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인규 한림대 도서관장·경제학과 교수 ⓒ 뉴데일리
    ▲ 김인규 한림대 도서관장·경제학과 교수 ⓒ 뉴데일리

    매 맞는 아내가 있다. 남편이 폭력을 휘두를 때면 매번 이혼을 결심한다. 그러다가도 그가 뉘우치는 기색을 보이면 다시 용서해준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를 잘했다고 자기최면을 건다. 비록 마음 한구석에 일말의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과거에 내렸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더라도 그 결정을 계속 합리화하려 드는 성향이 있다. '설득의 심리학(Influence)'의 저자 로버트 치알디니(Cialdini) 교수는 이것을 잘못된 '일관성의 법칙(commitment/consistency)'이라 부른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끊임없이 농락당해 왔다. 2000년 6월 DJ는 '친정 곳간'에서 4억5000만달러를 몰래 꺼내 김정일에게 갖다 바치며 평양으로 찾아가 '6·15 남북 공동선언'이라는 결혼식을 올렸다. DJ는 그 결혼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노벨평화상까지 타냈다.

    하지만 6·15 선언이 약속했던 평화나 김정일의 우리나라 답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돌아온 것은 2년여 뒤 북한군이 도발한 연평해전이었다. 윤영하 소령을 비롯한 우리 장병 6명이 전사했다. 그런데도 DJ는 북한을 나무라기는커녕 김정일의 답방만을 애걸하고 또 애걸했다.

    DJ는 북한이 이미 1994년에 핵을 포기했다며 만약 북한이 핵을 개발하면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2006년 10월에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DJ가 친정 곳간에서 몰래 송금해 준 돈의 대부분이 친정을 파괴할 흉기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도 1년 뒤 평양을 방문한 노 전 대통령은 그 핵실험에 대해 한마디 항의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정일에게 '10·4 남북 공동선언'이라는 선물만 안겨주고 왔다. 그 선물에 대한 북한의 뒤늦은 답례품이 바로 지난 5월의 2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다.

    그간 DJ는 김정일의 세습 독재와 인권탄압에 대해 줄곧 침묵해 왔다. 그러던 그가 지난 11일 6·15 선언 9주년 기념식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현 정부를 사실상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국민들에게 '행동'을 촉구했다. 그는 어느새 잘못된 일관성의 법칙의 포로가 되어 김정일의 '매 맞는 아내'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김정일에게 능욕당하면서도 오히려 그를 말리는 친정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결정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치알디니 교수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을 적용해 보라고 권한다. 김정일이 지금처럼 핵개발을 계속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리란 걸 DJ가 그때 알았더라도 불법 송금을 하고 6·15 선언을 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일관성의 법칙에 사로잡힌 사람은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DJ가 김정일에 대해 현재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은 실상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를 위한 허상이다. 그렇기에 2차 핵실험까지 겪어보고서도 현 정부와 미국이 잘못해서 김정일이 저렇게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일관성에 상응하는 경제학적 개념은 매몰비용(埋沒費用·sunk costs)이다. 과거의 지출 가운데 현재 회수 불가능한 부분을 매몰비용이라 한다. 우리 속담의 '이미 엎질러진 물'이 바로 매몰비용이다. 주식 투자에서 기관은 일정 부분 투자 손실이 발생하면 손실을 매몰비용 처리하며 주식을 내다 판다. 손절매(損切賣)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인 투자자는 잘못된 일관성의 법칙에 빠져 손절매를 하지 못하고 더 큰 손해를 본다. 그래서 개인이 기관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잘못된 일관성의 법칙에 사로잡힌 기간이 길어질수록 매몰비용은 점점 더 커진다. DJ '햇볕정책'의 의도는 좋았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많은 국민들을 현혹시켰다. 북한이 연평해전을 일으키고 1차 핵실험을 했어도 여전히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하지만 2차 핵실험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 대다수는 김정일에 대한 환상을 접고 햇볕정책을 과감히 매몰비용 처리했다.

    현재로선 DJ가 김정일에 대한 잘못된 일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로 인한 매몰비용을 가장 크게 부담하게 될 측은 민주당이다. 민주당이 차기 수권(受權)정당으로 거듭나려면 DJ를 하루빨리 '손절매'해야 한다.<6월23일자 조선일보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