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면수심의 '발바리'가 7년 넘게 경남 일대에서 활개치며 무고한 부녀자 50여명을 유린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짓밟는 동안 이 지역 경찰은 사건을 숨기는데 급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7일 법원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된 A(32)씨가 7년4개월에 걸친 성폭행과 강도 범행을 시작한 건 2001년 5월.
    경찰에 따르면 첫 피해자는 신고를 꺼렸고, 첫 신고는 두번째 범행이 일어난 직후인 2001년 7월 중순 접수됐다.

    신고를 받은 경남의 한 경찰서는 2003년 말 동일범에 의한 연쇄 강도강간 사건이라고 판단했다. 이때까지 자행된 범행 10건에서 채취된 체액이 같은 사람의 것으로 판명났기 때문.

    이쯤 되면 경찰 수사 관행상 지방경찰청 차원에서 수사본부를 차리는 게 통례지만 경남 경찰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경찰청 범죄수사규칙 13조에는 '경찰청장이나 지방경찰청장은 살인 등 중요한 사건이 발생해 종합적인 수사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수사본부를 설치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경남경찰청은 연쇄 범행을 보고받고도 일선 경찰서에 수사를 맡겼다.

    경남청 관계자는 "수사본부는 차리지 않았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역 관할 경찰서 3곳에 특별 전담팀을 꾸려 계속 수사했고, 경남청 주최로 경찰서간 사건 분석.검거 대책 회의를 여러번 했다"며 "경찰청에도 주요 미제사건으로 보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2000년 이후 경남청이 수사본부를 차린 건 2002년 퇴직 경찰관과 부인 살인사건과 올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경위조사 등 두차례 뿐이었다"며 "다른 지방청에서도 성폭력 사건으로 수사본부를 차린 예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추가 범행을 막기 위한 공개수사도 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가 도주할 우려가 있고, 자칫 피해자 신원이 드러날 수 있어 공개수사를 안했다. 범인 검거에 온통 신경을 쓰느라 언론에도 알리지 않았다"며 "대신 범행 피해가 일어난 지역에선 탐문 수사도 하고, 주민에게 '조심하라'는 말도 했다"고 설명했다.

    늦게나마 경찰이 범인 윤곽을 파악한 건 피해자의 신고 덕분이었다.

    한 주부가 지난해 4월 경찰에 "범인이 새벽 시간에 누군가와 통화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경찰은 전화 기지국의 통화연결 내역을 뒤져 2001년 7월 첫 신고를 받은 지 6년5개월이 지난 지난해 12월초 A씨의 연락처를 파악했다. 이미 10∼40대의 무고한 경남 지역 부녀자 55명이 성폭행과 강도 피해를 당하고, 2명이 강도 피해를 당한 뒤였다. 경찰은 지난해 12월 대구에서 A씨를 붙잡았다.

    A씨가 털어놓은 범행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조사결과 A씨는 주로 새벽 시간대에 여성 속옷을 복면 삼아 얼굴에 뒤집어쓰고 여성이 사는 원룸에 침입했다. 같은 장소에서 2~3명을 한꺼번에 성폭행했고, 가족이 보는 앞에서 몹쓸 짓을 하기도 했다. 여성이 저항하면 "아이를 흉기로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대담해진 A씨는 한낮에 아파트에 침입해 주부를 성폭행하기도 했고, 사건 현장에 지문을 남기지 않는 등 치밀함도 보였다.

    경찰이 "조기 검거에 실패했다"는 비난을 받을까봐 수사본부를 차리지 않고, 공개수사를 하지 않은 채 '쉬쉬'하는데 급급해하는 동안 범행 소문을 들은 경남도민들은 '연쇄 성폭행'이라는 집단 노이로제와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법원 판결 후 수사 내용을 공개한 경찰은 "일부 피해자가 수치심 탓에 신고를 꺼렸고, A씨가 복면을 쓴 채 새벽에 범행을 저지른 바람에 인상착의 파악도 어려웠다"며 "검거 후에도 A씨가 묵비권을 행사해 범행을 밝혀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명했다.

    또 "지난해 6개월간 통화 내역을 일일이 대조해 분석하는 등 범인을 검거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며 "과학 수사요원인 심리 분석가를 투입했고, 혈액.유전자 조사를 활용하는 등 과학수사 기법도 동원했다"고 덧붙였다. (창원=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