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사회에서 법관은 특별한 존재다. 그들은 업무 중에 평복이 아닌 법복을 입으며, 유무죄를 판단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선거에 의해 뽑히지는 않는다. 진실과 정의를 가늠하는 법관의 책무가 막중하기에 존 로크와 같은 영국의 사회계약론자는 자연상태에서 발생하는 각종 분란들을 귄위 있게 분별해주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국가를 만든다고 설파했을 정도다.

  • ▲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 뉴데일리
    ▲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 뉴데일리

    그럼에도 엄숙해야 할 사법부의 판결이 최근 우리사회에서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어 유감이다. 우리는 재판에서 누가 이겼느냐, 누가 졌느냐하는 점에는 관심이 없다. 피고가 이기느냐, 원고가 이기느냐하는 문제보다는 정의와 진실이 승리한다는 문제가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강기갑 의원이나 MBC PD수첩의 경우는 물론, 최근 학생들에게 '빨치산 교육'을 한 것으로 재판을 받은 교사의 경우는 어떤가. 사법부는 이 모든 사건들에서 '피고'의 손은 들어주었지만, '진실'의 편은 들어준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폭력을 폭력이 아니라고 판결하고 광우병이 아닌 것을 광우병이라고 방송했는데도 허위는 아니라고 판정했다. 그뿐인가. 비판적 사고능력을 갖지 못한 학생들에게 자유민주국가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현장 교육을 했는데도 무죄판결이 난 것이다. 이런 판결의 상황에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떠올릴지언정, 어떻게 정의의 여신인 '디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프로크루스테스라는 괴물은 나그네를 유혹하여 자신의 집 침대에 묶어놓곤 했다. 그리고는 침대보다 다리가 길면 침대에 맞게 자르고 다리가 짧으면 침대에 맞게 다리를 늘였다. 이처럼 판사가 법과 양심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자의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유감스러운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번 판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사법부에서는 책임 있는 태도로 대응하기보다는 불을 끄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책임을 뜻하는 영어의 'responsibility'는 라틴어의 'respondere'에서 나온 말로 '답변한다'는 의미이다. 책임을 말하는 독일어의 'Verantwortung'도 대답을 뜻하는 'Antwort'에서 나왔다. 이처럼 책임은 답변과 관련된 개념이며, 답변을 하려면 반드시 질문자가 있게 마련이다.

    사법부의 판결에 대해 질문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질문자는 일단 재판의 당사자라고 하겠지만, 보다 큰 의미에서는 국민이다. 국민들은 판사에게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공정한 심판자로서 판정했는가"하고 묻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느끼는 법관이라면, 이 물음에 떳떳하게 답변할 수 있어야한다. 과연 그랬던가.

    국민들의 문제제기가 사법부의 독립을 해친다는 답변도 있었지만, 정도는 아니다. 사법부의 독립은 진실과 정의가 승리하는데서 찾아야지 진실과 정의가 패배하는데서 찾으면 곤란하다. 판사의 판결은 검찰의 기소에 대해서만 한정된다는 답변도 그렇다. 형식논리로는 맞는 말이긴 하나, 일반인들의 평균상식에도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사법적 판단의 정석이다.

    또 1심 판결이기 때문에 3심까지 기다려 보아야 한다는 사법부의 답변도 궁색한 답변이라고 생각된다. 재판의 삼심제란 같은 병을 가지고 의사들이 각각 다른 진단을 하는 황당한 진료상황보다는 다른 의사들이 계속해서 같은 진단을 하는 정상적인 진료상황을 연상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재판에 임하는 판사들의 생각이 다 같을 수 없다는 답변도 있다. 안될 말이다. 판사들의 사적인 생각이나 가치관은 다를 수 있겠지만, 진실을 바라보는 판사의 눈이 달라서야 되겠는가. 축구심판이라면 선수들의 반칙에 대해서 같은 의견을 가져야지 주심과 부심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다면, 관중이 존중할 수 있는 심판의 권위는 존재하기 어렵다.

    또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관여할 수 없다는 답변도 양심을 잘못 이해한 전형적인 오답이다. 양심이란 독단이나 독선과는 전혀 다른, 자기반성적 능력을 말한다. 편향과 독선을 양심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강변하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사법부가 그동안 내놓은 이 모든 답변들은 '국민 속의 사법부'의 위상에 걸맞는 책임 있는 답변이 아니었다. 물론 사법부는 '내용'보다는 '절차'에 의해 유무죄를 결정하는 헌법기관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다수결이라는 절차에 의해 입법행위가 이루어지는 국회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일반사람들로서는 그 재판의 내용과 관계없이 절차만 적법했다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한다. 바로 이것이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가 함의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절차주의는 판결의 정당성에서 핵심을 차지하지만, 정작 재판에 임하는 판사들이 조심하고 또 경계해야할 일은 자신의 판결에서 '오판(誤判)'이 일어날 가능성이다. 소크라테스도 당시뿐 아니라 현재의 기준으로도 가장 공정한 절차라고 할 수 있는 배심원재판을 받았지만, 그로 하여금 독배를 마시도록 결정한 아테네인들의 판결은 '불의의 판결'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법부도 '절차'를 중시하면 중시할수록 그 '내용'에서도 정의와 진실이 승리했다는 평가가 공동체의 다수 구성원들로부터 나오도록 해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강기갑의원이나 PD수첩, 및 '빨치산 교육' 교사의 판결과 관련, 상식이나 순리와는 동떨어진 '독불장군'의 판결이라며 강하게 우려하며 비판하고 있다. 당연히 사법부의 판사들이라면 재판의 철칙이라고 할 수 있는 절차적 정의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우려와 비판이 국민들로부터 쇄도하고 있는지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겸허하고 처절한 마음으로 반성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