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이툰 부대 1년 연장 주둔과 관련하여 노무현은 한미공조의 필요성을 그 주둔연장의 한 이유로 들었다. ‘한미공조’를 파기해온 노무현의 입에서 한미공조란 말을 듣게 되다니 참으로 의외다. 그렇다면 노무현이 말하는 ‘한미공조’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한미공조가 아닌 그들의 한미공조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미동맹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공산군사독재정권을 공동의 적으로 맺어진 것이다. 따라서 전쟁억지를 목표로 한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한국과 미국이 서로 협조하고 공동보조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것이 한미공조의 원래 뜻이다. 즉, 북한의 공산정권을 공동의 적으로 한국과 미국이 정책 공조를 하는 것을 한미공조라고 한다.

    그런데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부터 한미공조는 깨지기 시작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평화번영정책이란 이름으로 계속 추진한 노무현은 한미공조를 깨고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일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북핵폐기를 목표로 한 6자회담에서 북한의 대변하는가 하면 6자회담을 김정일을 살려주기 위한 평화회담으로 성격을 변질시켰다. 그 과정에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한다고 하여 한미동맹은 결정적으로 금이갔다.

    누가 보아도 한미관계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비유하여 한국과 미국은 별거관계로 들어갔으며 법적 이혼만 남겨 놓은 상태라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었다. 우리 보수우파진영에서는 이번 대선에서 정권을 탈환하여 훼손된 한미동맹관계를 복원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노무현의 이라크 파병도 훼손된 한미동맹에 대한 보상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말하자면 반미친북정책을 추진하면서 그것을 숨기거나 숨기기 위해 이라크에 파병을 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2.13합의를 계기로 미국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종전선언이니 평화체제를 언급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노무현은 임기 내에 종전선언이 가능하다고 호언하였다. 그 동안 한미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노무현은 미국이 북한의 독재정권을 인정하고 지원하도록 끈질기게 설득하였고 미국이 이에 결국 넘어갔다. 그래서 2.13합의가 가능해졌고 북한의 독재정권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는 것도 약속하게 되었으며 종전선언을 통한 체제보장도 약속하게 되었다. 노무현의 친북전략이 먹혀든 셈이다. 미국이 김정일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종국에 4자회담을 통해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을 맺어 김정일의 공산군사독재체제를 보장하도록 미국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이 말하는 ‘한미공조’의 실체다.

    노무현 정권에서 한미공조는 이제 더 이상 북한의 군사독재정권을 공동의 적으로 보지 않는다. 부시의 개인적 치욕이요 미국의 외교정책의 실패다. 부시가 말하던 자유의 확산 정책은 노무현의 방해공작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졌다. 부시는 이라크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되다가 노무현의 약은 수에 넘어가 북한의 반인륜적 공산군사독재정권을 보장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자유의 후퇴요 인권탄압에 대한 묵인이다. 노무현이나 부시는 이제 북한의 가장 악랄한 독재자의 인권탄압의 공범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국의 영구분단이라는 노무현의 반역에 부시가 가담하게 되었다.

    변질된 한미공조는 미국의 국제적 위상추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시는 아울러 개인적 신념도 지키지 못하는 졸장부로 전락하게 되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 입각하여 북한의 독재정권을 악의 정권이라고 혹평하며 자유의 확산을 주창한 부시, 이제 그도 이라크의 늪에 빠져 생존을 모색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 이 틈을 노려 노무현이 미국을 한반도의 영구분단 정책을 지지하도록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노무현에 있어 자이툰 부대는 미국이 김정일을 살려주도록 유혹하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노무현에 있어 자이툰 부대는 변질된 한미동맹의 인질에 불과하다. 한국군의 위상이 어찌하여 이렇게도 추락하였는가.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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