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1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강효상 사회부장이 쓴 '이 대법원장, 국민앞에 사과부터 해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나를 따라다녀도 좋다. 신경 쓰지 않겠다. 농담이 아니다. 누구든 내 뒤를 밟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해보라. 그들은 (잡을 것이 없어) 매우 심심해질 것이다.”

    1987년 3월 초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게리 하트(Gary Hart) 상원의원은 자신의 스캔들 루머가 나돌자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큰소리쳤다. 두 달여 뒤인 5월 2일 저녁 그의 워싱턴 DC 집에서 젊은 여자가 나오는 장면이 목격됐다. 하트의 ‘장담’에 약 오른 기자 2명이 그의 집 주변에 잠복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트는 이를 보도한 언론을 공격했다. 진실을 파악하지도 않고, 상황을 부당하게 예단했다는 주장이었다.

    하트의 ‘버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흘 뒤인 5월 5일, 그가 혼외(婚外) 애인과 함께 요트를 타고 하룻밤을 보냈다는 제보에 이어 8일에는 요트 위에서 도나 라이스(Donna Rice)란 여자를 무릎 위에 앉히고 찍은 사진이 언론에 공개됐다. 그것으로 하트의 대통령 꿈은 끝이었다. 고위공직자는 일반인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며, 특히 자신의 발언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준엄한 여론 때문이었다.

    20년 전 게리 하트가 남긴 이 교훈이 오늘날 한국에서도 재연될 것인가. “10원이라도 탈세를 했다면 옷을 벗겠다”, “신앙인으로서 속인 일이 없다”, “대법원장쯤 되는 공직자라면 무한대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장담’이 언론의 검증의지를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법원장은 이미 세금 2700여만원 탈루와 떡값 전달 사실이 밝혀져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었다.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 법조계의 오래된 부패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사태가 악화되자 이 대법원장은 그간 거침없었던 말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언론을 향해 “이제 그만하자”고 손사래 쳤다. 하지만 검증을 받을 대상자가 그만하자고 해서 언론이 검증을 포기할 수는 없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독자들을 앞에 두고 언론이 권력자와 ‘게임’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대법원장이 해야 할 일은 침묵이 아니다. 그는 하루빨리 공개 석상에 나와 진심으로 사과부터 해야 한다. 자신의 경솔한 처신으로 사법부 전체의 신뢰가 훼손됐음을 인정하고,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검증받겠다고 나서야 한다. 고의성 없는 실수라거나 관행이었다는 변명으로는, 오늘도 숨죽여 법원청사를 드나들어야 하는 수많은 국민들의 공분(公憤)만 살 뿐이다.

    이 대법원장은 또 부패한 법조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순교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먼저 자신에게 5년간 60억원이란 거액을 벌어다 준 ‘전관예우(前官禮遇)’ 관행부터 근절시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선진국 그룹인 OECD 국가를 통틀어 재판에서 전관예우가 문제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한국 사회 전반에 연고주의가 뿌리 깊은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법조인들 사이에서 윤리의식이 희박해서 생기는 폐습이다. 종전(終戰) 직후 굶어 죽은 판사가 나왔던 일본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 대법원장은 앞으로는 대법관부터 퇴임 후 변호사 영업을 제한하고 아예 연금으로 생활하도록 하는 등 근본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수억원을 주고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자신의 변호사로 사지 못하는 돈 없는 서민들은 이제 누구도 한국의 재판결과에 승복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에 앞서, 이 대법원장은 지금 국민 앞에 사과부터 해야 한다.