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 주태산 맥스무비 대표가  쓴 '고 신현확 총리에게 배울 것'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979년 초 청와대 본관 회의실. 박정희 대통령과 국무위원, 국회예결위원장과 여당 고위당직자들이 앉아 내무부 주관 농가주택개량사업 업무보고를 듣고 있었다.

    갑자기 박 대통령이 보고를 끊었다. 농가주택개량사업의 규모가 당초 9만 호에서 3만 호로 대폭 감축된 대목에서였다.

    “부총리, 나도 농촌 출신인데 더 투자합시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지만 낮았다. 그런데 거의 반박조의 답변이 튀어나갔다. 신현확 부총리였다.

    “각하, 경제의 안정구도를 갖고 나가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건설 자재값과 건설노임 상승, 재정부담 때문에 축소해야 합니다.”

    순간 장내가 얼어붙었다. 대통령도 놀란 듯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차트가 3장쯤 더 넘어갔을 때, 다시 보고가 중단됐다.

    “어이, 차트 다시 한 번 넘겨봐.”

    문제의 차트로 되돌아가게 되자 배석자들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래도 6만 호는 해야 하는 것 아니오? 어때, 부총리.”

    “안 되겠습니다.”

    답변에는 추호의 후퇴가 없었다. 대통령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매서운 눈매로 차트만 쏘아보았다.

    “할 수 없구먼.”

    박 정권의 마지막 경제부총리인 신현확에게 부여된 임무는 당초 정책개선을 통한 경제정상화였다.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무리한 정부주도의 과속성장으로 투자, 소비, 물가 부문에서 심각한 불균형과 부작용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존 경제정책의 조율에 그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지속되어온 성장정책을 안정화정책으로 전면 대체하고, 정부 개입의 축소와 시장의 자율 및 개방 쪽으로 물길을 돌리려고 했다. 그것은 한국경제정책의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었다.

    신 부총리는 1978년 12월 취임하자마자 17년간 박 정권이 이룩한 성장신화에 칼을 들이댔다. 수출지상주의, 중화학공업 정책, 새마을사업, 물가지수관리 등 숱한 성역을 타파하려 했다. 서슬 퍼런 청와대 주도의 제2석유화학단지 건설도 무산시켰다.

    그는 한국경제의 회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외압과 정치논리에도 타협하지 않았다. 신 부총리는 그것이야말로 대통령이 자신을 공직에 임명한 취지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0·26 다음날인 1979년 10월 27일 오전 9시30분. 신 부총리는 국내외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기존 경제정책 기조의 유지,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보장, 외국인 투자에 대한 법적 권익보장 등이 포함된 담화문을 발표했다. 사태 이후 최초의 정부발표였다. 그는 이어 경제5단체장과 노조대표들을 불러 협조를 요청하고, 시장의 생필품 가격 및 거래동향을 직접 점검했다.

    신 부총리는 정부기능이 혼란에 빠져있던 상황에서도 경제정책의 총수로서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그 덕에 당일 10% 가까이 급락했던 증시는 곧 안정세를 회복했다. 외환과 수출입동향도 정상을 유지했다.

    신현확 전 총리의 타계소식을 접한 오늘도 포털사이트 게시판에서는 정부의 대규모 공무원 증원계획을 두고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수조원의 인건비가 추가되더라도 대민업무가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되고, 기업활동 지원이 강화되어 수백조원의 ‘효과’가 기대된다면 누구도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토론이 추가 인건비 부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0·26사태 직후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의 현 상태는 안정됐고, 돌발적으로 지도자가 바뀐 다른 어느 나라와도 사정이 다르다”고 했다. 로이터통신은 “한국정부는 관료제도가 잘 지켜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정부의 행정업무 수행은 대통령으로부터 크게 독립돼 있다”고 격찬했다.

    나는 과거 기자 시절 역대 부총리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신현확씨가 어떤 공직자였는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국민들에게 ‘비용’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요즘의 공직자들이 깊이 되새겨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