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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익공유제에 대한 논란에서 보듯이 현재 한국 사회의 화두는 단연 ‘상생’, ‘공정’, ‘정의’라는 단어들이다. 얼마 전에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이 수십 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를 촉발시킨 원인 중에는 공직자 자녀의 특채라는 해프닝과 함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오랜 불공정 거래의 문제가 있었다.
특히 지난 해 9월경 대통령이 공정거래의 문제에 관해, “대기업 때문에 중소기업이 안 되는 건 사실이며, 사회의 격차가 벌어지면 사회 갈등이 심해지고 기업 환경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공정과 정의의 문제가 이슈가 되었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반응으로서 당시 모 그룹 회장은 “(상생협력은) 과거 30년간 쭉 해왔기에 사장단도 잘 알고 있다. 다만 부장·과장·대리급에서 몸으로 피부로 못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상의 대화가 오늘날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공정과 정의 사회의 문제를 단적으로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대기업-중소기업 거래에서 상생협력은 협력회사에 대한 품질 지도와 교육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상생협력이 결정적으로 안 된다고 느끼는 부분은 바로 납품 단가의 책정 부분인데, 이 국면에서 대기업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납품 단가를 후려치는 일이 주기적으로 관행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따라서 위 그룹 총수의 발언처럼 오래 전부터 상생협력을 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으로 ‘이익을 내는 일’에서 대기업은 벌고, 중소기업은 겨우 연명하거나 도태되는 상황이 만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지속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 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산업화가 처음 시작될 당시의 자본주의는 ‘경제인(economic man)의 원리’에 의해 그 토대가 세워졌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만인에게 유리한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이 사조는 그 뿌리가 워낙 깊어서 여기에 대해 약간의 반론을 가하려 해도 즉각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지고 반격이 가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가 성립하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이 점을 피터 드러커는 일찍이 자신의 책 ‘기업의 개념(1946)’에서 지적했는데, 근대 산업 자본주의의 성립을 보장하는 전제 조건으로서 그는 산업 시스템이 실질적인 완전 고용을 보장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들었다.
왜냐 하면 구조적인 실업에 직면한 구성원이 많은 사회에서 그 당사자는 사회를 도저히 공정한 사회로 바라볼 수 없게 되며,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사람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평등을 보장하겠다는 정치 선동가에게 몰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제는 과거 200년 전의 중상주의 전통에 뿌리를 둔 자본주의만으로는 사회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반드시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윤리적 가치가 가미된 자본주의가 되어야 한다.
기업도 경쟁력이 없으면 당연히 도태되어야 건강한 경제를 이룰 수 있는 것이고, 또한 현재 전체적인 경제성장도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코너에 몰린 중소기업의 문제가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용이라는 사회 문제와 연관해서 보면 오늘날의 대기업-중소기업의 상생 문제가 사회 정의라는 큰 주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오늘날 대기업 위주의 성장만으로는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지식경제의 속성 상 산업 사회의 건전성을 보장하는 완전고용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 예컨대 청년실업 문제를 들면, 일부 상위 그룹이 대기업에 취업을 하고 나면 여기서 실패한 사람들은 중소 기업이라도 취업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대기업과 비교하여 그 보상이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 큰 보상의 차이로 자존심을 상하느니 차라리 취업을 포기하고 고시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려면 중소기업도 지금보다는 더 많은 이익을 확보하도록 함으로써 대기업과의 보상의 차이가 좀 더 줄어들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비록 국가 경제의 성장이 다소 늦어지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중소기업에게 이익이 더 많이 배분되는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이 생긴다. 물론 이런 방향으로 지나치게 나가게 되면 국가 경쟁력이 손상을 입게 될 것이므로 그 실천이 쉬운 일은 아니며, 또한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이런 일을 국가가 주도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대기업과 같은 사회의 영향력 있는 기관이 기능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가치가 자본주의 체제에 접목되도록 하는 자발적인 고민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과 성찰이란 단지 관리자에게 말로써 강조했다는 것만으로 그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만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라며 단순화 하고 더 이상의 논의를 거부하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이런 가치가 지배하는 속에서는 경제뿐 아니라 교육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하지만 민주시민으로서의 덕성이 실종된 채로 오직 입시 위주로 훈련 받은 젊은이들만을 배출하는 것으로 우리 사회가 온전히 기능을 유지할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