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2 월,화드라마(밤10시) <굿닥터> (연출 기민수 김진우, 극본 박재범) 9일 방송에서 시온이는 자주 꿈울 꾼다. 형을 잃은 폐갱도 꿈을 꾸면서 차츰 기억이 나고 자기대신 형이 죽었다고 자책하며 몹시 고통스러워한다. 



    시온은 폐갱도에 들어 와 자신을 살렸던 최원장을 찾아 가 형 대신 왜 자신을 살렸느냐고 묻는다.

    "하나씩 기억나다 이제 전부 기억났습니다. 왜 저를 살리셨습니까?
    형아를 살리지않고 왜 저를 살리셨습니까? 형아는 저보다 튼튼하고 똑똑했습니다.
    형아가 살았으면 사람들이 더 좋아할 것입니다. 엄마 아빠도 좋아했을 것입니다.
    형아가 살아야했습니다!"

    원장은 갑작스런 시온의 말에 몹시 곤혹스러워하고 형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괴로워한다.

    "네가 살 확률이 더 높았다. 시덕이가 더 살 확률이 높았으면 시덕이를 살렸을거다.
    난 의사니까!"


    원장님이 옳은 선택을 한 것을 한 것을 알고 나니 형이 더 불쌍하여 견딜 수 없다.

    "나 때문에 갱도에 들어갔습니다. 나 때문에 호흡기도 못 달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길가에 주저 앉아있는 시온이를 보고 옆에 앉은 윤서한테 눈물로 아프게 말한다.

    "어렵게 살아 난 만큼 세상에 보답하면 돼! 아이 잘 치료해 주고 잘 해 주면.."
     "그래도 우리 형아가 불쌍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제가 세상에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원장님도 고생 안하시고 형아도 하늘나라에 안 갔을거고 다 저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나쁩니다!"

    이제 사람들속으로 조금씩 들어 가면서 시온이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고 굳어 있던 마음의 감각도 조금씩 생긴다. 뛰어 난 암기력만 가지고 있을 때는 몸도 영혼도 없는 허공에 떠 있는 보이지 않은 공기 같더니 이제서 땅을 딛고 사는 사람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사람모양을 갖추니 가슴 찢어지는 자책부터 찾아온다. 시온이가 하는 자책은 더 가슴아프다. 



    '난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도대체 나는 왜 태어났는 지 몰라?'

    살면서 이런 말 한 번 쯤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엄청난 실패 앞에서, 어마어마한 실수 앞에서, 아무리 해도 일이 전혀 안 풀릴 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칠 때 ,아니 평생 성공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성공은 커녕 평생 사람답게 살지 못한 사람들... 무엇보다 자신을 찌질이라고 생각하며 인생속으로 적극적으로 뛰어 들지 못하는 사람들...
    어쩌다 가끔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평생 읅조리며 사는 사람도 있다.

    옛날에 신도 인정하고 자랑한 최고의 부자면서 흠이 없는 의로운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순간에 모든 재산과 열 명의 자식을 잃고 자신은 밤새 잠도 잘 수 없는 고통스런 병에 걸려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내가 태어났던 그 날이 없었더라면,나를 낳던 어머니의 자궁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내 눈이 슬픔을 보지 않았을 것을. 내가 어머니의 배에서 죽어 나왔더라면,나오자마자 죽었더라면. 아무 미래가 없이 비탄에 빠져 일생을 살아 갈 자에게 왜 생명을 주셨는가?'
    라고 그 의인은 한탄을 한다.

    인본적인 사고는 철저히 능력과 소용가치로 사람값을 매긴다. 신적인 가치로 보는 시각은 사람 그 자체가 어떤 것과도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자체다. 천하와도,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 그 자체가 가치이다.
     
    북한사람들이 수령을 신처럼 여기도록 골수까지 세뇌교육시킨 것처럼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철저히 능력위주의 가치를 일상생활에서 세례받고 살았으니 쉽지 않은 생각의 전환이다.

    그런 의미에서 <굿닥터>가 장애인에게 희망을 주고자 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시온이가 그런 뛰어난 능력이 없이도 드라마에서 보여 주는 일들이 가능할까하는 의문을 감출 수 없다. 오히려 더 비교하며 위화감과 절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부원장처럼 시온이의 탁월한 서번트증후군을 이용한 드라마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 드라마의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