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김대중씨가 미국에 정치적 망명생활을 할 때 저는 김대중씨를 도와 민주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1985년 김대중씨가 귀국할 때는 김대중씨를 수행하는 비행기를 타기도 했습니다. 6.29 이후 김대중씨가 복권이 되었을 때 저는 김대중씨의 동교동 자택을 찾아 가 김영삼씨와 후보 단일화가 되지 않을 경우 대통령 출마를 양보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나라를 위해 죽음의 고비를 넘으셨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사형대에 서시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선생님의 그러한 신념과 헌신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순수성을 보여줄 때입니다. 그 길이 선생님이 역사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우뚝 서시는 길입니다."

    이야기를 끝내고 방에서 나올 때 김대중씨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 동지는 동전에 양면이 있는 것을 몰라."

    김대중씨는 대통령에 출마하고 저는 미국에 돌아와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김영삼 선생님 보다는 김대중 선생님과 인간적 인연이 더 깊습니다.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시면 제가 미국에서지만 조국을 염려하고 양심을 지키려 했던 것이 얼마나 자식들에게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리고 제게 인간적인 욕심이 생겨서 저도 조국에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고 매달릴 수 있는 마음의 언덕이 선생님께는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인간적인 아쉬움과 기대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저는 선생님께서 양보하실 수 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상상하기 조차 싫지만 노태우씨가 당선되어 국민들의 소박한 기대, 때묻지 않은 순수가 배신 당할 때 선생님은 결코 용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 편지는 제가 잠시 맺었던 김대중씨와의 인연을 끝내는 것이었고, 제가 걸었던 김대중씨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접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동전의 양면을 보는 세상적 유연함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큰 지도자는, 적어도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국가와 민족을 향해 순진할 정도로 순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순수성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열정의 샘물이 되고 칼날 같은 원칙이 됩니다. 지도자가 순수를 버릴 때 지도자는 개인의 욕심과 당리당략의 정치 기술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제가 김대중씨에게 대통령에 출마하지 말라고 간청했던 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거듭나는 역사적 전기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에 적체된 독재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고 믿었고, 6.29 이후 정권 교체는 낡은 역사의 찌꺼기를 씻어낼 수 있는 거대한 모멘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민주화 세력은 야당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김대중 김영삼으로 분열되면서 역사적 전기를 상실했습니다. 시대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거대한 에너지와 국민적 열망을 한 순간에 안개처럼 날려 버렸습니다. 개혁의 모멘텀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민주운동의 순수성을 배반했습니다. 모멘텀의 에너지와 열망은 한번 놓치면 흘러간 물이 됩니다. 민주화 세력은 한국의 민주화를 이룩하는 위대한 공헌을 했지만, 민주화 운동의 순수성을 배신하고 선진 민주국가로 개혁하는 길을 가로막은 역사의 죄를 지었습니다.

    민주화 세력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을 통해 정권을 잡았지만  펄펄 끓었던 국민적 열망과 희망은 식어 버렸고, 나라는 이념과 파벌과 지방색으로 조각이 난 뒤였습니다. 여기서 민주화 세력은 또 다시 실수를 했습니다. 이미 개혁의 모멘텀이 증발된 상황에서 과도한 개혁을 시도했고, 변화의 전기를 상실한 환경에서 나라의 방향을 급선회 시켰습니다. 그것도 너무 좌 쪽으로 갔습니다. 변화와 개혁은 필연적으로 저항을 불러일으킵니다. 국민적 열의와 통합성이 있어도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음모가 따라 다닙니다. 하물며 국민적 열기를 상실한 상황에서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나라를 분열시키고 국력을 소진시키는 싸움판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해진 실패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민주화 세력은 그동안 운동만 하느라고 실력을 함양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투쟁 세력의 한계이고 좌절입니다. 운동가는 역사를 바꾸고 진보시키지만, 운동가가 권력을 잡으면 역사는 방황하고 후퇴하기 쉽습니다. 운동가가 열매까지 먹으려고 하면 운동의 순수와 본질은 죽기 쉽고, 운동가가 내걸었던 깃발은 퇴색하게 됩니다.

    민주화 세력의 가장 큰 문제점은 권력을 잡은 뒤 보여준 배타성과 교만과 독선, 그리고 증오심이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민주화 세력은 교만했습니다. 자신들만이 민주주의를 쟁취한 것 같은 착각과 자만심으로 민주운동에 방관했던 사람들을 따뜻하게 껴안지 못했습니다. 침묵하는 다수는 비겁할 수 있지만, 침묵하는 다수가 있어서 민주 회복은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군사정권에 협조했던 사람들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미워하면서 자신들의 정의에 도취했습니다. 잔혹한 독재 정권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 것은 장한 용기였지만, 스스로 자랑하고 과장하면서 존경의 빛깔이 낡아졌습니다. 신념은 용기가 될 수 있지만 독선의 함정을 가지고 있고, 투쟁은 역사를 바꾸는 힘이 있지만 미움을 창궐케 할 수 있습니다. 저항하는 투쟁 세력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세력이 되면 과거의 얼굴과 가슴을 바꾸어야 합니다. 진보 세력과 민주 세력은 보수 세력과 과거 세력을 포용하고 그들의 협조를 구하는 것에 인색했고, 보수를 결집시키고 대결 세력으로 만들었습니다.

