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3일 오피니언면 '시론'에 이 신문 김진 논설위원이 쓴 '공천이 역사를 바꾼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공천은 두 갈래로 국민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나는 실용성이다. 공천을 받은 이들이 대개 국회의원이 된다. 이들이 법을 만들고 정부를 감시하니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성이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공천은 역사를 바꾸어 왔다.

    1985년 2월 12대 총선. 김영삼(YS)과 김대중(DJ)은 5공 군부정권에 대한 일대 반격을 준비했다. 유신 시절의 신민당을 부활시켜 신한민주당을 만들었다. 신당은 거점 폭격 전략을 썼다. 주요 지역의 중심부에 민주화운동 투사를 공천해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서울에는 이철을 내세웠다. 그는 74년 대규모 유신 저항운동(민청학련)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살아났다. 포스터는 “사형수, 성북에 돌아오다”라고 외쳤다. 부산엔 YS 보좌관 출신인 문정수, 대구엔 골수 야당 투쟁가 유성환을 꽂았다. 마산엔 경희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강삼재, 대전엔 DJ계 송천영, 광주엔 재판정에서 학생들을 변호했던 신기하를 박았다. 이들 6개의 벙커버스터(bunker buster)는 5공의 벙커를 부숴버렸다. 신당은 돌풍을 일으켰고 제1야당으로 우뚝 섰다.

    88년 4월 13대 총선. 갈라선 YS와 DJ는 각자 새로운 전사를 출진시켰다. YS의 투사는 서울 김덕룡·강신옥, 부산 노무현·김광일, 경기 이인제·최기선 등이었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5공비리 청문회에서 스타로 뜨더니 15년 후엔 대통령이 됐다. YS는 지금 “내가 정치에 데뷔시킨 것을 후회하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노 대통령을 꼽는다. 그러나 부질없는 후회다. YS의 공천은 이미 대권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DJ는 동교동 출신과 재야그룹을 대거 공천했다. 이해찬·권노갑·이상수·이협·김종완·정상용·조홍규·양성우·오탄·김영진…. 작전은 성공해 DJ의 평민당은 제1야당이 됐다. 이해찬은 서울에서 5선의 김수한 의원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훗날 ‘노무현의 총리’가 된다.

    92년 3월 14대 총선. 당선자 299명 중 초선은 118명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이명박이 있었다. 그는 정주영 회장의 국민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자당 공천을 받았다. 16년 후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민자당의 공천을 받지 못했다면 이명박은 지역구의원(종로)→서울시장→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길을 달릴 수 없었을지 모른다.

    96년 4월 15대 총선. DJ는 대선 4수를 위해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었고 대대적으로 새 피를 수혈했다. 김근태·정세균·김한길과 천·신·정이라 불렸던 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이다. 이들은 DJ를 거쳐 노무현 정권의 주역이 되었다. 정동영은 훗날 대통령 후보가 되어 이명박과 일합을 겨루었다. 그가 아무리 스타앵커였다고 해도 공천을 받지 못했다면 정치권에 쉽게 진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정당들은 인물을 골라 공천을 한다. 한나라당엔 입시창구처럼 원서가 몰렸다. 신당과 민주당이 합쳐졌으니 통합민주당에도 특정 지역엔 소싸움처럼 머리가 부딪칠 것이다. 90년대 민주화 이래 한국의 대통령들은 모두 정당의 국회의원 공천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대통령뿐 아니다. 총리도, 장관도, 시·도지사도 국회의원 공천자 출신이 많다. 이렇듯 공천은 미래의 지도자를 잉태하는 자궁이다. 이번에 공천을 받는 이 중에서 5년 후, 10년 후, 15년 후, 20년 후 대통령이 나올지도 모른다.

    한나라당의 지도부와 공천심사위원, 통합민주당의 지도부·공천심사위와 시민심사단은 공천의 역사성에 엄숙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공천은 아파트 분양이나 외유 순서, 청소당번을 정하는 게 아니다. 한나라당은 ‘이명박의 선진화’를 받쳐줄 참신한 인재를 골라야 한다. 옛정에, 로비에, 파벌싸움에, 한 곳 두 곳을 포기하기 시작하면 큰일을 당할 수도 있다. 통합민주당은 공천을 잘하면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지역구의 잔다르크를 찾아야 한다. 역대로 공천을 잘하면 정당이 승했고, 잘못했을 땐 모진 시련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