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DJ는 "독재, 보수 정권 50년만에 민주주의를 좀 해보려고 했는데,,," 하면서 "억울하고 분하다"고 했다. 그가 대한민국 현대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역사라는 것은 밝은 줄기와 어두운 줄기를 동시에 봐야만 제대로 읽을 수 있다. 밝은 줄기만 보아도 역사 왜곡이지만, 어두운 줄기만 봐도 역사 왜곡이다. DJ는 자기와 노무현만을 밝은 줄기로, 나머지는 모조리 어두운 줄기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그 말 한 마디에 의하면...

    그가 어두운 줄기로 몰아버린 셈이 된 '그와 노무현 이외의 다른 모든 시대'에도 밝고 빛나는 대목은 얼마든지 있다. 대한민국 건국, 자유 민주 공화의 헌법 제정, 9.28 수복, 전후 복구, 산업화 성공, 정보화 착수, 1987년 이후 노태우, 김영삼 정부의 민주화 시작, 올림픽 개최, 세계화 시대 개막...등. 이런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은 김대중-노무현의 좌파시대의 쥐어 흔들기를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견뎌냈다. 유신시대 類의 험악한 고비도 있었고 숱한 괴로운 사연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전체적으로는 "아, 참 기적 같은 국운이었다"며 대견스러워하고 있다.

    더군다나, 유신 때와 80년대에 감옥 갔던 사람들의 어두운 추억만이 있는 게 아니라, 산업화 정보화 과정에서 남이 알아주든 말든 비지땀을 흘리며 무역, 전자산업, 조선산업, 강철산업, 중화학 공업, 방방곡곡의 인프라 확충의 최일선에서 청춘을 불살랐던 근대화 혁명 당사자들의 보람 찬 추억 또한 이 땅을 밝게 비춰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민주화를 하자고 해서 고생했던 사람들 가운데도, 자신들의 고난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지,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증오나 저주를 퍼붓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처럼 우리 모두가 어느 정파에 속해 있든, 다 함께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학교 다니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운, 그래서 고비 고비마다 우리의 희로애락과 열정과 애정과 성취감이 묻어나는 우리의 자랑스럽고 소중한 모태이자, 터전이고 젖줄이다. 비록 오랜 세월 고생을 했더라도 도저희 미워할 수 없는 것이 그 모태다. 그런데 DJ의 말에서는 도무지 그런 類의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로지 느끼게 되는 것은 "김대중, 노무현 시대 말고는 모조리 '개xx'라는 것밖에는...

    그러면서도 그는 대한민국의 성공한 역사와, 북쪽의 3대 세습 수령독재의 실패한 역사를 비교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명박 시대 남한의 '민주주의의 위기'는 지탄하면서도, 김정일 세상의 '인간의 초보적인 생존 조건의 위기'에 대해서는 별로 아픔과 분노를 느끼는 것 같지 않다. "북쪽에 억울한 점이 있다"고는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민주화 과정에서 DJ 자기 혼자만 고생 했나? 대통령급으로만 친대도 예컨대 김영삼 전 대통령이 DJ보다 덜 고생했다고 말할 수 없다. 더군다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의 '짠밥'에 있어서는 김지하, 이철, 류인태에 비해 명함을 낼 위치도 아니다.

    설령 고생을 지긋지긋하게 했다 하더라도 DJ 위치 쯤 되면 이제 그런 식의 '억울함'을 품어서는 안 된다. 민주화는 어쨌든 이제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도 해봤고 노벨 상도 타보았다. 여한이 있으려야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후배들이 잘 해주기만 바란다"면서 원로로서의 원숙하고도 고상한 모습을 보여야 할 나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참 아름답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