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주기:
우는 자들의 슬픔을 가중시키는 “함께 우는 자들”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재학중
사단법인 대한민국 건국회 청년단 회원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회원
오늘은 세월호 1주기이다.
내가 안산에서 살아서 그런지, 엄마의 제일 친한 친구가 유가족이 되어서 그런지,
또 어릴 때 함께 놀던 동생이 세월호 사망자가 되어서 그런지,
세월호는 나에게 추상적이지 않다.
나는 단원고 유가족을 옆에서 지켜보아온 사람으로서,
세월호를 '보상'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말해보고 싶다.
사회가 유가족들에게 보상하라고 요구할 때, 유가족들 모두가 보상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분들 가운데에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슬픔 가운데에서 나와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마도 국가를 대상으로 보상을 받으면 자식의 죽음이 정치적인 일이 된다는걸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가와 유가족들 간의 보상협의는 길어졌다.
그렇게 협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유가족들이
자식의 죽음을 정치적인 일로 변질시키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결국 '보상을 안받아도 좋으니 내 자식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말라.'는 의견이
유가족 사이에 지배적인 의견이 되었다.
내가 아는 유가족들은 더이상 자식을 잃은 슬픔 속에 머물길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상을 받지 않더라도 자식을 잃은 슬픔을 털어내고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그런데 사회는 유가족이 슬픔을 털어내는걸 원하지 않았다.
사회는 그들에게 계속 슬픔 가운데 빠져있으라고 말했고
우울과 절망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했다.
자신들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가 되기 위해서
유가족들에게 계속해서 울음을 요구했고 슬픔을 강요했던 자들이 있었다.
유가족들에겐 '슬픔으로부터 자유할 권리'란 없었다.
성경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했다. 이 말은 진리다.
그런데 '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했을까?
아마 우는 자들의 슬픔을 함께 덜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는 자들의 슬픔을 내가 함께 짊어져 그들이 빨리 슬픔으로부터 자유하게끔 말이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에서 이 말씀을 정반대로 적용한 자들이 있었다.
슬퍼하는 자들의 슬픔을 덜기 위함이 아닌,
그들의 슬픔을 더 가중시키려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구절을 이용하는 식이다.
자칭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이 있어 유가족이 득을 보기도 했다.
보상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과연 보상금이 유가족을 향한 제대로 된 위로였을까?
내가 옆에서 지켜본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보상금이 떨어지자 유가족들 머리엔 보상금을 노리는 머릿니들이 들끓었다.
김영오(유민아빠)와 같이 자식과 멀리있던 이혼남들이 다시 돌아왔다.
주변에 연락이 없던 친구들의 연락이 갑자기 들끓었다.
'혹시나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의도가 엿보이는 가증스런 위로였다.
들끓는 머릿니 때문에 유가족들의 머리는 성할 리가 없었다.
자식을 잃은 그들의 슬픔은 들끓는 머릿니 때문에 더욱 가중되었다.
결과적으로 보상은 유가족을 위로하기보다는 유가족을 더 슬픔에 빠지게 했다.
보상금뿐일까. 겉으로는 유가족을 위한다지만
실제적으로 유가족을 괴롭히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추모제, 세월호 인양 퍼포먼스...
우리는 진정으로 슬픔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어하는 유가족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고민해야 한다.
진정 유가족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