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강행처리 몸싸움 예고, 무기력함과 좌절남은 건 골수 민주당 지지자의 ‘욕설’ 만 난무
  • “일백팔 배.” 올 겨울 들어 처음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21일. 차가운 아침 공기에 얼어있는 국회 의원회관 바닥에 하염없이 절을 하던 민주당 김성곤 의원이 죽비를 들고 옆에 선 직원의 108배를 다했다는 외침에도 일어날 줄 몰랐다.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김 의원은 직원이 건네준 물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깊은 숨을 몰아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합의 처리를 요구하며 시작한 108배가 이날로 8일째다. 체력적으로는 익숙해질 만도 할 텐데 마음이 무겁다보니 몸도 더 힘들단다.

    지난 8일간 108배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한나라당 정태근 의원에게 다가가 안부를 묻는다. 같은 의미로 단식을 시작한 정 의원도 농성 9일째다. 곡기를 끊고 핼쑥해진 얼굴의 정 의원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 ▲ 21일 한미FTA 비폭력 비준을 요구하는 민주당 김성곤 의원이 108배를 시작하고 있다. 같은 취지로 9일째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나라당 정태근 의원도 자세를 바로 잡고 명상에 잠겨 있다. ⓒ 뉴데일리
    ▲ 21일 한미FTA 비폭력 비준을 요구하는 민주당 김성곤 의원이 108배를 시작하고 있다. 같은 취지로 9일째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나라당 정태근 의원도 자세를 바로 잡고 명상에 잠겨 있다. ⓒ 뉴데일리

    “청와대에서 아직 별다른 말이 없나요?” 김 의원이 정 의원에게 물었다. 민주당이 요구한 '한-미 양국 장관급 이상의 ISD(투자자국가소송제도) 폐기·유보를 위한 재협상 서면 합의서'에 대한 진척 상황을 묻는 말이다.

    ‘혹시나?’했던 김 의원은 조용히 고개를 젓는 정 의원에게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몇 마디를 더 나누고 자리를 일어선다. 두 의원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당직자로 보이는 몇몇이 “힘내라”며 격려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두 의원의 표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전운이 감도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네…” 다가선 기자에게 툭 건네는 김 의원의 말에 ‘무기력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이날로 864번을 찬 바닥에 엎드렸다. 의회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취지로 시작한 일이다. 강행처리 D-Day로 예고된 24일 전까지 1천80배를 하는 셈이지만, 정작 변화는 없다. 전운(戰雲)은 오히려 두터워만 간다.

    김 의원의 108배와 목숨을 건 정 의원의 단식 투쟁 등 여야 온건파들의 막판 협상 시도에도 절충점 모색은 여전히 난망이다.

    한나라당은 이날 “더 이상 협상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본회의 직권상정을 통한 비준안 표결 처리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민주당은 ISD 재협상에 관한 ‘문서합의’ 없이 비준안을 강행처리하면 물리력을 동원해 결사 저지하겠다고 맞섰다.

  • ▲ 김 의원의 108배 모습. 의원실 여직원이 죽비를 치며 108배를 세고 있다. ⓒ 뉴데일리
    ▲ 김 의원의 108배 모습. 의원실 여직원이 죽비를 치며 108배를 세고 있다. ⓒ 뉴데일리

    직권상정의 ‘키’를 쥐고 있는 박 의장은 이날 출근길에 국회 본관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새로운 어떤 타협안이 있는지를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단의 시기가 왔다. 국민이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이만큼 했는데….”라며 직권상정 결단의 뜻을 내비쳤다.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김 의원에게 남은 건 골수 민주당 지지자들의 ‘협박’이다. 하루에만 전화가 수백통이 온단다. “한나라당으로 떠나라”, “낙선시켜버리겠다”는 식의 말은 점잖은 축에 속한다. 지긋한 나이를 살면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도 듣는다고 했다. 여수의 김 의원 지역 사무실에는 아예 경찰이 상주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108배 현장을 의원실 직원들이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말로만 쇼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워낙 많아 매일 찍는다고 했다.

    그래도 김 의원을 비롯한 여야 협상파 의원 ‘6인 협의체’는 이날 국회에서 머리를 맞대기로 했다. 하지만 ‘호소’ 외에는 마뜩한 대안이 없다. 김 의원은 “고생하는 정 의원에게도 괜히 미안하다”고 했다. “아무쪼록 (여·야 협상이)잘 처리되어 국회가 바로 세워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