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안보를 미국에 너무 의존한 게 잘못이었다”
  •  켄 번스(Ken Burns)와 린 노빅(Lynn Novick) 두 사람이 감독한 다큐멘터리 ‘베트남 전쟁‘ 10부작을 넷플릭스(Netflix)에서 시청했다. 박진감, 사실(寫實)성, 짜릿한 감상(感傷)까지 고루 갖춘 수작(秀作)이었다. 꼬박 이틀에 걸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봤다.

     베트남 전쟁에 관해선 30대 신문사 외신부 기자로서 워낙 시시콜콜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영상물에 나오는 장면들은 필자에겐 거의 다 ‘데자뷔’였다. 그러나 당시 느꼈던 처절함과 치열함과 비극성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마치 20세기의 ‘논픽션 레미제라블’을 되짚어보는 기분이었다. 그 어떤 픽션인들, 논픽션 베트남 전쟁보다 더 비장할 수 있었을까?

     우선 그 기간부터가 유장(悠長)하다. 프랑스 식민통치로부터 친다면 근 100년에 가끼운 전쟁이었다. 그러나 시간적 요소보다 더 뜨거운 것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격한 정서가 그 긴 역사 서사시(敍事詩)에 하나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는 무서움이다.

     전쟁의 육체적-정신적 고통, 준비 안 된 처참한 죽음, 그런 죽음을 바라보는 주변 목격자들의 공포, 사랑하는 대상을 여의는 아픔, 이데올로기, 민족주의와 세계체계의 충돌, 민족주의 정서와 볼셰비키 전략전술, 혁명과 반혁명의 잔인함, 강대국의 위선과 이기주의, 이에 배신당하는 약소국의 운명, 그 모든 종류의 권력에 동원당하고 사용당하는 민초(民草)들, 그 민초들의 때때로의 반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이공 최후의 날’에 미국 대사관 옥상으로 날라 앉아 베트남 민간안들은 따돌린 채 마집막 남아있던 미군장병만 몰래 빼내서 떠나는 '막장 헬리콥터'의 모습에서 역시 사람은 갑으로 태어나야지 을로 태어나선 안 되겠다는 절박한 절박감에 부딫힌다. 그러나 내 맏음대로 갑으로 태어나는 것도 아나잖은가?

     세상은 그래서 조금 더 있다가 죽을 자들과 이미 죽은 자들이 함께 얽혀 돌아가는 ‘상처 주고 상처 받기’의 카르마(karma)의 구현 장(場)이란 이야기일 게다. 이 쯤 해선 종교인들이 발하는 “오 마이 로드(lord)”나 ‘나무 관세음보살’ 같은 읊조림만이 가장 적실(適實)한 음색(音色)일 것 같다.

     ‘파리 평화협상’은 닉슨과 키신저가 패배를 내다보고, 어떻게 우방국 남베트남을 배신하면서도 배신당하는 쪽이 배신당하는 줄도 미처 모를 정도로 얍삽하게 배신하느냐의 사기극이었다. 배신하는 쪽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너희가 자조(自助)를 하지 않는 데야 우린들 무슨 수가 있느냐?”

     그래서 1940년대에 북베트남을 택한 친언니와 작별하고 북을 탈출한 뒤 1975년 4월 30일의 사이공 함락 때 다시 남베트남도 탈출한 우파 인텔리 여성 두옹 반 마이는 뒤늦게 이렇게 탄식한다. “우리가 안보를 미국에 너무 의존한 게 잘못이었다”

     한국의 박정희 대통룡은 이 잘못을 1970년대애 이미 간파하고 목숨 건 독자 핵무장의 길로 나갔다. 그러나 기회의 여신은 고독한 선각자의 불꽃 같은 집념을 축복해 주지 않았다. 이게 '자유-민주-개인-통일-세계시장의 대(大) 한반도공화국'을 출현시킬 '마지막 '빅뱅'의 좌절이었다. ...

      두옹 반 마이 여인의 때늦은 후회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때늦은 후회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랄 뿐아다.

     류근일 / 전조선일 주필 /2018/7/23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