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사회가 껴안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 ▲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요즘 우리사회를 달구는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정부의 통진당 해산심판 청구에 대한 찬반논란이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해산찬성이 45%, 해산반대가 33%였다.
    반대의 이유는 [다양성을 위해서]라 했다.

    이런 결과는 무얼 말하는가?
    “자유민주주의는 어디까지 다양성을 껴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어디서부터는 껴안을 수 없는가?”
    쟁점화 했음을 의미한다. 

    이 쟁점은 자유주의와 다원주의의 대립을 반영한다.
    [해산찬성 45%]가 자유주의인 셈이고,
    [해산반대 33%]가 다원주의인 셈이다.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는 서로 비슷한 듯해도,
    둘 사이엔 세계적으로 첨예한 대립이 있어왔다.

    자유주의는 다양성이 보장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그리고 다양성은 [다름]에 대한 관용에 의해서만 보장된다.
    그러나 관용에는 한계가 있다.

    관용할 용의가 있는 상대만 관용하는 것이다.
    관용할 용의가 없는 상대는 관용의 공동체에 끼워줄 수 없다.
    이게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이런 국가에서
    사람들은 사적(私的) 영역에선 모두가 서로 다르게 산다.
    다르게 살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러나 공적(公的) 영역에선 모두가
    [시민]이란 직분에서 같아야 할(civic unity) 의무가 있다.
    그리고 누구나 이 의무에 충성선서(civic allegiance)를 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이런 다양성과 관용의 공동체를 운영하는 포괄적 원리다.  

    다원주의 또는 다문화주의는
    소외된 인종(집시, 유색인), 소수민족, 이슬람 이주민 등
    비주류들의 "다름을 인정하라”는 요구다.
    여기까진 자유주의와 다원주의가 엇비슷이 간다.
    자유주의도 이런 요청에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원주의가 “자유민주주의만이 포괄적 원리가 아니다.”
    “그와 반대되는(iliberal) 원리도 대등한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하면서부터,
    둘은 갈라서게 된다.

    자유주의는,
    자유에 반대되는 입장도 자유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라는
    다원주의의 요구를
    모순당착이라고 반박한다.

    예컨대 나치와 볼셰비키 같은
    반(反)자유-전체주의-획일주의-1당독재를
    어떻게 자유사회의 일원으로 포함시키려야 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설령 일시적으로 포함시킨다 해도 결국은
    내전(內戰)적 파국으로 치다를 게 뻔하다는 것이다.

    이래서 자유주의 국가들은
    다원주의의 요구를 어느 정도까지만 받아들인다.
    소외된 집단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그
    들의 시민권을 확대하라는 요구엔
    오케이(OK)다.

    그러나 자유사회를 파괴하려는 집단까지 인정해주라는 요구엔
    노(No)다.

    문화-사회-법익(法益)의 문호는 넓혀가되,
    자유사회의 안전보장만은 엄격히 지키겠다는 것이다.
    관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단호한 [선 긋기]인 셈이다.

    이런 [선 긋기]는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도 유용한 모델이 될 수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 자유주의자들은 다양성을 위해
    국가가 더 많은 [다름]을 껴안아야 한다고 외치고 싸웠다.

    그러나 오늘의 자유주의자들은 그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이번엔 [극좌 전체주의]에 맞서 싸워야 할 판이다.
    진보주의자인 심상정 정의당 대표도 “헌법 밖 진보는 안 된다”고 했을 정도니까.

    통진당이 [헌법 밖 진보]인지 아닌지에 대한
    사법부의 최종판결은 아직 나와 있지 않다.
    정부는 그래서 해산심판을 [청구] 한다고 했지,
    해산을 [집행] 한다고 하지 않았다.
    다원주의자들은
    정부가 그런 [청구]를 한 것까지 반대하지만,
    그건 정부더러 헌법이 정한 일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의 오피니언일 순 있어도,
    법치주의 차원은 아니다.

    다원주의자들은 또
    “통진당을 그냥 내버려 두어도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라고 낙관했다.

    과연 그럴까?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그들은 [정당보조금 369억+6억]을 받아갔다.
    국회엔 [혁명 교두보]라는 것도 마련했다.
    민주당과 이면합의를 해선,
    지자체 노른자위들도 훑어갔다.

    이렇게 그냥 내버두는 상태를
    그들 RO는 [합법토대 구축]이라고 자부한다.
    그들은 그 합법토대를 자양분 삼아
    신나게 [생육하고 번식] 할 뿐,
    결코 저절로 소멸하지 않는다.

    다원주의자들은 “선거로 심판할 일에 왜 정부가 나서느냐?”고도 했다.
    그러나 투표는 내막을 다 알고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북의 대남공작부서는 왕재산 간첩단에 이렇게 지령했다. 


    “진보적 민주주의-반전평화-민주변혁을 앞세워라.”


    이러면 적잖은 유권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말들이 뭐가 나쁘냐?“


    이래서 RO가 침식한 외곽 정치단체를
    [정치의 자유시장]에 방치할 수만은 없는 게
    자유민주 국가의 법치주의다.

    문제는 북한-민혁당-왕재산 같은 흐름이
    통진당에도 와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그러나 이건 사법부의 몫이다.

    법정 밖 자유주의자들로서는 다만
    자유민주 국가의 대원칙만 재천명하면 될 것이다.
    다양성은
    네오 나치-바더 마인호프 극좌 테러집단, 그리고 독일공산당까지
    포함할 수는 없다고 한
    왕년의 서독의 원칙 같은 것 말이다.


     *** 위 칼럼은 <조선일보>에 기고하기 위해 작성했던 것이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건(件)이 돌출하는 바람에
    그에 관해 쓰기 위해 유보했던 것임.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