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용은 술병을 찾아내어 기어이 소주 세병을 다 마시고 쓰러졌다.
    안방 침대에 정수용을 눕힌 정기철이 제 방에 돌아왔을 때는 밤 10시 반이 되어 있었다.

    군에서는 이시간이면 취침해야 되겠지만 휴가 첫날 밤이다.
    욕실에 들어가 씻고 왔어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침대에 기대앉은 정기철이 문득 자신이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는가를 돌이켜 보았다.

    아까 뱉았던 말은 의식하기도 전에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것이 머릿속에 베어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 아버지로써 존경했다. 성실한 회사원이었고 나름대로 가정에 충실했다. 회사가 부도가 나 아버지가 폭풍에 날려 떨어지기 전까지 그렇다.

    그 후로는 엉망이다.
    그 후의 아버지 행태를 보면 무능했고 무책임했다. 공황 상태에 빠지더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으므로 정기철은 깜짝 놀란다. 군에 입대하고 나서 핸드폰을 정지시켜 놓았다가 집에 와서 개통시킨 것이다. 그래서 입대 후 첫 전화를 받는다. 핸드폰을 든 정기철이 발신자 번호를 보았더니 어머니다. 정기철이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엄마.」
    「밥 먹었니?」
    김선옥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꾸민것처럼 느껴졌다.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응 아빠하고 같이 먹었어.」
    정기철도 밝게 대답하고는 덧붙였다.

    「내가 김치찌개를 끓였더니 아빠가 한그릇 다 먹데.」
    「잘했구나.」
    「같이 술도 한잔 했어.」
    「잘했다. 그런데.」

    조금 뜸을 들인 김선옥이 말을 이었다.
    「방금 민화한테서 전화가 왔어.」
    「......」
    「내가 너한테는 말 안했어. 네가 먼저 민화를 만난다고 하길래 걔가 너한테 말 하게 두려고.」
    「......」
    「난 걔가 집 나온지 알고 있었어. 좀 이상해서 친구한테 전화했더니 같이 살고 있다더구나. 그래서 모른척 하라고 했다.」
    「......」
    「민화가 오늘에야 털어놓더라.」
    김선옥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아지고 있다.

    「네 아빠는 그 말을 나한테 안하더라. 민화가 집 나갔다고 말야. 하긴 한달에 한번쯤이나 나한테 전화를 하니까...」
    「엄마, 괜찮아?」
    「응, 일 다 끝나고 내 방에 있어.」
    「아빠도 자.」
    「내가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거야. 네 아빠가 나한테 전화 안하는거. 그리고 민화가 집 나갔다는 말을 안하는 것도...」
    「......」
    「그거, 자존심 아니겠니? 네 말대로 남의 집살이 하는 마누라에게 전화하기가 챙피한 자존심. 당신 싫어서 집 나간 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자존심.」
    「자존심 좋아하네.」
    마침내 얼굴을 일그러뜨린 정기철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래서 3년동안 방구석에 처박혀서 처자식 등골을 파먹고 있단 말이지? 좃까라고 해.」
    「맘에도 없는말 마. 기철아.」
    「시발, 한번만 더 민화 괴롭혔다간 내가 병신 만들거야.」
    「아니 왜? 뭘 괴롭혀?」
    놀란 김선옥이 물었으므로 정기철은 아차 했다.

    그러나 내친김이다.
    「아빠가 민화 회사에 술먹고 찾아가서 행패부렸대. 그래서 내가 경고를 했어.」
    그랬다가 뺨을 맞았다는 말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