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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함께 만주 왕청현에 설립한 사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북로군정서 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고려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무장활동을 전개한 김규식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1882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김규식 선생은 대한제국의 장교로서 부위(오늘날 중위)로 근무하다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자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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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만주로 망명한 김규식 선생은 왕청현 십리평에 건립된 군사간부양성학교 인사관 연성소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곳 졸업생 대부분이 나중에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1920년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다. 선생 또한 북로군정서 대대장으로 참전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에 크게 패한 일본은 한국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3월 대부분의 독립군이 러시아 자유시(알렉쎄호스크)로 이동, 러시아령의 조선인 빨치산 부대와 통합해 대한의용군(사할린의용군)을 조직했다.
당시 김규식 선생도 홍범도 장군, 지청천 장군 등과 함께 대한의용군 참모부원으로 선발돼 그 기량을 발휘했다. 그러나 당시 공산주의자들끼리의 주도권 다툼으로 일어난 ‘자유시 참변’ 때문에 대한의용군 활동은 시작도 채 하지 못하고 물거품이 돼버렸다.
김규식 선생은 이후 ‘반공’이란 태도를 견지한다. 선생은 1922년 목릉현에서 김좌진, 이범석 등과 함께 재기를 모색하였고 이후 동만주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 고려혁명군 총사령, 대한군정서 총사령으로 선출되어 독립군의 지휘 책임을 맡았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북만지역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들은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이때 선생은 연수현 태평촌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신민부 민정파의 정당조직인 고려국민당의 군사부 위원이 되어 한인의 자치를 통해 독립운동 역량을 확보해 나갔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위원회가 북만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을 끌어 모을 때는 부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규식 선생의 독립투쟁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31년 3월경 한족자치연합회의 본부가 있던 상지시 하동농장에서 지청천, 신숙 등과 만나 장래운동을 협의하던 중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백운봉, 최호 등의 습격으로 살해된 것이다. 결국 선생은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