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금 여권 대선 주자는 스무 명이 넘는다. 나이 먹고 넥타이 맨 사람들이 관객도 없는 무대 위에서 밀려 떨어지지 않으려 엉겨 붙어 있는 모양 자체가 가관이다. 하도 이리저리 몰려다닌 통에 자신이 어느 당 소속인지도 모르는 사람까지 나왔다. 대통령 선거라기보다는 희극이다.

    야당 선거판은 멱살잡이로 흘러가고 있다. “양파처럼 까면 나온다” “한 방이라더니 헛방이다”는 게 국민 지지율 60~70%의 두 사람이 벌이는 공방의 핵심이자 거의 전부다. 8월 19일 경선 날까지 이 모양으로 갈 것이다. 이 동네도 대통령 뽑자는 것보다는 시장통 좋은 목을 놓고 벌어진 막가파 싸움판과 더 닮았다.

    이 참을 수 없도록 가벼운 대통령 선거판을 보면서 해리 도허티 감독, 워런 하딩 주연의 미국 정치 비극이 떠올랐다. 1920년 작품이다. 하딩은 미국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사상 최악으로 자주 꼽히는 제29대 대통령이다. 그는 백악관을 친구들의 놀이터로 만들고, 여행하다 만난 사람에게 고위직을 준 사람이다. 베르사유 조약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진행되는데도 이해도 제대로 못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은 최악의 부정부패로 얼룩졌다.

    하딩은 당초 유력 후보 반열에 끼지 못했다. 문제는 당시 미국 정치의 극단적 분열이었다. 그 분열 속에서 어부지리의 틈새를 간파하고 하딩 앞에 나타난 사람이 정치 기획자 도허티다. 하딩은 등을 떠미는 도허티에게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고 걱정했다.

    ‘미국 최악의 대통령 10인’(김형곤 역)에 따르면 도허티는 이런 하딩에게 “웃기지 말라. 대통령직이 위대하다는 것은 환상이다”라고 일갈했다. 하딩은 대통령직이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 말라는 말만 듣고 나섰다가 정말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민주 선거는 이런 사람들을 걸러내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 일확천금을 안겨주는 기회로 작용했다. 미국 정치사에 남을 한 건(件)을 한 도허티는 법무장관직을 차고 앉았고, 그 자리를 백만장자가 되는 데 활용했다.

    이 정치극의 감독인 도허티는 대통령 선거의 맹점과 대통령직에 오르는 사람들의 허상을 꿰뚫고 있었다. 물론 대통령직은 위대하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들이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대통령이 된 경우가 더 많았다. 도허티는 “대통령 그거 아무나 하는 거야. 선거판만 잘 타고 넘으면 되는 거야. 우리라고 못할 게 뭐 있나. 한 판 벌여 보자고”라고 한 것이다. 대통령직과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 야유는 분통 터지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스무 명이 넘는다는 우리나라 여권 후보들 대다수의 머릿속은 ‘도허티 철학’으로 꽉 차 있을 것이다. 지지율 1% 정도로 대통령이 될 꿈을 꾸고 있다면 지역으로 분열된 나라 상황을 이용해 선거판을 절묘하게 타고 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이미 한 번 성공한 전례도 있다.

    지지율 높은 야당 주자 두 사람은 “대통령직이 위대하다고? 웃기지 말라”고 했던 ‘도허티 철학’을 몸으로 실증해 보여주고 있다. 악다구니를 쓰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저렇게 해서도 대통령이 되는 것일까. 저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면 그 대통령직이 위대해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저절로 생긴다. 도허티 아닌 누구라도 “웃기지 말라”고 할 것 같다.

    하딩 다음에도 미국에선 대통령직을 욕보인 대통령들이 나왔고 싸구려 투전판 같은 대통령 선거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위대한 대통령들이 나타나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북한, 융성하는 중국, 막강한 일본 사이에 끼어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위대한 대통령이 필요한 나라에서 대통령 선거는 마치 하딩 선거처럼 진행되고 있다(하딩은 부정부패로 정권이 엉망진창이 된 상태에서 임기도 마치지 못하고 비명횡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