    민주화가 된 후 억눌렸던 사람들이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나라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갈 때 정권을 잡은 민주화 세력은 이러한 극단적인 파괴 세력을 절제시키기 보다는 그들을 고무하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집권 세력이 되면 자기들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나 신념보다는 나라와 국민을 우선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국가 이익과 집단 이익은 충돌하고 상충합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나라의 장래 보다는 자기들을 지지하는 집단 이익과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우선했습니다. 여기에 인간적인 욕심과 정치적 야망이 가세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둘러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비위를 맞추고 무리하게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것은 통일의 위대한 비전보다는 정치적 업적을 염두에 둔 계산이 앞섰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이 갈망하던 노벨상을 받았지만 그것은 그가 주창해 온 민주와 인권 정신을 훼손시키고 순수와 양심을 배반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모두 깽판 쳐도 북한 문제 하나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 막말을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흉내를 내어 북한을 방문했지만 그것은 국가의 자존심을 팽개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알현이었습니다. 거기에다 노무현은 저속한 언어와 품위 없는 행동으로 대통령직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권위주의를 청산한다는 이름으로 국가의 기강과 권위를 송두리째 흔드는 우를 범했습니다. 권위주의 쥐를 잡다가 국가 권위의 장독을 깨뜨렸습니다. 여기를 따르는 세력들이 열광하고 나라는 갈수록 쪼개지고 망가지고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나라를 운영했던 노무현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죽은 뒤 무기력하고 무능한 이명박 정부는 자살한 사람을 국민장으로 만들고 지탄받아야 할 자살을 서거로 만드는데 기여했습니다. 여기에 김대중 대통령이 뛰어 들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느낀 치욕과 좌절감과 슬픔을 생각하면 나라도 그런 결단을 했을 것 같다. 전생에 노 전 대통령과 내가 형제 가 아니었나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 말에 망연한 실소를 금치 못했던 저는 최근 6.15 공동선언 기념 연설을 접하면서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지 말자.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살아나고 있고 빈부 격차가 사상 최악으로 심해졌다. 우리는 모두 행동하는 양심으로 들고 일어나야 한다. 피 맺힌 심정으로 말한다. 행동하지 않는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이다."

    이 말은 결코 대통령을 지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일 수가 없습니다. 노무현 자살을 전생의 형제로 연결 짓는 발상이 놀랍고, 이명박 독재 정부를 행동하는 양심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말이 더욱 놀랍습니다. 대통령이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의 가장 큰 덕목 중에 하나는 금도와 절제력과 판단력입니다. 이명박 정부를 독재 정부로 규정하는 판단력이 상식을 벗어났고, 극단적인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제력이 정상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는 편협하고 무능한 정부이지 독재 정부가 아닙니다. 독재란 말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설사 독재적 성향이 있다고 해도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서라는 말은 망언 중에 망언입니다. 이것은 군사 정권시대에서 가능했던 저항시대 옛 언어 입니다. 김대중 시계가 1980년대로 돌아갔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식이 아직 정상적이라면 이번 발언은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쩌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죽은 뒤 역사의 평가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죽은 다음의 사후에 자신의 업적을 빛나게 평가해 줄 단단한 지지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역사의 평가도 결국은 이데올로기와 시각의 싸움입니다. 그 사회를 지배하는 철학과 사상이 누구이고 그들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에 따라 인간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역사의 눈도 달라집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점을 간파했을지도 모릅니다. 김대중을 역사에서 확실히 평가해 줄 세력은 현재로는 노무현 지지 세력입니다. 자살한 노무현을 영웅으로 만드는 광적인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의 감정에 영합함으로서 김대중은 노무현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노무현과 전생의 형제였고 자기도 노무현 같았으면 자살했을 것이라는 발언은 상식을 벗어난 발언이지만 고도의 계산된 자기 유업의 구축일 수 있습니다. 수없는 굴곡과 고난을 이겨 대통령이 되고, 치밀한 계산으로 노벨상까지 받은 김대중씨로서는 자신이 죽은 다음의 역사적 평가를 무엇보다도 염두에 둘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사후에 자기를 열광적으로 평가해 줄 지지 세력입니다. 김대중은 노무현 자살을 계기로 민주운동 당시 내 걸었던 빛바랜 "행동하는 양심"의 깃발을 20년이 지나서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우연의 실언이 아닐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제도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의식으로 가능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운동의 기수였지만 민주운동의 체질을 가진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제도로 성취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민주주의를 의식으로 정착시키는 것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잘못하고 문제가 있으면 다음 선거에서 교체시키면 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대통령이 무능하고 독선적이라고 해서 화염병으로 타도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한국에서 극단적이고 광적인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창을 휘두르고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죽창과 각목의 위세가 커지고 광장을 메운 촛불이 광포해질수록 민주주의는 위축됩니다. 광장과 촛불은 나라가 위급할 때,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능하지 않을 때 호소하는 절박한 수단입니다. 지금 한국을 휩쓸고 있는 광장 민주주의와 촛불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