에 우리가 결사적으로 휴전을 반대하는데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니 당신네는 세 번째 배신을 하고 있다. 기독교 국가 미국이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느냐?”

    한가지 합의에 접근하면 새로운 요구를 들이대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로버트슨은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모처럼 합의 된 항목에 대하여도 이승만은 “당신 말은 못 믿는다. 백악관 대통령의 결재를 받은 문서로 가져오라” 말하고선 훌쩍 나가버린다. 로버트슨은 갈수록 이승만을 존경하게 된다.

    협상이 막판에 이르렀을 때 이승만은 경회루 연못에 나가 낚시대를 던지고 앉았다.

    몇 시간이 지나도 꼼짝 않는 대통령을 기다리다 못해 기자들이 비서에게 묻는다.

    “잉어는 몇 마리나 잡으셨나요?”

    비서가 대답한다. “바구니가 비어 있습니다.”

    이승만은 기도하고 있다. 휴전에 동의하지 않으면 조약체결을 못한다는 미국의 협박 때문이다.

    낚시대를 드리운 지 4시간쯤 지나서야 이승만이 일어섰다.

    79세 주름진 얼굴에 두눈은 눈물로 벌개져있었다.

    2주일도 넘는 협상이 어렵사리 끝나고 공동합의문 발표 단계에 왔을 때 이승만은 한 장의 메모를 특사에게 준다. 거기엔 딱 한 줄로 이렇게 찍혀있었다.

    “대한민국은 통일 없는 휴전에 찬성할 수 없다. 다만 미국의 행동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낮에나 밤에나 걸어가면서도 기도하며 하나님께 묻고 물어 얻어낸 이승만의 결론이다.

    기막힌 협상의 묘수! 숙원의 통일기회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승만은 미국의 발목에 ‘단독북진 통일’이란 쇠사슬을 묶어두면서 휴전 반대를 용어적으로 슬며시 감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피를 토하는 ‘양보’였다.

    휴전협정에 새로운 조항이 신설되었다. 휴전후 90일 내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참전국들이 협의한다는 내용이다. 다음해 뒤늦게 소집된 소위 제네바 평화회담이 그것이다.
  • ▲ 1954년 7월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 1954년 7월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마지막 쟁점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

    7월27일 판문점서 휴전협정이 체결된 며칠후 미국무장관 덜레스가 달려왔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안을 매듭짓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이 참에 이승만의 ‘단독북진 통일’ 열망을 반드시 꺾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NATO처럼 공산군 재침시 미군의 ‘자동개입’을 요구하였고 덜레스는 반대하였다. 90일내 평화회담을 열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뤄낼 자신이 있다며 이승만을 설득하려 애쓴다.

    “전쟁해서도 이루지 못한 통일을 테이블에서 얻겠다고? 하하”

    이승만은 웃었다.

    하지만 조약문 협상 책임자가 문안을 가져왔을 때 ‘자동개입’은 없었다. 이승만은 격노한다.

    “이것은 알맹이 없는 종이쪼가리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 휴전협정도 허사야, 허사…모든 게 원점이야.”

    그러나 어쩔 것인가.

    결국 자동개입 대신 ‘한국 영토내 미군 주둔”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제네바 회담 파탄…대미투쟁 제2라운드

    휴전후 90일이 다 되도록 평화회담은 감감소식이다.

    이승만은 펄펄 뛴다.

    “휴전협정은 무효다. 미국이 국제법을 위반했다. 국군은 단독 북진 통일하겠다.”

    당황한 미국이 서둘러 이듬해 1954년 6월에야 제네바 화담이 열렸지만 예상대로 공산권 선전장으로 변했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대표단 철수, 미국도 이승만에게 약속한대로 철수해야 했다.

    이승만은 또 직격탄을 날린다. 육해공군 전투 비상령을 발표하고 미국 체재 장교들에게 즉시 귀국명령을 내린다. 국회에서 비준한 한미방위조약의 비준서 교환도 무기연기다.

    “이승만은 미쳤다. 단독북진이라니 국가자살 하려느냐? 한미동맹 철회 해도 좋으냐?” 아이젠하워는 뿔이 났다.

    이승만도 한치의 후퇴 없이 정면 대결한다.

    “자살도 우리 주권이다. 휴지조각 조약은 깰 테면 깨라.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어쩔 수 없이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달래려 공식방미 초청한다.

    33년간 독립운동한 제2의 고향 미국을 대통령이 되어 찾은 이승만의 방미기록들은 국회 양원합동회의 연설을 비롯, 수많은 단체와 각지역 순방 연설문만 해도 두꺼운 책이다.

    아이젠하워와 두 차례 정상회담은 이승만이 ‘고얀 사람” 소리칠 정도의 정치투쟁이었다. 미국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영웅 퍼레이드'를 베풀어 이승만을 '자유세계의 리더"로 대접하였다.
  • ▲ 미국회 양원합동회의서 언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기립박수를 33번이나 받았다.
    ▲ 미국회 양원합동회의서 언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기립박수를 33번이나 받았다.
    ★마침내 한미합의각서가 발표되었다.

    이승만이 요구한 경제군사원조 10억달러 제공, 경제 재건자금과 자주국방에 필요한 군사력 증강 및 무기 현대화를 확보한 것이다. 미국의 원조는 해마다 계속되어 박정희 집권 때까지 총액이 약 30억 달러.

    이때 방미협상에서 끝내 관철한 가장 중요한 전리품은 주한미군의 최전방 주둔이다. 조약문에 ‘자동개입’이 빠진 대신 미군 2개사단의 휴전선 침략루트 배치, 즉 ‘인계철선’을 얻어낸 이승만의 집념을 어느 누가 흉내 낼 수나 있겠으랴.
    이승만은 북한남침을 막으려고 미군을 휴전선에 배치하라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승만의 '단독 북진'을 막으려고 응했던 것, 다시 말하면 "전쟁하겠다" 우겨대서 '평화의 방패'를 얻어낸 '이승만 병법'이다.
    이래서 이승만은 '외교의 신'이다. 어디 외교뿐인가.

    합의각서 교환과 동시에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도 그제야 수교하였다. 그 순간 한미동맹 발효! 서울 조인 15개월이 지난 1954년 11월 18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